조조의 기습 공격에 형주가 무너진 이유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 수준대로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조조가 요서 원정 후에 낙양으로 귀환하지 않고 업에 머무르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요서 원정의 후유증을 치료하기 위해서라고 짐작했다. 형주자사 유표도 조조가 업성에 머무르는 이유가 ‘휴식’이라고 생각했다. 조조가 근거지인 낙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소식이 전해졌지만, 병력을 훈련하고 있다는 정보까지는 들여오지 못했다. 물론 유표가 정보 수집을 게을리한 것은 아니다. 다만 업성은 형주에서 800㎞ 떨어진 곳이다. 당시 정보망으로 수백 ㎞ 떨어진 곳에서 벌어지는 일을 간파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형주자사로 시간 보낸 유표
▷삼국지 소설 이야기는 ‘허구’
유표는 지극히 ‘관료’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208년은 유표가 형주에 온 지 20년이 되는 해였다. 형주는 중국 대륙의 남과 북, 동과 서를 연결하는 십자로 같은 곳이다. 물류의 중심지로 부유하고, 인구도 많았다. 형주의 군적에 올라 있는 병사는 무려 17만명에 달했다. 마음만 먹으면 군벌로서 맹위를 떨칠 수 있는 지역이었다. 그러나 20년 동안 유표는 성심성의껏 자신의 임무를 다했다. 한나라 중앙정부는 있으나 마나 한 상태라 사실상 형주의 왕처럼 군림할 수도 있는 유표였지만, 그는 관료로서 본분을 지켰다. 쌓아 놓은 재산도 없었다고 한다.
조조가 비밀리에 형주 침공을 준비하고 있던 중요한 시기에 정사에서 유표의 기록은 침묵한다. 유표 측 대응이 역사서에 기록된 것이 없다. 나관중이 지은 소설에서는 이 기간 동안 유표 가정에서 분란이 일어났다고 묘사한다. 내용은 대략 이렇다.
유표는 첫 부인과 사별하고 형주에 와서 형주 지역 호족 채모의 누이 채씨 부인과 결혼했다. 첫 부인의 소생이 유기이고, 채 부인이 낳은 아들이 유종이다. 유기는 총명하고 어질어서 유표의 후계자로 적합했지만, 후처인 채 부인이 유기를 후계자로 삼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유표는 고민하면서 이 문제를 유비와 상의했다. 유비는 가정사에 개입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유표가 유비의 도움을 받아 유기를 후계자로 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채 부인이 극력 나서서 방해한다. 유비는 갈등을 피해 신야로 이주하지만 유비를 눈엣가시로 여기게 된 채 부인은 채모와 그의 부하 괴월을 시켜 유비 암살 음모를 꾸민다. 유비는 이들의 흉계에 빠져 암살될 뻔했지만, 이적의 도움으로 사전에 암살 현장을 탈출한다. 그러나 추격해 온 채모에게 붙잡힐 위기에 처하는데, 애마였던 적로마가 괴력을 발휘해 급류인 단계를 뛰어넘음으로써 위기를 모면한다.
이 이야기는 삼국지연의 명장면 중 하나지만 허구가 심하다. 일단 유기와 유종은 이복형제가 아니다. 같은 어머니 소생이다. 채 부인이 유종을 밀었던 까닭은 인척이었기 때문이다. 유종은 채 부인의 조카와 결혼했다. 채모 세력이 유종을 선택한 이유다.
유표가 유비에게 이 문제를 상의했다는 기록은 없다. 사석에서 상의했을지도 모르지만, 그 누구보다 유비를 견제하고 두려워했던 사람은 유표 자신이었다. 채모의 암살 시도와 적로마의 활약도 허구다. 그러면 유표는 도대체 무얼 하고 있었던 것일까.
▶유표가 조조를 방치한 이유
▷동오 땅 손권 세력의 위협
208년에 유표는 조조보다 더 신경 써야 할 적이 있었다. 바로 동오의 손권이다. 208년 봄 손권은 강하성을 함락하고, 부친 손견을 암살한 황조를 죽였다. 복수와 함께 형주 공략의 교두보를 마련했다.
지금까지 양자강 남부 지역의 동쪽은 오, 서쪽은 형주가 나눠서 지배하고 있었다. 오나라 땅에서 형주를 치러 들어오는 입구가 강하성이다. 강하를 통과하면 바로 형주의 수도 격인 무한(우한)이 나온다.
그동안 황조는 오나라의 파상공세를 꿋꿋하게 막아냈다. 유표와 황조의 관계를 보면 황조는 유표의 부하라기보다는 거의 독립 군벌이었다는 인상을 준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형주를 지키려면 유표는 황조를 적극적으로 도와야 했다. 하지만 적극성과 모험이라는 단어를 모르는 유표는 황조를 포섭하거나 지원하려는 노력조차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도 황조는 꿋꿋하게 강하를 지키면서 동오의 2대에 걸친 공격을 잘 막아냈다. 208년 동오의 침공 때도 황조는 자신이 있었다. 황조는 신뢰하던 장수이자 수군 도독인 진취를 내보내 오나라군에게 반격하게 했다. 성에서 방어를 한 것이 아니라 공격적으로 나섰다.
이때 오나라에는 비밀 병기가 있었다. 여몽이다. 여몽은 탁월하고 기발한 장수로 손권의 눈에 들었다. 강하 공략에는 여몽이 선봉을 섰다. 진취가 습격해 오자 여몽은 진취를 격파하고 직접 진취의 목을 벴다.
황조는 진취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바로 수성을 포기하고 달아났다. 오군은 황조를 추격해 그가 유표의 보호막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잡아서 죽였다. 그해에 손권은 또 하나의 군사적 쾌거를 이룬다. 남쪽의 오랑캐 산월족을 복속시킨 것이다. 196년부터 손책은 한 명의 유능한 장수를 발굴해 산월족과의 전쟁에 투입했다. 소설에서는 비중이 낮지만, 실제 역사에서 오나라의 세력 확장과 안정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던 ‘하제’다.
10여년 이상 산월족 토벌에 종사하던 하제는 208년 마침내 단양군에 있는 산월족 요충지를 토벌했다. 손권은 이 지역에 새로 신도군을 설립하고 하제를 태수로 임명했다. 이후로도 하제는 남쪽 지역을 굳건히 지키며 산월족의 반란을 분쇄했다.
“손권, 남쪽 지역 안정, 서쪽으로의 활로 확보.”
형주에 이 정보가 들어오지 않을 수가 없다. 이 때문에 유표에게는 조조의 동향보다도 손권의 동향이 더 신경 쓰였을 것이다.
이 위험하고 중요한 시기에 유표에게 또 하나의 청천벽력이 떨어진다. 그의 수명이 다했다는 통보였다.
형주는 오의 침공 앞에 놓이고, 유표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에 조조의 군단이 번개같이 형주로 치고 들어왔다. 전초기지였던 신야의 유비는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물러났다. 이건 유비를 탓할 수 없다. 전초는 전초일 뿐 방어기지가 아니다.
신야는 평원에 놓인 무방비 상태의 도시라 방어력을 기대할 수 없다. 유비는 주 방어선인 양양으로 후퇴했다. 이 무렵 유표가 사망한다. 후계자는 유종이었다.
유표가 급사함으로써 형주는 세 세력으로 분리됐다. 유비 세력과 맏아들 유기 세력, 그리고 형주의 상속자이며 지역 호족의 지지를 받는 유종 세력으로 갈라졌다. 힘이 모이지 않는 상태에서 조조와 싸우지도, 다른 세력과 합칠 수도 없었던 유종은 결국 조조에게 항복하고 만다. 유종의 항복은 조조에게는 최고의 결과였다. 자기 군대를 손실 없이 보존한 상태에서 형주의 병력을 그대로 흡수했다. 무혈입성으로 순식간에 조조의 힘은 2~3배로 늘었다. 이제 전국의 누구도 조조에게 대적할 수 없었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28호 (2021.10.06~2021.10.12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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