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HD를 ADHD라 부르지 못하고... 8년을 더 방황했다

천승원 2021. 10. 6.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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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ADHD 노동자입니다 ②] '내 증상, 닭일까 달걀일까?' 성인ADHD 진단의 어려움들

늘 어딘가 남과 다르다고 느꼈습니다. 서른에야 ADHD라는 병을 처음 알았고, 서른여덟에 성인 ADHD 확진을 받았습니다. 실체를 모르는 병에 대해 고민하는 동안 사람들 각자가 품고 사는 보이지 않는 아픔을 살피게 되었습니다. 많은 아르바이트와 직장을 거친 후 자신에게 맞는 생활을 찾은 지금, 저의 이야기를 공유합니다. 보이지 않는 장애와 함께 살아가는 모든 분들의 삶을 대변할 수는 없지만, 함께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고 손을 흔들어 봅니다. <기자말>

[천승원 기자]

[기사 수정 : 2022년 11월 15일 오후 3시 40분] 

넷플릭스 드라마 <블랙 미러 4>의 에피소드 중 '블랙 뮤지엄'에는 '공감 진단기'라는 기기가 나온다. 이것은 병의 진단에 이용되는데, 의사가 귀 밑에 수신기를 장착하고 환자 머리에 헤어네트 같은 송신기를 씌워 환자의 괴로움을 자신의 뇌로 직접 전달받는 것이다. 오진이 많아 고민하던 의사는 고통의 부위와 형태를 알고 실패 없는 진단을 내리게 된다.

물론, 실존하는 기술이 아니라 다소 그로테스크한 SF적 설정이다. 하지만 이런 상상도 해 본다. 만약 그런 기술이 있었다면 나는 지금 더 나은 삶을 살고 있을까?

도장 깨기를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성인 ADHD(주의력결핍 과잉행동/충동조절 장애) 자가진단부터 확진까지 8년 정도 걸렸다. 상담센터 2곳과 한방신경정신과 1곳, 정신건강의학과 2곳, 총 23회의 상담과 약 9번의 다양한 검사를 거쳤다. 맛집도 아닌 이런 도장 깨기라니.

전문가들마다 생각이 달랐다. 마치 미션을 수행하고 쿠폰을 찍듯 "아닙니다", "맞는 것 같은데요", "그럴 가능성이 상당히 높습니다", "아닌 걸로 보여요"를 거쳐, 마침내 나는 증정 상품 같은 선언에 도달했다. "당신이 환자가 되는 것을 승인합니다. 땅땅땅!"

이 중 ADHD 가능성을 낮게 본 두 경우는 주의집중력, 충동성을 수치화하는 검사를 받지 않은 때였다. 겉으로 티가 잘 안 난다는 뜻이니, 나도 내가 비ADHD에 가까운 ADHD일 줄 알았다. 그러나, 태어난 지 38년 만에 받은 종합주의력검사(CAT)와 정량뇌파검사(QEEG) 결과가 예상을 뒤엎었다. 억제지속력과 간섭선택력은 각각 하위 5%와 하위 16%였고, 정보 전달 속도가 19%에 머물렀다.

그렇다면 나는 병명에 매우 충실한 성인 ADHD가 아닌가. 그런데 확진이 그렇게 어려웠다니. 나만의 문제는 아니다. 성인 ADHD 환자 커뮤니티 게시판에는 답답함을 호소하는 글이 꾸준히 올라온다.

ADHD가 맞는 것 같은데 의사는 부정적이라거나, 확진됐지만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는 얘기, 여러 병원에 갔는데 의사마다 의견이 다르다는 얘기. 어째서 성인 ADHD를 가려내기가 이다지도 어려운 걸까?

원치 않는 1+1, 아니 1+'n'

"네, 확실히 아니에요. 보면 알아요."

상담선생님의 눈빛과 목소리는 단호했다. ADHD를 다루는 상담센터를 찾은 것은 4년 전 직장 스트레스가 직장 공포증으로 변했을 때다. 내게는 그간 꾹꾹 눌러 담은 ADHD의 설움으로 푸진 말잔치를 하리라는 포부가 있었다. 그러나 이 야무진 계획은 선생님의 몇 마디에 전면 수정되었다.

"우울증이나 불안장애 때문에 말이 잘 생각 안 나고 안 들리기도 해요. 인지행동치료를 하면 나아질 거예요."

문제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하는 것이었다. 당시 청소년기부터 내 마음에 세 들어 사시던 우울 씨와 불안 씨 부부가 세를 키워 건물주 노릇을 하고 계셨는데, 이들 공존질환으로 인해 기저질환인 ADHD가 '묻힌' 것이다.

인지 기능이 저하되는 현상은 우울이나 불안이 지속된 경우에도 나타난다(1). 이러한 경우, ADHD로 문제를 많이 겪어서 우울하고 불안해졌는지, 반대로 우울장애와 불안장애를 앓다 보니 일상이 엉켜서 ADHD 증상과 비슷해진 것인지 아리송하다.

그럴 때 전문가들이 택하는 방법은 다른 질환이 사라져도 ADHD가 남아있는지 보는 것이다. 내가 우울할 때 만난 정신건강 전문가들이 모두 '우울증부터 치료하자'고 권했던 것을 나는 이해한다. 어찌 그분들에게 무속인의 능력을 요구하랴. 그래도 안타까운 이유는 기저질환인 ADHD를 그대로 둔 채 공존질환만 치료할 경우, 치료해도 나아지지 않는다는 자괴감에 빠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2).

나 역시 우울증 개선에 집중했으나 상담이 중기에 접어들면서 '이게 아닌데' 싶었다. 당장 어설프고 두서 없는 내 모습은 나에 대한 사람들의 부정적 믿음이 활활 타오르도록 장작이 되어 몸을 던지고 있었다. 

'성과에 따라 내 가치가 달라지지 않는다'는 자기암시도 매번 그 불길 속에 한 줌 재로 사라졌다. 상담 이전과 다른 결의 정체감이 찾아왔고, 어영부영 상담 주기만 늘리다 마지막날에 털어놓고 말았다.

"선생님, 아무래도 저는 ADHD 때문에 힘든 게 더 큰 것 같아요."

내 생각을 일찍 말하지 않은 것이 후회되었고, '정말 ADHD도 아니고 우울증도 그대로라면 내가 나아지는 길은 영영 없는 거 아닐까' 기약 없이 암담해졌다.

조금 더 쉬운 구분을 위해

우울감과 우울증이 다르듯, 비ADHD도 종종 주의집중이 어렵고 과잉행동을 하지만 ADHD 환자들은 그것이 정상적 생활을 방해할 만큼 반복, 지속된다. 자신이 ADHD인지 곧바로 확인하기 어려운 분들은 먼저 주의집중력, 과잉행동, 충동성 관련 증상이 최근의 경향인지 과거부터 지속돼 온 문제인지 생각해 보자.

ADHD는 대부분 '본 투 비 ADHD', 선천적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주의집중력과 행동을 조절하는 신경전달물질(도파민, 노르에피네프린 등)의 불균형으로 발생한다. 연구에 따르면 유전적 영향이 가장 크고, 드물게 뇌 손상, 뇌의 후천적 질병 등이 원인이 되기도 한다. 성인 ADHD 역시 아동기 ADHD가 성인기로 이어진 것이기 때문에 진단 시 의심 환자가 12세 이전에도 증상을 보였는지를 확인한다.

공존질환과의 구분을 돕기 위해 지나온 삶을 차분히 돌아볼 필요도 있다. 의심 증상으로 생각되는 첫 기억은 언제인지, 정서적 문제나 불면 등이 있다면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인생의 중대한 사건 이후 변화한 점이 있는지 등을 짚어보면 검사지를 작성하거나 전문가와 이야기할 때 진단의 실마리가 될 수 있다. 

ADHD의 유형과 병증 양상은 생각보다 다양하다. 그러니 인터넷의 자가진단 문항이나 주변의 평가는 어디까지나 하나의 근거로만 여기는 것이 좋다. 늘 멍한 상태로 다녀도 계획과 주변 정리는 힘들지 않을 수 있고, 과잉행동이나 충동성이 학습에 따른 억제로 잘 드러나지 않는 경우도 많다(3). 이 병은 학업이나 직업적 성취, 지능에 따라 판단할 수 없고, 집중을 잘하는가보다 집중에 대한 '통제'를 잘하는가를 따져봐야 한다(4).
 
▲ 검사결과지 병원 정보는 성인 ADHD 커뮤니티 ‘에이앱'(a-app.co.kr)에서 제공하는 성인 ADHD 진료 가능 병원을 참고할 수 있다. 보통 정신의학과에서는 성인 ADHD 판정을 위해 종합심리검사(Full battery), 종합주의력검사(CAT), 정량뇌파검사(QEEG), DSM-VI진단 등을 시행한다. 이 중 일부 검사만 할 수도 있으며, 어떤 검사를 받을지는 환자의 상태와 의사의 재량에 달렸다. 모든 검사를 받을 시 비용은 35~50만 원 정도지만 병원에 직접 문의 또는 방문해야 정확히 알 수 있다.
ⓒ 천승원
 
ADHD 환자의 10%는 치료 없이도 큰 문제 없이 생활한다고 한다. 하지만 만일 "왜 이렇게 일상적인 것들이 힘들지?"라는 의문을 오랫동안 가져왔다면, 꼭 '성인ADHD' 전문가를 찾아 여러 검사를 받아보자. 병명을 확인하는 일조차 뜻대로 되지 않을 수 있지만, 큰 산을 넘은 뒤에는 치료를 통해 점차 내 뜻대로 되는 일상의 맛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뇌와 뇌를 연결할 수 없으니

정신적 문제를 정확히 전달하는 일은 몹시 까다롭다. 증상 자체만 나열하면 마치 누구나 겪는 현상 같고, SF 드라마처럼 뇌와 뇌의 연동이 가능한 것도 아니니 말이다. 그대로 보여주지 못해 답답했던 것들을 표현하려면 약간 문학적 감성을 발동시켜야 한다.

뇌에 안개가 자욱한 느낌, 남들이 100킬로로 달리는 고속도로에서 50킬로로 달리면서 길을 막는 느낌, 머릿속에 켜져 있는 10개의 라디오채널을 헤치고 간신히 마주 앉은 사람 말을 듣는데, 그 말이 모스부호처럼 끊겨서 들리는 느낌, 초 단위로 다른 시험을 보느라 머리가 혹사당하는 느낌 등. '공감 진단기'까지 갈 것 없이, 과거의 내가 잘 표현했다면 공존질환 때문에 나타나는 증상과는 분명 다른 점들이 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1년 넘는 상담 동안 마음에 새기게 된 것도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이 자신을 지켜줄 수 있어야 하고, 문제에 대해 실제보다 더 큰 책임을 자신에게 지운다면 그건 가장 중요한 사람을 홀대하는 일이라는 것.

그래서 정확한 검사를 미루고 인생의 암흑기를 쭉쭉 늘린 자신을 탓하지 않는다. 혼자 헤맨 시간 만큼, 비슷한 길을 헤매는 분들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생겼다는 것을 떠올려 본다. 에세이 <젊은 ADHD의 슬픔>으로 브런치북 대상을 수상한 정지음 작가가 인터뷰에서 전한 말처럼(관련 링크).

"살면서 낭비된 시간이라 생각되는 시간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소중했던 시간이 있고 소중하지 못했던 시간이 있어야 그 시간들의 가치가 서로 맞물리면서 '지금'도 의미가 생긴다. 그런 걸 알게 된 것 같아요."

*참고 설명 
(1) 우울증과 불안장애 외에도 강박증, 조울증, 사회공포증, 아스퍼거증후군, 경계선 인격장애 등이 ADHD와 혼동될 수 있다.

(2) 약물 치료와 인지행동치료의 병행이 필요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3) 관심 대상에 대한 과몰입도 ADHD 증상 중 하나다. 병명에 '집중력 결핍'이 아닌 '주의력 결핍'이 들어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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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다 적지 못한 말: 내가 만난 상담사님이 문제의 원인을 ADHD가 아닌 '높은 성취 기준과 강한 통제 욕구'로 판단한 데는 '성취'에 집착하는 내 성향과 이력, 민감하고 경직된 모습 등이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싶다. 잘 듣지 못한 부분을 감추려 몸에 익혀온 순종적 태도도 한몫했을 것이다. 진단의 어려움과 문제점을 전달하고자 내 실패담을 적었지만, 환자에게 진심으로 공감하고 성심껏 애써 주시는 많은 상담사분들의 노력이 폄하되지 않았으면 한다. 병의 특성뿐 아니라 성역할 수행, 병의 이미지 등 사회문화적인 면에서도 성인 ADHD 진단을 어렵게 하는 요소들이 많다. 다음 이야기에서 여러 요소를 종합해 ADHD 관련 오해들을 짚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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