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해방구 된 부산영화제, 남포동에 울린 검열철폐 함성

성하훈 2021. 10. 6.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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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운동 40년_25] 부산국제영화제2. 정치적 독립성 확보와 검열철폐 투쟁

[성하훈 기자]

 1회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림 남포동. 배우 조안 첸의 야외무대 인사
ⓒ 부산영화제
 
1996년 9월 14일 토요일. 남포동 거리는 인산인해였다. 전날인 13일 수영만 요트경기장에서의 개막식을 시작으로 막이 오른 1회 부산영화제는 일반상영이 시작된 첫날부터 몰려든 관객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극장 안과 거리 모두 관객의 물결로 넘실대는 중이었다.

당시 신축 중이던 대영극장(롯데시네마 대영) 앞에는 관객들이 오가며 쉴 수 있는 편의시설로 파라솔과 의자가 설치돼 있었다. 하지만 감독과 배우가 나타나는 야외무대 행사 때면 몰려드는 엄청난 관객으로 인해 장애물 취급을 받을 정도였다.

일요일인 15일 야외무대 인사를 위해 남포동을 찾은 배우 조안첸은 몰려든 인파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토록 많은 관객이 몰릴 줄은 상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1회 부산영화제가 국제영화제의 매력을 알려준 건 배우들의 잇따른 등장이었다. 영화제가 배우와 관객의 거리를 좁히는 행사라는 것을 실감하게 해준 것이다.

9월 15일 일요일 오후 박광수 감독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주연인 배우 홍경인과 독고영재가 무대인사를 위해 나타나자 관객들은 환호했다. 간단한 인사말이 끝난 후 사회자는 "질문하고 싶은 사람은 손을 들라"며 배우와 직접적인 대화 기회를 제공했다. 가까이 보는 것만도 특별한데, 즉석에서 유명 배우와 질문과 답변이 오갈 수 있는 것에 관객들은 들뜬 표정이었다.

홍경인은 질문 기회를 얻은 관객이 노래를 불러 달라고 요청하자 즉석에서 노래를 불러야 했다. 독고영재에게는 "한국영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이 나왔다. 그는 "어려운 질문이다"라며, "한국영화를 많이 사랑해 주고 많이 봐달라"는 요청으로 답을 대신했다. 처음 열린 국제영화제가 생소했으나 그만큼 관객들에게 특별하게 다가간 시간이었다.

첫 회 영화제를 찾은 관객은 모두 18만 7천이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관객 수였기에 부산영화제 조직위원회도 당황했다. 영화제를 시작하면서 예상했던 관객은 최소 3만 명~최대 5만 명 정도였다. 3만 명만 와도 충분히 성공한 것이었고, 장기적인 희망을 얻을 수 있었다. 예상 관객 수를 놓고 서로 내기를 했을 때 누구도 7만 명 이상을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결과는 크게 달랐다. 이용관(부산영화제 이사장)은 "우리 능력을 한참 벗어날 정도로 많은 관객이 온 것이었다"고 말했다.

첫 회라 시행착오도 많았고, 곳곳에서 잡음이 생겨났다. 예상을 크게 넘은 관객을 감당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돼 있었기 때문이다. 티켓 발권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등의 크고 작은 소동들이 잇따랐다. 하지만 20만에 가까운 관객은 1회 영화제의 모든 단점을 덮기에 충분했다.

외국에서 온 영화관계자들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거리와 극장 안을 메운 관객들이 대부분 20~30대 청년들이라는 것에 탄성을 내질렀다. 전 세계 어떤 영화제보다 젊고 역동적인 영화제. 1회 부산영화제가 새긴 이미지였다.

젊고 역동적인 영화제
 
 1회 부산영화제 당시 남포동 피프광장(비프광장)
ⓒ 부산영화제
 
1회 부산영화제가 이른바 대박 흥행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시대적 분위기와 사회적 정서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1960년~1970년대 태어난, 당시 영화제 주축이었던 20~30대들은 어릴 때부터 영상문화를 접한 세대였다. TV가 보급되던 시기에 성장기를 보냈고, 극장도 많이 오가면서 이전 세대보다 영상문화에 친숙했다.

1985년 대학 영화운동이 주도한 학내 영화제들이 높은 관심 속에 흥행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바탕이 작용한 것이었다. 1990년대 들어 영상문화에 대한 중요성이 높아지면서 영화를 공부하는 학생도 많이 늘어나고 있었다. 한겨레신문(1993년 6월 9일 자)은 "미국 LA 근처 영화학교와 프랑스 파리에는 해마다 영화를 배우려는 한국 학생들이 수십 명씩 모여들고 있다"고 전했다.

이언경(작고. 감독)의 '영화공간1895'로 시작해 손주연(프로듀서)의 '씨앙씨에', 최정운(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 대표)의 '문화학교 서울', 김희진(감독)과 양정화(프로듀서)가 이끈 '부산씨네마테크 1/24' 등은 영화에 관심 있는 청년들이 허전함을 채울 수 있던 소중한 공간들이었다.

당시 청년세대였던 1960년대~1970년대 생들은 여러 번 복사돼 화질이 흐린 비디오를 보며 영화를 공부할 만큼 열정이 뜨거웠다. 부산영화제 주축인 이용관 전양준 김지석 등은 이들에게 다양한 강의와 강좌를 통해 영화에 대한 전문지식을 전달해 준 대표적인 영화학자들이었다.

부산영화제는 영상문화세대에게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기회였다. 상업영화가 할리우드로 치우친 현실에서 쉽게 보기 힘든 해외 명작들을 스크린에서 본다는 것 자체가 특별했다. 더구나 해방 이후 일본영화가 금지돼 있었기에, 자유롭게 볼 수 있는 유일한 예외공간이었다.

1980년대 군사독재 시절 <오! 꿈의 나라>, <파업전야>, <닫힌 교문을 열며>, <어머니, 당신의 아들> 등 민중영화가 온갖 탄압 속에서도 꿋꿋하게 흥행을 한 것에도 이들 영상문화세대의 높은 관심이 작용한 덕분이었다.

다들 한국에서의 첫 영화제가 궁금했고, 부산영화제라는 장이 마련되자 너도나도 몰려든 것이었다. 남포동이란 부산영화제 공간이 관객으로 폭발한 것은 필연적이었다.

1995년 창간된 영화 전문지 <씨네21>의 성공은 당시 영상문화를 향한 관심을 잘 포착해 낸 결과였다. 주간지라고 하면 <선데이서울>로 대표되는, 연예인들의 신변잡기와 야사가 중심인 선정적 저널리즘이 일반적이던 때였다. 영화주간지 존재가 낯설었을 때 <씨네21>의 창간과 이후 성장은 그만큼 영상문화에 대한 대중의 관심 척도를 보여준 것이었다.

같은 시기 창간된 월간지 <키노> 역시 마찬가지였다. 프랑스문화원을 다니던 문화원 세대 정성일(평론가)이 편집장이었던 <키노>는 전문적인 비평으로 영화 잡지의 명성을 떨치며 영화마니아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게 된다. 구로사와 아키라, 미야자키 하야오, 왕가위 감독 등을 소개했고, 유럽 예술영화들에 보석 같은 글이 지면을 가득 채웠다. '영화언어'가 주도했던 깊이 있는 비평과 담론이 대중 속으로 한 발짝 더 들어간 것이었다.

당시 영화 전문지들은 앞다퉈 해외 영화제를 소개했다. 덕분에 우리에게도 영화제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커졌다. 기사나 화보로 접하던 국제영화제가 눈 앞에 펼쳐지는 순간, 영상세대들이 반응한 것이다. 삭제가 없는 원본 그대로의 영화, 거리에서 마주칠 수 있는 유명 감독과 배우 등등 영화제가 주는 매력이 상당했다. 부산영화제의 출발은 한국영화 관객들에게 새로운 영화세상이 도래한 것과마찬가지였다.

강의실에서 보던 영화를 스크린에서
 
 1회 부산영화제 상영작 김태일 감독 <어머니의 보랏빛 수건>
ⓒ 김태일(푸른영상)
 
1회 부산영화제 상영작의 면면은 한국 영화운동의 성장과 발전을 확인해주고 있었다. 적극적으로 영화운동에 참여했던 신인 감독들의 등장이 두드러졌다.

1985년 한국외국어대 칸영화제를 개최한 주역으로 한국영화아카데미 6기 장기철(감독)은 <홈리스>를 완성해 월드 프리미어로 내놓는다. 제작에 들어간 지 6년 만의 완성이었다.

화교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홈리스>는 1992년 6월 이용관, 전양준, 이효인, 박광수, 신철 문성근 김명곤 등이 신인발굴을 위해 조직한 독립영화창작후원회 지원작품이었다. 서울영화집단의 <파랑새>를 시작으로 장산곶매 <파업전야> 등 재야 민중영화들이 군사독재의 규제와 탄압의 대상이었던 것을 이겨내고자 충무로에서 활동하고 있던 진보적 영화인들이 후견인으로 나서 지원한 영화였다.

장기철과 함께 한국외대 '울림' 창립을 주도했고, 한국영화아카데미 4기인 김태균은 <박봉곤 가출사건>을 통해 감독으로서 부산영화제에 등장한다. 1989년 독립프로덕션 '영화공장 서울'을 만들어 제작과 기획 쪽에서 활동하다가 다소 늦게 첫 작품을 내놓은 것이었다.

김태균의 '영화공장 서울'에서 한국 독립영화를 보고 미국에 소개했던 뉴욕현대미술관(NoMA)의 영화담당 큐레이터 래리 카디쉬는 1회 부산영화제 한국영화공로상 수상자였다.

한국영화조감독협의회 대표로 충무로 개혁을 선도했던 한국영화아카데미 1기 임종재 <그들만의 세상>, 서울대 얄라셩 김홍준 <정글 스토리>, 서울대 문화패 출신 장선우의 <꽃잎>, 5월 광주영화 <부활의 노래>를 만들었던 이정국 <채널 69> 등이 영화운동 감독들의 작품이었다.

노동운동과 양심수 어머니들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해고자>와 <어머니의 보랏빛 수건>은 재야 영화운동의 성과물이었다. 다큐멘터리 영화를 극장 스크린에서 볼 수 있다는 것도 당시에는 특별했다.

1991년 <어머니, 당신의 아들> 상영 투쟁에서 보듯, 민중의 삶과 노동자들의 투쟁 등을 담은 영화들은 극장 상영을 꿈꾸기 어려웠다. 변영주(감독)의 1995년 <낮은 목소리 -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이 극장에서 개봉했으나, 다큐멘터리의 첫 개봉으로 화제였을 만큼 극장의 문턱은 높았다.

재야 영화운동단체에서 만든 독립영화는 주로 대학가 강의실이나 노동현장 등에서 비디오를 통해 볼 수 있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1990년대 초반 <파업전야>의 경우 흰색 천을 걸어 놓고 16mm 영사기로 상영했다.

대학에서 제작된 단편 영화들도 비슷했다. 대부분이 대중과 만날 기회가 극히 제한적이었던 영화들인데, 영화제라는 울타리를 통해 접촉면이 넓어진 것이었다. 노동운동 다큐멘터리 상영이 신선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영화제라는 영화의 해방구를 통해 대중과 거리가 좁혀졌고, 영화운동의 확장에 있어 영화제의 역할을 보여준 사례였다.

당시 대학생으로 1회 부산영화제에 초청받았던 박성호(부산영화제 프로그래머)는 "단편영화 < K씨의 자극적인 하루 > 촬영을 맡은 덕분에 게스트로 참여했다"며 "당시 대학 1학년으로 3학년 선배가 만든 영화를 도왔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를 계기로 시간이 흘러 부산영화제에 공채로 들어가게 됐다"고 덧붙였다.

부산영화제에서 주목받은 영화들
 
 1회 부산영화제 <세친구> 임순례 감독
ⓒ 부산영화제
 
첫 회 부산영화제에서 특별하게 주목받은 한국영화는 임순례 감독 <세친구>, 홍상수 감독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김응수 감독의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 등 3편이었다.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는 1980년대 학생운동에 대한 후일담이었다. 서울대 총학생회 홍보부장이었고, 영화제작소 청년에서 이상인과 함께 <어머니, 당신의 아들> 시나리오를 썼던 김응수 감독의 삶이 투영된 작품이었다. 1991년 러시아 국립영화대학에 유학해 영화를 공부했기에, 모스크바를 배경으로 운동권 동기들의 추억을 그려낸 것이다. 이전 민중영화들이 전투적인 투쟁을 전면에 내세웠다면,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는 다른 색깔로 미학적인 측면을 강화한 독립영화였다.

1988년 남북청년학생회담을 제안해 통일운동을 선도했던 김중기(배우)가 출연한 첫 영화였다. 후반작업비가 중간에 바닥났을 때는 안동규(제작자. 영화세상 대표)가 급히 도움을 줘서 완성될 수 있었다. 개봉할 때는 민족영화연구소에서 함께 활동했던 김준종(프로듀서. 전 평창국제평화영화제 사무국장)이 도왔다. 김준종은 "김응수가 대학 동기여서 도운 것이었다"고 말했다. 1980년대 학생운동과 대학영화운동의 주역들이 함께 힘을 모은 것이다.

부산영화제 첫 상영 후 이용관이 사회를 맡았던 GV(관객과의 대화)에서 "지금까지 본 영화 중 최고"라는 관객의 찬사를 받기도 했고, 상영 때마다 감독과 관객들과의 대화가 가장 활발하고 뜨겁게 진행됐다.

임순례의 <세친구> 역시 화제를 물고 다녔다. 1994년 단편 <우중산책>으로 서울단편영화제 우수상을 받아 이름을 알린 임순례의 첫 장편 <세친구>는 청소년 관객들로부터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사회에서 낙오된 청년들이 군입대 문제로 평온한 삶에 파문을 일으키는 모습을 담았다. 

임순례는 한국여성영화인모임이 기획한 책 <영화하는 여자들>에서 "한국사회가 대단히 폭력적이라는 말을 절감하게 됐다"며 "폭력성이 어디서 오는지 생각해 보니 학교와 군대였고, 사회폭력의 뿌리라는 생각으로 시나리오를 쓴 것이었다"고 말했다.

또한 "당시 <우중산책> 수상 이후 첫 장편을 같이하자는 제안이 여럿 와서 <세친구> 시나리오를 썼으나 모두 안 하겠다고 한 영화"라며, "결국 서울단편영화제를 기획한 삼성영상사업단 김은영(프로듀서. 추계예대 교수)을 찾아가 1회 수상자가 잘돼야 서울단편영화제도 잘 될 수 있다고 설득해 제작비를 지원받았다"고 밝혔다.

<세친구>는 1회 부산영화제 운파상을 수상하며 감독 임순례의 존재감을 알렸고, 부산영화제 측에서도 역량 있는 젊은 감독을 발견해 냈다는 점에서 큰 수확이었다.

새로운 감독 홍상수

홍상수의 첫 작품인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영화제의 긍정적 역할을 보여준 사례였다. 부산영화제 개막 전인 1996년 5월 개봉했으나 관객의 관심을 끌지 못했는데, 부산영화제를 통해 해외 영화관계자들에게 소개되면서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한겨레신문(1996년 9월 21일 자)에 따르면 영국 평론가 토니 레인즈는 "독창적이고 도전적이며 새로운 영화"라고 평했고, 베를린영화제 영포럼 프로그래머 도로테 베어도 "한국에 대해 잘 모르지만 한국 대도시의 고독과 대화의 단절을 인상적으로 전하는 작품"으로 평가했다. 또한 뉴욕 현대미술관 래리 카디시와 칸영화제 아시아영화 선정위원 피에르 르시엥도 새롭게 찾아낸 감독이 홍상수라는 데 의기투합했다.
 
 로테르담영화제에 참석한 홍상수 감독(왼쪽), 김동호 집행위원장, 임안자 평론가. 박광수 감독
ⓒ 한국영상자료원 소장 자료(임안자)
 
부산영화제를 발판으로 홍상수(감독)의 이름은 국제적으로도 알려지기 시작한다. 홍상수는 실력으로 촉망받는 젊은 감독이면서 배경도 든든했다. 홍상수의 부친은 대한연합영화사와 답십리촬영소를 만들었던 한국영화의 실력자 홍의선이었다. 모친은 1960년대 <주간영화>를 발행하고 답십리촬영소장을 맡았던 전옥숙으로 대한연합영화사에서 <추풍령> <나운규의 일생> <휴일> 등을 제작한 한국영화의 첫 여성 제작자였다. 임권택 감독의 초기작 <청사초롱>(1967)를 제작하기도 했다.

홍상수의 가족사는 꽤 흥미로운 요소들이 많다. 특히 부친인 홍의선 대표보다 모친인 전옥숙 여사의 주목도가 높았다. 당대 한국 사회 주요 인사들이 인맥을 형성하고 있었고, 김영삼 전 대통령이 야당 당수를 맡고 있던 때 전화로 불러냈을 정도로 사교계의 여왕으로 평가받았다.

남재희(언론인, 전 국회의원)는 2013년 '프레시안'에 연재한 회고글에서 전옥숙에 대해 "경상남도 통영 출신인 전 회장은 대단한 미모로, 가냘픈 몸매, 약간 긴 얼굴, 오뚝한 코, 절세의 미인까지는 아니더라도 당대의 미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고 소개했다. 정계, 재계, 관계, 문화계 등 인맥이 상당히 폭넓었다고 한다.

2017년 부산영화제 회고전의 주인공이었던 배우 신성일은 기자간담회에서 출연 작품인 <휴일>을 아끼는 작품으로 꼽으며 고 홍의선, 전옥숙에 대해 언급했다.

특히 "홍상수의 어머니를 얘기하자면 김지하도 그 어머니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이념적으로 강한 학생이었다. 전옥숙 여사는 이화여고에 다닐 때 '빨갱이' 공산주의 학생으로 으뜸이었다"고 말했다. 또한 "전옥숙 여사가 정치범으로 사형을 앞두고 있을 때 교도소장이었던 홍의선씨를 만나 결혼에 이르게 됐다"고 밝히기도 했다.

일반적으로는 알려진 내용은 한국전쟁 당시 이화여대 국문과에 다녔던 전옥숙이 서울 수복 후 북한군에 쓸려서 의정부 쪽으로 후퇴하다 국군에 투항했고, 헌병대장의 배려 덕분에 화를 입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전옥숙의 이야기는 이병주의 소설 '남로당'에 김옥숙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김지미 배우는 "전옥숙은 이화여대 다니던 우리 언니의 친구였다"고 말했다.

정진우 감독은 "홍의선씨가 돌아가기 전 병원에 입원했을 때 병문안을 갔더니, 전옥숙을 만나게 된 과정을 자세히 이야기해 줬다"면서 이렇게 전했다.

"홍의선 말로는 한국전쟁 전후로 전옥숙이 이화여대 좌익학생 조직의 핵심이었다고 한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적극적으로 활동하다가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이 수복되면서 도망치던 과정에서 국군에 잡힌 것이었다. 전쟁 중이라 북한 협력자들을 재판 없이 사형시키던 때였다.

수색으로 끌려왔는데 사형은 헌병대가 집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미모가 상당히 빼어났던 탓에 다른 사람들은 사형당할 때 헌병 장교였던 홍의선이 사형에서 제외한 후 빼돌렸다고 한다. 이때부터 같이 살게 됐는데, 당시 홍의선은 약혼자가 있었으나 파혼하고 전옥숙과 결혼한 것이다. 원래 약혼자는 유현목 감독의 처형이었다."

정진우 감독은 "홍의선이 당시 이야기를 해주면서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전옥숙이 자주 안 온다고 서운한 감정을 나타냈다"고 전했다.

GV의 출발

1회 부산영화제는 한국영화에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낸 시간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영화와 관객의 거리를 좁힌 GV(감독과의 대화 또는 관객과의 대화)였다. GV는 영화상영이 끝난 후 감독이나 배우가 나와 영화에 대한 질문을 주고받는 시간이었는데, 당시에는 관객과의 대화 외에 감독이나 배우가 영화상영 전후 인사를 하는 것도 포함돼 있었다.

박성호(부산영화제 프로그래머)에 따르면 1995년 일본 야마가타영화제에서 GV를 본 홍효숙(전 부산영화제 프로그래머)이 영화제를 준비하면서 도입했다고 한다. 2000년대 이후 일반화된 GV 문화의 첫 출발이 부산영화제였다.

영화제에 등장한 GV 매력은 돋보였다. 당시는 영화를 본 후 감독과 배우가 나와서 관객들과 대화를 나눈다는 것 자체가 생소했다. 영화를 보고 덤으로 감독이나 배우를 볼 수 있다는 건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영화제 흥행의 요인이기도 했다.
 
 1회 부산국제영화제 <그들만의 세상> GV. 왼쪽부터 임종재 감독, 정선경 배우, 이용관 한국영화 프로그래머
ⓒ 부산영화제
 
GV가 가장 많이 열렸던 것은 해외작품보다는 감독과 배우의 참석이 당연했던 한국영화였다. 그러다 보니 GV 문화를 선도한 것은 당시 한국영화 프로그래머 이용관이었다. 이전부터 영화강좌를 많이 진행했던 경험이 있다 보니 부드럽게 감독과 관객의 대화를 이끌었다. 이용관은 "당시 정확히 뭘 해야 하는지도 몰랐는데, 박광수 부집행위원장이 시키는 대로 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부산영화제에서 시작된 GV의 표준 모델이었다.

1회 영화제 상영작인 임순례 감독 <세친구>는 GV가 시작된 첫 영화였다. 매진으로 좌석이 가득한 가운데 관객들은 영화에 공감을 표했고, 감독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임순례 감독은 "가정과 학교 군대 등 우리 사회 전체에 만연된 폭력과 경직된 가치관에 주목했다"며 "가정환경이나 사회조건이 낙오자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중고등학생들이 많이 봤으면 한다"는 바람을 나타내기도 했다.

김응수 감독의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는 GV 열기를 보여준 대표적 작품이었다. 다음 작품의 상영시간이 다가오는데도 질문이 이어지자 이용관은 관객들에게 밖으로 나가서 더 이야기를 나누자고 제안한다. 결국 남포동 야외무대 앞에서 감독과 배우를 붙들고 GV는 1시간 정도 계속된다. 영화제를 찾은 관객들의 열정을 보여준 단면이었다.

생전 김지석(작고. 부산영화제 부집행위원장)은 "부산영화제의 자랑"이라며 GV에 자부심을 나타냈다. "전 세계 영화제 중 이렇게 GV가 많은 영화제는 찾기 힘들고, '영화, 영화인, 관객과의 만남'은 부산영화제의 가장 중요한 지향점 중 하나"라고 강조했다.

GV는 부산영화제를 찾은 한국 관객들의 수준을 확인할 수 있게 해준 시간이기도 했다. 해외 영화인들은 일반적으로 영화제에서 나오는 질문들이라는게 제작비가 얼마냐, 배우를 어떻게 캐스팅했냐는 등의 가십성 질문을 하는데, 한국영화관객들은 작품에 담긴 깊은 의미와 미장센이 어떻고 등등 전문적인 질문을 한다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질문 수준이 달랐기 때문이다.

또한 이른 아침 상영을 찾는 관객의 열정에 놀라움을 나타내기도 했다. 1997년 2회 영화제 때 상영작인 <일요일>은 상영시간이 일요일 아침이었다. 선댄스영화제 대상 수상작이라 좌석수가 가장 많은 부산극장 1관에서 상영됐으나 매진이었다.

예정된 GV는 상영 전 간단한 무대인사였다. 감독이 참석하지 못해 여성 프로듀서가 대신 나와 관객들에게 인사했는데, 좌석을 가득 채운 관객들의 모습에 흐뭇한 표정이 역력했다. 고맙다는 인사를 마친 프로듀서는 그냥 무대를 내려가기 아쉬웠던지 "감독이 오지 못해 이런 모습을 함께 못 보는 게 너무 안타깝다. 사진 한 장만 찍겠다"고 요청했다.

많은 관객이 큰 극장을 가득 채운 것을 감독에게 보여주겠다는 것이었다. 관객들은 박수로 화답했고, 프로듀서는 희색이 만연한 채 관객들의 모습을 담았다. 짧은 GV였으나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검열의 위협

파도처럼 밀려든 관객들로 인해 1회 부산영화제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내며 대성공을 거둔다. 안팎이 호평이 이어졌다. 칸영화제 아시아영화 선정위원인 피에르 르시엥은 "어떤 지역 국가든 정부와 영화산업에 종사하는 사람 모두 할리우드 제국주의에 대항할 의무가 있고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문화는 모방하면 전망이 없다. 자신들의 정체성으로 작품을 만들어 경쟁력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미국영화 직배문제로 미 제국주의의 문화침략에 맞섰던 한국 영화운동에 주는 격려였다.

김홍준(감독)은 "아카데미영화제처럼 화려하게 차려입은 스타들이 나와 자기들이 상을 받는 게 영화제라는 우리 사회의 잘못된 인식을 바로 잡을 좋은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며 첫 발을 뗀 국제영화제에 대한 기대를 나타냈다.

크고 작은 실수에도 불구하고, 한껏 고무될 정도의 칭찬을 받은 것이었지만 검열에 대한 우려는 가시지 않았다. <크래쉬> 삭제 소동은 우발적인 일로 넘어갔으나 위험 요소기도 했다. 당시 삭제된 부분은 영화 속 교통사고를 당한 직후 나오는 정사장면이었다. 영화 수입사가 원본필름 대신 삭제된 필름을 영화제에 제공한 실수였으나, 경직된 한국의 검열 분위기를 엿보게 해주는 사례였다.

1990년 중반 서울에서 국제영화제 논의가 한창일 때 전양준이 지적했듯 검열이 있는 나라에서 영화제를 제대로 치르기는 힘들기 때문이었다. 검열의 위협은 영화제의 가치를 언제든 땅에 떨어뜨릴 수 있었다.

부산영화제가 비슷한 시기 시작된 상하이영화제를 비롯해 중국의 영화제들을 경쟁상대로 생각하지 않는 것은, 검열 문제에 있다. 이용관은 "영화제는 영화의 해방구로 모든 영화가 제한없이 상영될 수 있어야 하는데, 중국의 영화제는 검열 때문에 부산영화제를 절대 따라올 수 없다"고 말했다. 아무리 많은 예산으로 물량 공세를 퍼붓는다고 해도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검열은 영화제의 한계만을 드러낼 뿐인 것이다.
 
 2회 부산영화제 독립영화인들의 검열 철폐 시위
ⓒ 부산영화제
 
역대 부산영화제에서 초반에 열린 1~2회가 중요하게 평가되는 이유는 검열 문제에 있었다. 국제영화제 틀을 만들어 가던 시기였기에 부산의 선택은 이후 생겨난 다른 영화제들에게 선례가 됐기 때문이다.

당시 김동호 집행위원장이 공연윤리위원회(공륜) 위원장에 재임할 당시에는 변화를 위해 애쓰는 노력을 보이기도 했으나, 사퇴 이후 공륜은 다시 엄격해졌고 검열기관으로 가위질은 계속됐다.

1996년 영화법이 폐지되고 대체된 영화진흥법은 제12조에서 '단편영화, 소형영화 및 영화제에서 상영되는 영화로서 대통령령이 정하는 영화'는 심의를 받지 않아도 되는 예외로 규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영화진흥법 시행령 제13조는 '심의신청의 예외 기준으로 '3개국 이상이 참가하여 3회 이상 개최하여 온 영화제에서 상영하는 경우는 심의를 받지 않는다'고 명시했다.

따라서 1~2회는 검열을 피할 길이 마땅치 않았다. 당시 김영삼 정권이 문민정부를 내세웠음에도 검열을 끊어 내지 못한 것은 군사독재세력과 야합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던 태생적인 한계이기도 했다. 

그나마 부산영화제가 짜낸 묘수는 교란작전이었다. 검열담당자였던 심의위원을 부산으로 오게 해서 숙소에 출품작들을 산더미처럼 쌓아서 기를 죽이는 것이었다. 관련 업무에 대한 협의를 서류로 주고받거나 술자리를 만들어 검열을 방해하는 것도 방법의 하나였다.

김동호(강릉영화제 이사장)는 국민일보에 연재한 <김동호의 씨네마 부산-PIFF 15년의 기록>에서 "예기치 못했던 난관으로 영화제에서 검열은 치명적이고, 부산영화제의 경우 출범과 동시에 좌초, 파선하는 것과 같았기에 공륜 심의위원들이 부산에 내려와 심의해 줄 것을 요청했다"고 밝혔다.

이어 "모든 심의 결과는 공문으로 받도록 했다"면서 "심의 과정과 그 결과를 통보받는 시기를 최대한 늦추면서 검열의 예봉을 피해 나간 것이었다"고 덧붙였다. 심의 결과를 공문으로 주고받으면 2~3일 정도의 시간이 걸리고, 그사이 영화상영은 진행된 상태라 심의 결과가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당시 사무국장이었던 오석근(전 영진위원장)은 "심의위원들이 보고자 하는 것은 성기·음모 노출과 과도한 정사 장면이었고, 나머진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 "그분들이 내려올 때 대충 확인해야 할 작품에 대한 리스트가 만들어져 있었고, 우리도 그분들이 뭘 확인하려는지 알고 있었기에 옆에 앉아 시선을 돌리게 하거나 이해시키는 일을 했다"고 회상했다.

국회의원과 멱살잡이

1회 영화제 성공 이후 닥쳐온 정치적인 문제는 국제영화제로서 통과할 관문과도 같았다. 2회 영화제가 열린 1997년은 5년마다 치러지는 대통령선거가 있던 해였다. 1회 때 젊은 관객들이 몰리면서 주목을 받게 된 국내 최초 영화제를 당시 대통령 후보들은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그나마 1회 개막식 때 어떤 내빈도 별도의 축사나 인사말을 못 하게 한 것은 좋은 선례였다. 크고 작은 행사 때마다 정치인들이나 관료들이 나서 전하는 축사나 인사말 등은 사실 앞에서 말하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관객에게 '지루한 순서'였다. 처음 막을 올렸던 1회 때도 김영삼 대통령의 영상 축하 메시지를 제외하고는 정치인인 부산시장조차 개막선언 외에는 별도의 인사말을 하지 않도록 제한을 둔 것은 현명했다. 깔끔한 개막식을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부산영화제가 다른 행사들과 비교해 지극히 예외적인 모습을 만들어낸 것이었지, 여전히 다른 행사에서는 '지루한 순서가 당연하게 인식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초기 부산영화제의 예외적인 모습은 정치인들에게 불만의 대상이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영화제는 정치적 중립성이 아닌 정치적 독립성이 강조된다는 점이다. 정치적인 '중립'을 유지한다는 것 자체가 매섭게 비판할 수 있는 표현의 자유를 무디게 할 수 있기에, 영화제에 정치적 중립은 알맞지 않다. 보편적인 인권과 약자들에 대한 연대 등 다양한 시선을 갖는 것이 영화이고, 자본과 권력에 대한 비판적 시선은 독립영화의 특징이다. 이런 영화들이 모인 영화제는 기본적으로 정치적 문제에서 철저한 독립성 보장이 중요하다.

지난 2014년 시작된 '부산영화제 사태'를 보더라도 세월호 참사 다큐멘터리 영화상영을 마치 정치적 중립을 위반으로 몰고 갔던 박근혜 정권의 편향적 행태는, 표현의 자유를 가로막던 박정희 군사독재의 재현이었다.

군사독재 시절의 언어로 부산영화제에 찍어 누르려 한 것으로, 영화제가 갖는 정치적 독립성을 이해하지 못한 무지의 소산이었다. 부산영화제 바탕에 영화운동이 있고, 영화운동은 반제 반독재 투쟁을 기조로 했던 변혁운동을 중심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것이었다.
 
 대선 후보였던 1997년 2회 부산영화제 개막식을 찾은 김대중 전 대통령
ⓒ 부산영화제
 
2회 부산국제영화제는 정치적 독립성의 기조를 선명하게 각인한 계기였다. 여야 대선후보들과 부산영화제의 크고 작은 마찰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당시 개막식에 참석한 것은 김대중 후보였다. 문화예술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개막식 참석으로 드러내 보인 것이었다. 일반적인 행사 같으면 후보자가 단상에 올라 인사말이라도 하는 기회를 주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부산영화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사전에 인사말이나 별도의 소개 기회를 주지 않겠다는 뜻을 전했고, 개막식에 들어올 때만 입장한다고 소개했을 뿐이었다. 정치인들의 배려가 관례가 되면 쉽게 끊어 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당시 사무국장이었던 오석근은 "당시 부산영화제가 사전에 정리한 입장은 후보 소개 및 의전을 최소화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개막식의 마지막 순서인 개막작 감독 배우가 소개가 진행되자 수행 인사들의 불만이 터져 나왔다. 당시 김한길 의원 등은 "후보가 인사할 기회는 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김동호 집행위원장에게 항의했다, 그러나 부산영화제 측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냐"면서 일축했다.

개막작이 시작되자 김대중 후보 일행은 기분 나빠하며 개막작 관람도 하지 않은 채 우르르 퇴장했다. 이 과정에서 배우 출신 정한용 의원과 이용관 한국영화 프로그래머가 정면충돌했다. 정한용 의원의 항의를 이용관이 가로막자 감정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당시 정한용은 이용관을 향해 "넌 뭐야 자식아!" 하면서 불쾌감을 나타냈다. 이용관도 지지하지 않았다. 똑같이 "너는 뭔데?" 하면서 맞받았다. 정한용이 순간 멱살을 잡자 이용관도 맞잡았다. 일촉즉발의 순간, 주변에서 말리고 김대중 후보가 떠나면서 진정됐다. 정치인 홍보 무대로 변색할 뻔했던 상황은 막아낸 것이었다. 이용관은 "이후 멱살 잡은 게 인연이 돼 정한용과 상당히 친해졌다"고 말했다

개막식 멱살잡이는 이용관의 기질을 보여준 것이었다. 부산영화제가 성장하면서 이용관은 해외에 조폭 같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용관은 "해외 영화제를 가면 전양준과 김지석이 유명 감독과 제작자 등에게 '우리 형'이라고 인사시켰다. 그럴 때면 당신이 그 조폭 같다는 형이냐는 반응이 나왔다"고 말했다. 부산씨네클럽에서 활동했던 방추성(부산 영화의 전당 대표)은 "잘못된 일을 보면 그냥 넘기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 나가는 것이 이용관의 스타일이다"라고 말했다.

저지당한 이회창
 
 2회 부산영화제를 찾은 이회창 대선 후보
ⓒ 부산영화제
 
김대중 후보가 첫 번째 파고였다면 두 번째는 당시 여당 후보 이회창이었다. 2회 영화제의 첫 주말이었던 10월 12일 일요일 오후 야외무대 행사가 진행되고 있던 남포동에 대선 후보 이회창이 국회의원 등 수행원을 잔뜩 이끌고 나타난 것이다.

당시 남포동은 야외무대 행사를 보기 위해 몰려든 인파로 가득했다. 남포동 부영극장 앞 피프광장(현 비프광장)에 등장한 이회창은 수많은 인파를 헤치며 앞으로 가기 시작했다. 운신하기도 힘든 상황에서 밀고 들어오는 이회창과 수행원들은 혼란을 유발하고 있었다. 일부 관객들은 야유를 보내기도 했다.

당시 야외무대에서는 이용관의 사회로 배우 김민종과 강수연의 무대인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용관은 "이회창 후보가 무대로 위로 올라오겠다는 말을 듣는 순간 마이크를 잡고 있던 손이 부르르 떨렸다"고 말했다. 이어 "올라오면 마이크를 넘겨줄 수밖에 없었지만, 무대에 올라오는 순간 표가 떨어질 것을 각오하라는 메시지를 전했다"며 "오석근 사무국장이 완강히 저지하자 어쩔 수 없이 물러났다"고 당시 상황을 기억했다.

이회창을 막아낸 것은 오석근의 육탄저지였다. 당시 남포동 야외무대 행사 진행을 지켜보고 있었던 오석근은 "이회창 후보가 방문할 거라는 소식은 사전에 듣지 못한 상태였다"며 "상당히 많은 인파가 모여 있었는데 이회창 후보 일행이 인파 사이를 뚫고 무대로 다가왔고, 문정수 부산시장도 함께 있었다"고 설명했다.

오석근은 무대를 막 올라오려는 이회창을 가로막고는 "부산에서 어렵게 시작한 문화행사다. 여기 많은 내외신 기자들이 보고 있다. 지금 무대로 올라오시면 어렵게 시작한 문화행사가 왜곡되어 진다. 다시 한번 생각해 달라"며 정중하면서도 완곡하게 거부 입장을 전달했다.

순순히 안내해주는 것이 아닌 단호한 거부에 이회창은 오석근을 향해 "자네 말이 맞어"하고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거부 의사를 무시하고 무대로 올라가는 것에 부담이 느껴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후로 부산영화제에서 정치인 누구도 별도의 인사말을 하지 못하는 게 굳어졌다.

당시 문정수 부산시장은 그날 저녁 이회창 후보를 환영하는 만찬장에서 "당신은 어느 당 시장이냐? 우리 당 대선 후보가 무대 한번 올라가려는데 그거 하나 못만드냐? 며 심하게 공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다음 선거에서 시장 재공천을 못 받는 이유 중 중요한 이유가 됐다. 후일 문정수 시장은 오석근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시에 내가 올라가자고 할 수 있었는데, 나 역시 정치적으로 왜곡될 거 같아 가만히 있었다."

검열의 악령

정치인과의 충돌로 시작된 2회 부산영화제는 역대영화제와 비교할 때 매우 역동적이었다. 세계적 영화제로 성장을 위한 통과의례를 거친 셈인데, 부산영화제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확립했다는 점에서 가장 중요했던 영화제로 꼽힌다.

정치인들 예우 문제가 어느 정도 가닥이 잡힌 사이, 이번에는 독립영화인들이 들고 일어났다. 끝내 피하지 못한 검열의 후폭풍이었다. 공륜이 아무리 심의라고 우겨도 엄연한 검열이었다. 비록 부산영화제가 검열의 칼날을 무디게 하는 여러 노력을 기울이며, 심의를 형식적으로 만들었다고는 해도 독립영화가 이를 용인하기는 어려웠다.

독립영화인들은 반발했고, 항의의 뜻으로 직접 행동에 나선다. 영화제로 북적이는 남포동에서 검열철폐의 목소리를 높이며 시위를 벌인 것이었다. 당시 독립영화인들의 시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단 1회와 2회 영화제가 열린 1996년~1997년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김동원 감독
ⓒ 한국영상자료원 소장 자료
 
1회 부산영화제 개막을 몇 달 앞둔 1996년 6월 14일 오전 다큐멘터리의 고전 <상계동 올림픽>(1988)을 연출한 김동원(감독)의 푸른영상에 경찰이 들이닥쳐 압수수색 명목으로 15개 작품 1천여 개의 비디오테이프를 가져간다. 연행한 김동원에게는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당시 경찰이 적용한 혐의는 당시 '음반 및 비디오물에 관한 법률'(음비법) 위반이었다. 1995년 개정돼 1996년 6월 7일부터 시행된 개정된 음비법은 '문체부에 등록하지 않은 업자가 한국공연윤리위원회의 심의를 받지 않고 비디오를 제작·복제·보급할 수 없다'고 규정했고, '위반 시에는 3년 이하의 징역과 2천만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할 수 있게 했다. 기존 법의 2년 이하 징역과 1천만 원 이하 벌금을 강화한 것이다.

애초 목적은 음란 비디오의 확산을 막아 청소년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으나, 실제로는 비디오 영화운동 비판 정신을 봉쇄하기 위해 정치적 악용 성격이 더 컸다. 비디오가 대중화됐던 시기, 김동원의 푸른영상은 <벼랑에 선 도시빈민> <우리는 전사가 아니다>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 등 인권 빈민 노동 여성 환경 등 사회 문제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집중적으로 제작했다. 이를 못마땅해 생각한 권력이 탄압을 가한 것이었다. 개정 음비법이 발효된 직후 바로 경찰이 들이닥친 것은 이를 방증한다고 볼 수 있다.

김동원은 구속영장이 기각되며 다음 날 석방되지만, 독립영화단체들과 시민단체들은 사전심의 폐지를 위해 투쟁의 결의를 다지게 된다. 영화법 폐지와 영화진흥법 제정으로 사라진 것으로 생각했던 독립영화에 대한 검열이 새로운 법을 통해 변칙적인 방법으로 등장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4개월이 지나 1회 부산영화제가 끝난 직후인 1996년 10월, 장산곶매 강헌이 제기한 사전심의조항에 대한 위헌법률심판제청을 헌법재판소가 받아들인다. 검열이 헌법에 위반된다는 것으로, 줄곧 탄압받던 영화운동의 반격이 성공한 것이었다.

하지만 국가보안법과 마찬가지로 박물관의 유물이 돼야 할 검열의 악령은 여전히 창작의 자유를 위협하고 있었다. 검열 논란이 크게 불거진 것은 1997년 4월 18일~22일까지 열린 2회 서울다큐멘터리영상제였다. 1회 Q채널다큐멘터리영상제에서 이름을 바꾼 서울다큐멘터리영상제는 당시 삼성영상사업단의 다큐멘터리 전문채널인 Q채널에서 주관했다.

논란의 출발은 천안문 사태를 다룬 <태평천국의 난>이었다. 개막작으로 선정됐으나 영화상영이 취소된 것이다. 영화제를 주관했던 삼성 측은 배급권과 관련해서 발생한 문제라고 얼버무렸으나 중국에서 진행 중인 사업을 고려해 중국 정부의 압박을 받아들인 결과였다.

감독 겸 제작자인 리차드 고든, 카마 힌튼은 성명서를 통해 "영화제는 전 세계적으로 지배적인 해석에 도전하며 강력한 기득권을 위협하는 독립영화를 관객들이 감상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공간으로 영화제가 외부의 압력에 의해 자기검열을 하게 되면 관객들도 변화의 기회를 박탈당하는 것이다"라고 유감을 표명했다.

또한 "<태평천국의 문>이 곧 중국의 정치적 통제를 받게 될 홍콩에서 매일 밤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 앞에서 상영되는 상황에서, 독립된 주권국가인 한국에서 외부의 정치적 이해가 그토록 강력하게 작용할 수 있는 사실이 놀랍다"고 비판했다.

개막작 취소 파문에 프로그램 어드바이저였던 서울대 얄라셩 출신 김명준(노동자뉴스 제작단 대표)이 항의 표시로 사퇴했고,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던 전양준, 이충직, 김동원 3인도 사의를 표명한다.

김명준은 <키노> 1997년 5월호에 기고한 글을 통해 "1997년 4월은 이 땅의 모든 양심적인 영화인들에게 가장 잔인한 봄으로 기억될 것이다. 한때 작은 희망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서울다큐멘터리영상제는 권력과 자본의 가위손에 의해 갈갈이 찢겨졌다"고 한탄했다.

4·3항쟁 다큐멘터리 수난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것이 <레드헌트>의 상영 철회였다. 부산에서 영화운동을 하고 있던 조성봉(감독)의 <레드헌트>는 1948년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양민들이 이승만 정권에게 잔혹하게 학살당한 제주 4.3항쟁을 처음 다룬 역사적인 다큐멘터리였다. 당시 미국과 이승만이 제주에서 자행한 잔혹한 학살의 실태가 세세한 증언으로 공개된 것이었다.

그런데 정치적 성격을 갖고 있던 두 편의 영화가 모두 상영에서 제외되면서 검열 논란이 커졌고, 여기저기서 반발이 터져 나왔다.
  
 <레드헌트> 조성봉 감독
ⓒ 조성봉 제공
 
조성봉(감독)은 "본선 경쟁에 출품됐다는 소식을 듣고 개막일에 맞춰 서울에 올라왔는데,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었다"고 회상했다. 조성봉에 따르면 당시 프로듀서는 "<레드헌트>의 방송 심의가 어렵다. 그래서 난처하다"면서 절충안을 제시했다고 말했다. '이 다큐멘터리는 사실과 다를 수가 있습니다'라는 내용을 넣자는 제안이었다. 자막만 들어가면 어떻게든 심의신청을 넣어보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조성봉은 "이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다큐멘터리가 사실을 기반으로 하는 건데 사실과 다를 수 있다는 말을 넣는다는 것은 작품 전체의 진실성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조성봉은 "차라리 본선 진출작으로 선정하지 않던가, 서울에 올라와서 저렇게 되니 황당했다"면서 "고민 끝에 출품 철회를 결정했다"고 말했다. 당시 담당 프로듀서에게 이런 "다큐멘터리 행사가 필요하고 계속 유지돼야 한다고 보기 때문에, 차라리 내가 출품을 철회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겠다"는 입장을 전한 것이었다.

조성봉이 그렇게 결정하고 돌아오자 당시 민예총 영화위원회 사무국장으로서 대응을 모색하던 낭희섭(독립영화협의회 대표)이 "무슨 돈이라도 받아먹었냐?"면서 발끈했다. 낭희섭은 "당시 조성봉이 어리바리한 결정을 한 것이었다"며 "그렇게 물러나면 안 되는 상황이었기에 화가 많이 난 것이었다"고 말했다.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던 이충직, 전양준, 김동원 3인도 "한국 현대사의 핏빛 나는 슬픔인 제주 4.3 항쟁에 관한 다큐멘터리인 <레드헌트>를 방송 부적합이라는 이유로 상영을 취소해 버린 것은, 기업의 논리만을 생각한 영상제 주최 측이 끝내 도저히 있어서는 안 될 또 하나의 파행적인 행동을 야기한 것이다"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들은 또한 "전세계 어느 곳에도 예심에서 통과한 작품을 주최 측 일방의 판단으로 상영을 취소하는 영화제는 존재하지 않으며 이는 명백한 월권행위로, 관객과 심사위원 모두는 본선 진출작을 보아야 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이를 막는 어떠한 행위도 반영화적 행동임을 우리는 명백히 한다"고 행사 주최자인 삼성에 경고했다.

당시 서울다큐멘터리영상제는 개최를 준비하면서 1996년 검열 위헌 결정에 따른 기대감이 있기도 했다. 노동자뉴스제작단의 <총파업 속보 1호> <총파업 속보 2호> 푸른영상의 <풀을 풀끼리 푸르다>는 독립영화로서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공륜의 검열을 받지 않는 것을 전제로 초청에 응한 상태였다. 그러나 공륜이 영화제 측에 모든 작품의 제출을 요구하면서 국내 초청작 부문 자체가 전부 취소됐다.

엉망진창 수준이 된 서울다큐멘터리영상제는 시상식을 끌으로 막을 내렸으나, 영화운동 진영은 시상식이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끝나게 놔두지 않았다. <스트라이커>로 방송프로덕션 대상 수상자로 선정된 영화제작소 청년 김진상(감독)은 독립영화의 결기를 내지른다.

수상자로 선정돼 단상에 오른 김진상은 "영상제 기간 여러 사람이 갖가지 검열로 피해를 입었다. 3회 행사는 좀더 자유로운 영화제가 되길 바란다"는 말을 남긴 후 상패와 상금을 단상에 내려놓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수상 거부였다. 관객들은 박수로 응원을 보냈다.

조성봉은 "당시 담당 피디가 2000년 이후 CJ엔터테인먼트 대표를 지낸 김주성이었다"며 김주성과 대학 동기였던 지인을 통해 부친이 서북청년단 출신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덧붙였다. 낭희섭은 "1997년 검열 논란 이후 서울다큐멘터리영상제는 몇 년 못가서 막을 내리게 된다"고 말했다. 서울다큐멘터리영상제는 1999년 3회에 이어 2000년 4회를 끝으로 사라진다.

당시 삼성으로 상징되는 자본의 검열은 상업영화에서도 문제가 됐다. 1997년 7월 17일 칸영화제 개막작 <제5원소> 개봉을 위해 한국을 찾은 뤽 베송 감독은 8분이 삭제됐다는 소식에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출국해 불쾌감을 표출했다.

당시 수입사인 삼성영상사업단이 12세 등급을 받아 더 많은 관객을 유치하기 위해 임의로 가위질을 한 것이었다. 뤽 베송 감독 기자회견에서 "검열된 사실을 알고 있냐?"는 질문을 통역하지 않자 기자가 직접 영어로 질문하면서 감독이 알게 됐고, 한국영화의 가위질 관행은 국제적인 망신거리가 됐다.

영화제 보이콧 대신 시위
 
 2회 부산영화제 독립영화인들의 남포동 시위
ⓒ 부산영화제
 
그리고 1997년 10월에 열린 2회 부산국제영화제. 다큐멘터리 상영작들이 쟁쟁했다. 조성봉의 <레드헌트>를 비롯해 김동원의 <명성, 6일간의 기록>, 변영주의 <낮은 목소리2>, 홍형숙의 <변방에서 중심으로> 등이었다. 하나같이 독립영화의 대표주자들이었고, 검열에 맞선 투쟁을 지속해서 펼치고 있었다.

<명성, 6일간의 기록>은 1987년 6월항쟁 중심이었던 명동성당 농성을 다룬 작품이었고, <낮은 목소리2>는 위안부 문제를 다룬 <낮은 목소리>의 속편이었다. <변방에서 중심으로>는 1980년 이후 영화운동 이후 전개된 독립영화의 역사를 담은 다큐멘터리였다. 그런데 이들의 작품이 공륜의 검열(심의)을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조성봉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억했다.

"1997년 제2회 영화제 때 <낮은 목소리2>의 변영주, <명성, 그 6일의 기록>의 김동원, <변방에서 중심으로> 홍형숙, <레드 헌트>의 나까지 4명이 모여 모종의 결정을 해야만 했다. 지금은 사전검열제도인 영화에 대한 심의가 폐지되고 등급으로 나뉘지만, 그땐 소위 공륜에서 개별 영화에 대해 심의를 할 때였다. 당연히 우리는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심의제도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영화제가 시작되고 난 뒤 영화제 측에서 감독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공륜으로부터 일괄심의를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우린 영화제를 보이콧 하느냐 참가하느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의견을 나누었다. 결국 이제 2회째인 영화제를 보이콧 하는 건 국제영화제의 이미지에 큰 타격을 줄 것이라는 결론 내리고 상영은 하되 다음날 남포동에서 '심의제도 철폐 시위'를 하는 것으로 정리를 했다."

당시 심의로 위장된 검열은 여러 곳에서 파장을 일으키고 있었다.

1997년 당시 동성애를 다뤘다는 이유로 공륜으로부터 수입불가 판정을 받았던 왕가위의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부산 최고 화제작이었다. 부산영화제가 3회째를 맞이하는 1998년부터 영화제 출품작에 대한 심의가 면제됨에 따라, 공륜은 한시적으로 1997년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무삭제로 상영하도록 허가했다.

그러나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여론이 조성되자 문화체육부와 공륜은 언론과 영화관계자들에게만 제한 상영하는 방침을 내걸었다. 개막식 때 '이 영화를 많은 관객이 봐주길 원한다'고 소감을 밝혔던 주연배우 양조위는 이 사실을 알고 아쉬워했다. 관객들의 입장권은 환불되었지만, 납득할 수 없는 당국의 조치에 대한 대중의 비난은 멈추지 않았다.

부산영화제를 방문한 양조위는 남포동에서 야외무대 인사를 가졌는데, 엄청나게 몰려든 관객들에게 대대적인 환영을 받을 만큼 높은 관심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출연 작품은 볼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2회 부산영화제 배우 양조위 야외무대 인사에 몰린 관객들. 양조위가 경호원들에 둘러쌓여 간신히 퇴장하고 있다.
ⓒ 성하훈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리기 직전에 개최됐던 인권영화제와 퀴어영화제의 상황도 비슷했다. 심의를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권력의 압력을 받아 정상적 개최에 어려움을 겪거나 취소됐다.

1997년 9월 27일~10월 4일까지 홍익대에서 예정했던 인권영화제는 검열(심의) 거부로 인해 상당히 거센 압박을 받아야 했다. 당시 인권영화제 집행위원이었던 이충직(전 영진위원장)은 한겨레신문(1997년 9월 29일 자)에 "뉴욕 인권영화제를 포함해 세계에서 열리는 각종 인권영화제 가운데 사전심의를 받는 곳은 한 군데도 없다"며 "심의를 받지 않았다고 학교 쪽에 압력을 넣어 영화제가 차질을 빚고 있지만 어떤 장소에서 어떤 형태로든지 예정된 영화를 모두 상영하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그러나 계속되는 압력에 인권영화제는 하루 일찍 막을 내린다.

1997년 9월 19일 연세대 동문회관에서 개최예정이던 퀴어영화제도 서대문구청이 '상영예정 작품들이 공륜의 심의를 받지 않았고 공연신고도 접수되지 않았다'며 영화제 개최를 가로막아 결국 취소된다.

"시위가 아닌 영화제 행사다!"
 
 2회 부산영화제 당시 상영관인 아카데미 극장 앞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는 조영각을 경찰이 바라보고 있다.
ⓒ 부산영화제
  
 2회 부산영화제 독립영화인 시위. 아카데미극장에서 야외무대로 행진하는 모습
ⓒ 부산영화제
 
 2회 부산영화제 기간인 1997년 10월 14일 오후 남포동 독립영화인 시위. 앞줄 왼쪽 첫번째 김영덕(부천영화제 프로그래머), 오른쪽 첫번째 김화범(인디스토리 이사)
ⓒ 부산영화제
   
1997년 10월 14일 오후 5시. 변영주의 기록영화제작소 보임, 홍형숙의 서울영화집단, 김동원의 푸른영상, 조성봉의 하늬영상, 문학학교 서울 등의 서울씨네마테끄연합, 퀴어영화제, 인권영화제 관계자 등 60명은 <레드헌트>와 <명성, 6일간의 기록> 상영관인 아카데미극장 앞에서 모여들었다. <명성, 6일간의 기록> 상영이 끝난 직후였다.

함께 결의를 다진 이들은 야외무대를 향해 행진을 시작했다. 당시 시위 주동자 중한 사람이었던 조영각(전 영화진흥위원회 부위원장)은 "아카데미극장 앞에 모여 구호를 외치고 있을 때 형사가 나를 연행하라고 소리 질러서 사람들 뒤로 빠졌다"고 기억했다.

부산영화제가 생긴 후 발생한 첫 시위였다. 검열철폐 구호를 외치며 200m 정도를 행진한 시위대는 남포동 야외무대 앞에 도착해 연좌시위에 돌입했다. 관객과 배우가 만나며 연일 함성이 나오던 남포동 피프광장은 결의에 찬 독립영화인들로 대오가 몰려오면서 주변의 시선이 집중됐다.

김동원(감독)은 "이 순간에도 감옥에는 독립영화감독들이 있고, 인권영화제가 공권력의 압력으로 중단됐다. 퀴어영화제는 개막조차 하지 못했다. 인디포럼과 시민영화제의 독립영화상영이 봉쇄됐다. 부산영화제는 멋진 영화제지만 영화 악법이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우리 상황을 잊게 만들고 있다"며 검열 현실을 규탄했다. 퀴어영화제 준비위원이었던 서동진(문화평론가. 계원예대 교수)도 "표현의 자유가 제한되는 우리 영화 현실을 잊지 말자고 호소했다.

시위대가 집회를 이어가자 경찰 지휘관이 나타났다. 그는 독립영화인 시위대를 향해 "불법 집회다. 해산하지 않으면 강제 해산시키겠다"고 엄포를 놨다. 시위대가 꿈쩍 않자 경찰은 재차 해산을 압박했다. 졸지에 영화인들이 불법 시위자로 몰려 경찰차에 끌려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때 혜성과 같이 나타난 사람이 당시 한국영화 프로그래머 이용관(부산영화제 이사장)이었다. 남포동 야외무대 방향에서 허겁지겁 달려온 이용관은 강제해산을 경고하는 경찰 지휘관에게 "이거 시위 아니고 야외무대에서 벌어지는 것과 똑같은 영화제 행사입니다. 왜 영화제 행사에 경찰이 개입하려 합니까?"라고 단호한 목소리로 항의했다.

경찰은 말문이 막힌 듯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다가 해산하라는 이야기만 되풀이했다. 시위대대와 이용관을 향해 "20분 안에 해산하지 않으면 강제로 해산시키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용관도 지지 않았다. 경찰이 "영화제 행사를 방해하지 말라"면서 물러서지 않았다. 양측의 설전이 이어졌고, 김동원 감독은 매의 눈으로 이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2회 부산영화제 독립영화인 시위 당시 경찰과 설전을 벌이고 있는 이용관 당시 한국영화 프로그래머와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김동원 감독
ⓒ 부산영화제
 
 2회 부산영화제 화제작 <하류> 이강생 배우와 차이밍량 감독
ⓒ 부산영화제
 
당시 시위에 참여한 독립영화인들은 김영덕(부천영화제 프로그래머), 김화범(인디스토리 이사) 황철민(감독. 세종대 교수), 표용수(영화음향), 강석필(감독), 오점균(감독) 등이었다. 시위대는 자진 해산을 거부하고 계속 자리에 앉아 검열철폐를 외쳤고, 경찰과 이용관의 설전이 이어지면서 충돌이 불가피한 상황으로 몰리고 있었다.

이 모두를 구원한 것은 <하류>로 부산에 왔던 대만의 퀴어 영화인 차이밍량 감독과 이강생 배우였다. 당시 <하류>는 부산영화제 화제작으로 매진된 상태였고, 두 사람은 부산영화제의 인기스타였다. 두 사람의 등장에 주변으로 관객들이 몰린 것이다. 영화인들 역시 이들을 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시위 대오가 흐트러졌다.

조영각은 "시위주동자들이 당시 최고 화제작이자 표구하기 어려운 차이밍량의 <하류>를 보러가기도 했다"면서 "영화인들은 역시 집회보다 영화!"라고 회상했다.

지나온 부산영화제에서 2회 독립영화인들의 시위는 부산영화제 초기 정치적 독립성과 검열 철폐 의지를 분명하게 보여준 가치 있고 빛나는 투쟁이었다. 결과적으로 영화 해방구로서 검열과 싸움에서 부산영화제를 지켜낸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

이후 부산영화제 현장에서 스크린쿼터 사수를 비롯한 시국 현안에 대한 시위가 이어진 전례가 됐다. 정치 사회적 현안이 생길 때마다 부산영화제 현장에서 이어진 영화인 시위의 기원이기도 했다.

2014년 촉발된 부산영화제 사태 때 1997년 남포동 시위가 회자 됐던 것도, 영화의 해방구를 사수하기 위해 싸웠던 영화운동의 정신 때문이었다. 1997년 당시 정치적 간섭과 검열에 맞서 결연하게 투쟁했던 영화인들은 박근혜 정권이 부산영화제에 정치적 탄압을 자행하는 과정에서 "절대 굽히거나 타협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싸우자"는 의지를 표출했다.

영화계의 저항과 연대는 끝내 승리했다. 전 세계 영화계와 연대해 창작과 표현의 수호에 앞장서고 있는 부산영화제에 1997년 독립영화인들의 남포동 투쟁 정신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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