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림항과 오름, 한라산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
[노시경 기자]
제주 서부 천년의 섬, 비양도를 가보기로 한 날. 안덕계곡을 둘러본 후 갈치조림으로 점심을 먹고 길을 나섰다. 갈치조림과 같이 나오는 돌솥밥이 늦게 나와서 한림항 도선대합실까지 운전하며 가는 길에 마음이 급했다.
오후 2시, 2천년호 출항 10분 전. 하루에 4항차 밖에 운영하지 않는 배 시간과 비양도를 둘러보고 나오는 시간을 고려하면 오후 2시 배가 마지막 배이다. 급한 마음에 자전거 타고 가는 아저씨에게 대합실 위치를 물었더니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손가락으로 친절하게 여러 번 대합실 위치를 가리켜준다.
한림항에는 고기잡이 배들이 잔뜩 들어차 일대 장관이었다. 불을 밝히기 시작한 한치잡이 배들을 스쳐 지나며 내가 탄 2천년호는 바다 위로 나왔다. 아름다운 능선을 그리는 전형적인 오름 한 개가 바다 위에 솟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날아온 섬'이라는 뜻의 비양도는 아담하고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다가왔다.
▲ 비양도 전경. 제주도 서북쪽에 한 점으로 떠 있는 오름이 참으로 아름답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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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한 바다를 헤치며 나아가던 배는 15분 후에 비양도항에 닿았다. 방파제 위에 가지런히 정리된 비양도 여행코스를 읽어본 후 비양봉을 먼저 오르기로 했다. 비양도가 드라마 <봄날>의 촬영지라는 기념물과 함께 드리마에 나왔던 보건진료소도 둘러보았다. 그리고 우리는 이내 정겨운 현무암 돌담길이 이어지는 비양봉 산책로로 들어섰다.
▲ 비양도 항. 제주 본섬을 그리워하듯이 본섬을 향해 긴 방파제가 이어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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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익은 붉은 빛 동백나무 열매가 사람의 손길을 타지 않은 채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날씬하고 길다란 솔가지가 나무 데크로 오르는 길을 호위하고 있었고, 나와 아내는 비양봉이 바라보이는 능선 위에 올라섰다. 비양봉에는 제주 오름들 중에서 유일하게 두 개의 굼부리(분화구)가 있다고 하는데, 숲이 밀림처럼 분화구를 뒤덮고 있어서 분화구가 잘 구분되지 않는다.
▲ 대나무 숲길. 비양봉 정상으로 가는 대나무 숲길이 신비하게 눈 앞에 펼쳐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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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위기 만점인 대나무 터널을 통과하자 제주도 본섬과 한림항이 일망무제로 펼쳐지는 전망을 만났다. 바람 부는 바닷가 오름 위에서의 전망은 예상보다 훨씬 이국적이고 가슴 설레는 전망이었다.
▲ 비양봉 정상. 바다 위에 우뚝 솟은 오름 정상에서 제주 바다가 한눈에 펼쳐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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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m비양봉 정상에 올라서니, 태양열 전지판을 머리에 이고 있는 작고 하얀 비양봉 등대가 자리하고 있다. 얼마 전에 떠나온 한림항과 제주의 오름, 그리고 구름 덮인 한라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잠깐 동안의 등산으로 놀라운 풍경을 접하게 되는 곳이다.
▲ 비양봉 등대. 약간의 등산을 통해 등대 앞에서 놀라운 풍경을 만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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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동안 절경을 누리던 나와 아내는 이 절경을 마음껏 누리려는 다른 여행객들에게 등대 앞자리를 물려주고 다시 오름을 내려왔다.
▲ 코끼리 바위. 현무암 바위를 타고 올라가는 바닷가 식물들의 생명력이 놀랍기만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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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여기, 코끼리 바위가 있어. 이쪽으로 돌아오면 보여"라며 나를 불렀다. 코끼리 바위는 이름대로 코끼리의 코를 많이 닮았는데, 우리가 갔을 때에는 썰물 때여서 코끼리 바위 앞까지 걸어갈 수 있었다. 세계의 바닷가에서 다양한 코끼리 바위를 보아왔지만 바닷물의 염분을 견디며 바위 위에서 푸르게 자라는 식물들 때문에 비양도 코끼리 바위는 가장 신비롭게 보인다.
가장 놀라운 광경은 코끼리 바위 앞, 비양도 북쪽 바다 위에 널려 있는 고구마 모양의 대형 화산탄이다. 길이가 4m, 무게가 대략 10톤 정도로 추정되는 이 거대한 화산탄은 비양도에서만 볼 수 있는 신비로운 화산의 흔적이다.
커다란 암석 덩어리들인 화산탄은 화산 분출 때 나온 것들인데, 화산활동 중에 주변으로 터져 나가거나 쌓여서 현재의 모습으로 남겨진 것들이다. 비양도 화산 폭발이 얼마나 강렬했으면 10톤이나 되는 화산탄이 공중을 가르며 날아갔을까?
▲ 애기를 업은 돌. 이 호니토는 장엄한 화산활동의 역사를 그대로 보여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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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양도 북쪽 해안을 앞서가던 아내가 또 나를 부른다. 아내가 애기 업은 돌, 부아석(負兒石)의 기이한 모양을 만난 것이다. 이 신비한 바위는 보는 위치에 따라 모양이 바뀌기도 한다. 기암의 생김새가 어린아이를 업고 있는 모습과 흡사하다 하여 붙여진 이 기암도 비양도에서만 볼 수 있는 호니토(Hornito)이다.
▲ 펄렁못. 작은 섬 안에 자리잡은 호수의 고요한 운치가 포근하기만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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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 산책로를 걷다보면 바닷물이 지하로 스며들어와 만들어진 '펄렁못'을 만나게 된다. 길이 500m, 폭 50m의 초승달 모양인 '펄렁못'. 섬 안에서 만나는 자연 습지가 그렇게 아늑할 수가 없다.
▲ 소라를 손질하는 아주머니들. 아름다운 여행지 비양도는 치열한 삶의 현장이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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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양도는 누군가에게는 낭만적인 여행지이지만 누군가에는 치열한 삶의 현장인 것이다. 이 작은 마을에서 식사를 하고 나가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식사 시간이 맞지 않았고, 인심 좋은 주민에게서 커피 2잔을 얻어 마셨다. 이 정겨운 분들 때문에 내 기억 속 비양도는 가슴이 따뜻한 곳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
비양도 항을 나가는 배의 이름을 보니 2천년호이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화산활동 시기가 기록으로 남아있는 곳이 비양도인데, 이 역사로 인해 생겨난 배 이름이다. 1002년(고려 목종5년)의 화산분출 기록으로 인해 비양도는 최근까지도 천년 전에 만들어진 섬으로 믿어져 왔다. 그러나 최근 과학적으로 비양도 용암의 나이를 분석한 결과 2만7000년 전에 화산이 형성된 것으로 조사되었다.
비양도가 천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역사는 과학에 의해 깨져 나갔지만 2만7000년 역사의 비양도라고 하면 너무 삭막하지 않은가? 사람들의 상상력이 더해져 만들어진 비양도 천년. 비양도는 섬이 만들어진 이후에도 불과 천년 전에 용암이 분출하여 흘러내린 젊은 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양도에 대한 과학적 연구를 넘어서서, 비양도는 천년의 이야기가 담긴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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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에만 기사를 올리고 있습니다. 앞으로 제주의 마을, 오름, 바다와 그 안에 깃들인 제주의 이야기들을 여행기로 게재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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