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준의 여행만리]별 보러 가는 길..일망무제 풍광에 빠져드네
[아시아경제 조용준 여행전문 기자] 경북 영천에서 첫손으로 꼽는 유적은 포은(圃隱) 정몽주(1337~1392)의 학덕이 서린 임고서원입니다. 정몽주는 조선 개국 세력에 맞서 고려 왕조를 지키려 맞서다 선죽교에서 목숨을 잃은 충신입니다. 다음엔 보현산천문대가 손꼽힙니다. 별을 보거나 보지 않거나 천문대로 가는 길은 굽이굽이 짜릿합니다. 천문대 주차장에 차를 대면 시루봉(1,124m)으로 가는 '천수누림길'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1000고지가 넘는 고산을 느릿느릿 산책하듯 올라 일망무제로 펼쳐지는 장대한 풍광을 만날 수 있습니다. 화산면에는 '아름다운 윗마을'이란 뜻을 가진 가상리(佳上里)가 있습니다. 부드럽고 점잖은 그 이름이 부끄럽지 않게, 마을은 순하디 순한 아름다움으로 가득합니다. 그뿐인가요. 천연기념물 404호 지정된 오리장림(五里長林)도 있습니다. 이름 그대로 '5리(2㎞)'를 이어지던 '긴 숲'은 400년 전 조성되었습니다. 한때 왕버들, 굴참나무, 회화나무, 느티나무, 팽나무들로 가득한 숲은 지금은 왜소하지만 모진 시간을 견디며 살아남은 거목의 위세는 당당합니다. 숲 하면 팔공산 자락의 절집 은해사로 드는 천변의 소나무 숲길의 그윽함도 빼놓을 수 없는 노릇입니다.
◇별볼까? 경치볼까? 보현산천문대와 시루봉 '천수누림길'
영천은 예로부터 이수삼산(二水三山)의 고장이라 했다. 보현산을 발원지로 동서에 자호천과 고현천이 흘러 금호강을 이뤄 이수라 한다. 또 북쪽의 보현산, 동쪽의 운주산, 서쪽의 팔공산을 가리켜 삼산이라 했다. 이처럼 보현산은 영천을 상징한다. 산세는 방패나 삿갓 모양으로 부드럽다. 마치 어머니가 아이를 안고 있는 형세라 하여 모자산(母子山) 또는 자모산(慈母山)이라 했다. 그러나 산의 장중함이 거대한 코끼리를 닮아 보현산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보현산이 더 유명해진것은 1994년 4월 보현산천문대가 생기면서다. 국내 최대 구경인 1.8m 반사망원경과 태양플레어 망원경을 보유하고 있다.
보현산은 별 보러 가는 거뿐만 아니라 드라이브와 산책을 위한 방문도 꼭 해봐야한다. 보현산 아래 별빛테마마을에서 천문대까지는 굽이굽이 약 8㎞ 산길이다. 지그재그로 돌고 또 돌아 오르는 길이다. 도로 포장 상태는 양호하지만 굴곡과 경사가 심해 운전에 조심해야 한다.
천문대 주차장에 도착하면 맞은편 숲속으로 들어가는 산책로가 보인다. 천문대 남쪽 산기슭 해발 1,000m 부근에 조성한 '천수누림길'이다. 이름처럼 장수가 보장되는 건 아니지만 천상을 누리는 길임에는 분명하다.
길은 보현산 서쪽 정상인 시루봉까지 약 1㎞ 남짓, 넉넉잡아 20분이다. 전체 구간에 목재 덱이 깔려 있다. 중간 지점까지는 계단이 없어 누구나 쉽게 걸을 수 있다. 정상까지 두어 차례 계단이 있지만 힘들지 않은 산책길이다. 두 사람이 나란히 걸을 만한 너비에 무릎 관절통 따위는 전혀 없는 평온하다. 문득문득 어디선가 음악도 흘러나온다. 어린 시절 음악책으로 배운 곡들이다. 이름 모를 새 한 마리가 창공을 휘휘 휘젓는다.
길 중간에 쉼터 겸 전망대가 2곳이 있는데 위에서 보면 별 모양이다. 국내 최고 천문대를 보유한 산이라는 자랑이다. 전망대에 서면 지나쳐 온 산마을이 까마득하게 내려다보이고, 그 위로 이름 모를 능선이 겹겹이 병풍을 두르고 있다.
시루봉에 섰다. 산의 형태가 떡시루를 닮았다는 시루봉은 전망이 뛰어나다. 숲길과는 또 다른 웅장한 풍광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맑은 날에는 팔공지맥의 팔공산, 화산은 물론 멀리 선암산, 금성산, 포항이 한눈에 담긴다. 가까이로는 발아래 보현산댐 호수가 산그늘에 푸르게 갇혀 있다.
천문대쪽으로 내려다보면 둥근 돔 지붕을 가진 전시관과 붉은 벽의 연구동, 그리고 멀리 정상에 우뚝한 직사각형의 1.8m망원경동이 한눈에 들어온다.
누구는 보현산에 왔으면 별을 봐야 직성이 풀린다 하고, 누구는 일출과 일몰이 아름답다 하지만 '별 볼 일 없는' 낮에도 이렇게 장엄한 풍광을 선사한다. 살짝 일몰에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음 목적지로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신(新)몽유도원도, 지붕 없는 미술관 된 가래실 문화마을
화산면 가상리는 '아름다운 윗마을'이란 뜻이다. 마을 가운데로 삼부천이 흐르고 뒤로는 백학산이 부드러운 선을 그리며 서 있다.
가상리는 마을 미술 행복 프로젝트 사업 공모에 '신 몽유도원도'라는 이름으로 선정된 미술마을이다. 그때 마을로 들어온 화가며 조각가들이 주민들과 한동안 어울려 살면서 마을을 단장했다. 마을과 어울리는 자리마다 정성으로 그리고 빚어냈다.
수십 년간 비워둔 빈집이 그 자체로 인상적인 오브제가 됐고, 마을 주민들의 과거 추억이 소박한 박물관에 담겼다. 가상리 4개의 마을이 하나의 지붕 없는 미술관이 된 셈이었다. 그 중 가래실 골목길은 '걷는 길'이다. 2016년부터 2018년까지 '가래실 문화마을' 조성사업을 통해 다시 한 번 변했다. 사라진 것도 있고, 새로운 것도 있고, 여전히 꿋꿋한 것도 있다.
신 몽유도원도 관람의 시작은 아름드리 플라타너스를 두르고 있는 시안미술관이다. 한때 학생 수 400명을 헤아렸다던 화동초등학교가 학생 수 부족으로 1999년 폐교된 뒤 2004년 그 자리에 들어선 미술마을의 중심이다. 폐교를 활용한 미술관이라 생각되지 않을 만큼 근사하다. 미술관의 잘 단장된 건물도, 다양한 테마로 진행되고 있는 전시도 그렇지만, 너른 잔디밭과 그 주위의 아름드리 플라타너스 나무만으로도 마음을 끈다.
미술관 옆 작은 숲속에는 '오픈그린'이 자리한다. 한 건축디자인회사가 숲에 아홉 평의 실내 공간과 여섯 평의 데크를 지닌 건물를 지었다. '우리가 행복해지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공간은 어느 정도일까'라는 물음에서 시작된 일종의 건축적 실험에서 탄생한 공간, 아지트였다. 건물은 현재 파티하우스다. 돌잔치나 소규모 결혼식 등의 행사가 가능하다. 주변에는 작은 오두막인 호밍과 피크닉 존이 마련되어 있다.
미술관 옆으로 난 길을 따라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공예 체험장이 눈에 들어온다. 천연염색, 손바느질, 자수와 매듭, 제과제빵, 목공 등을 배워보는 곳이다.
걷는 골목길은 조용하지만 생기가 있다. 산이 들어와 펼쳐지고 벽에서 쇠구슬의 폭포가 쏟아진다. 고흐의 소용돌이치는 별들에 휩싸이고, 나란히 앉은 어린왕자와 여우 사이에 귀를 쫑긋해 본다. 옛 마을회관은 '마을 박물관'이다. 마을 사람들과 그들의 소박한 삶이 담겨 있다. 코로나19가 종식되어 조용한 골목이 시끌벅적해지길 기대해본다.
◇포은 정몽주 학덕기린 임고서원과 거목의 위세 당당한 오리장림
영천에서 첫손으로 꼽는 역사 유적은 임고서원이다. 임고서원은 이곳이 고향인 포은 정몽주의 학덕을 기리는 시설이다. 포은은 이색, 길재와 함께 삼은의 한 사람이다. 고려 말기 오부 학당과 향교를 세워 후진을 가르치고 성리학의 기초를 닦은 인물이지만, 역사에서는 조선 개국 세력에 맞서 고려 왕조를 지키려다 개성 선죽교에서 이방원 일파에게 목숨을 잃은 인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서원 앞마당에 당시의 심정을 표현한 '단심가'와 그의 모친이 지은 것으로 알려진 백로가를 새긴 비석이 있다. 오래된 은행나무 근처에는 선죽교를 재현해 놓았다. 포은이 낚시를 즐겼다는 조옹대에 오르면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부터 부모의 묘소까지 산책로(2.2㎞)가 조성돼 있다.
화남면에서 화북면으로 이어지는 35번 국도변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오리장림이 있다. 자천리에 있다고 해서 '자천숲'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름 그대로 '5리(2㎞)'를 이어지던 '긴 숲(長林)'은 400년 전 조성된 방부림이다. 사실 그 숲은 지금 왜소하기 짝이 없다. 한때 왕버들, 굴참나무, 회화나무, 느티나무, 팽나무들로 가득한 숲이 사라호 태풍으로 절반 이상이 유실됐다. 남은 숲도 국도 확장공사로 두 동강이가 나버려 5리는커녕 2리도 채 안 될 지경이다. 하지만 모진 시간을 견디며 살아남은 거목의 위세는 당당하다.
영천=글 사진 조용준 여행전문기자 jun21@
◇여행메모
△가는길=수도권에서 가면 영동고속도로 여주분기점에서 중부내륙고속도로 낙동분기점에서 영덕방면으로 동영천IC에서 영천, 임고방면으로 나와 양향교차료에서 좌회전하면 임고서원이다.
△볼거리=팔공산 은해사, 돌할매, 영천재래시장, 횡계구곡, 영천댐 벚꽃백리길, 수몰마을인 은하수마을 등이 있다.
조용준 여행전문기자 jun21@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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