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네가 회사랑 싸워 어떻게 이겨".. 못 받은 돈 덮고 출근
최현수(가명·61)씨는 수도권 한 장례식장 매점에서 2년 넘게 일하고 있다. 계약된 근무지는 매점이지만 얼마 전 휴식 시간에 또 시신 1구를 수습했다. 처음엔 부담스럽던 시신 수습도 여러 번 반복되면서 무뎌졌다. 그는 지난 3일 국민일보와 만나 “스스로 ‘염전노예’처럼 부려지고 있다”면서도 “다른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워 당장 그만둘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최씨는 2년 전부터 이곳에서 근무 중이다. 구청 일자리지원센터 소개를 받아 어렵게 구한 정규직 일자리였다. 은퇴 뒤 주차장 요원으로 1년 가량 일하면서 해고 불안에 시달렸던 터라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손이 빠르고 계산에 어려움이 없어 근무 자체도 수월할 거라 생각했다.
출근 3일째 되던 날, 매점 방문객이 뜸해져 쉬고 있던 최씨에게 관리자가 대뜸 “시신 수습 업무를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거절할 수 없었던 최씨는 장례지도사를 거들었다. 그때만 해도 하루 도움을 주는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시신 수습 업무는 계속됐다. 장례식장에 근무하는 다른 직원 대부분도 최씨와 마찬가지로 다른 일을 추가로 하고 있었다.
시신 수습 요청을 받고 출동하면 이동하는 데만 보통은 1시간, 먼 곳은 4시간 넘게 걸렸다. 오랜 시간 방치돼 부패한 시신은 장례지도사가 주로 처리하지만, 최씨도 요양원에서 시신을 직접 수습하기도 했다. 새벽에 나갈 경우 잠은 포기할 수밖에 없다. 한 번 시신을 수습하러 출동할 때마다 특별수당으로 3만원을 받지만, 그가 일한 시간 자체는 근로시간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시신 수습 출동이나 시신 안치 지원, 상주 응대는 근로계약과 달랐지만 감내할 수밖에 없다.
휴식시간도 이상했다. 격일로 오전 8시부터 다음 날 오전 8시까지 24시간 근무하는 일이었는데 잠을 자는 5∼6시간, 휴식 1시간여를 제외하고는 줄곧 근무였다. 근로계약서상 약속된 하루 휴식은 총 14시간이었으나 휴식은 근로계약서에만 존재했다.
장시간 근무도 고됐지만, 무엇보다 근무 환경이 힘들었다. 장례식장 매점 특성상 일반 편의점과 달리 장례에 필요한 모든 물품을 상주에게 공급하고, 발인을 마치면 최종적으로 정산하는 업무까지 맡았다. 이 과정에서 상급자의 폭언·고성이 반복됐다. 최씨는 “일은 제대로 알려주지도 않은 채 다짜고짜 내게 소리 지르고, 악을 썼다”고 말했다.
장례식장은 매점, 식당, 영안실 등 3개로 사업장을 쪼개놨다. 모두 ‘5인 미만 사업장’으로 등록해 근로기준법의 법망을 피하기 위해서다. 현행 근로기준법은 5인 이상 사업장에만 적용된다. 관리자급 직원을 제외한 직원 대다수가 이렇게 ‘공짜노동’을 수시로 해왔지만 신고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한다.
최씨는 한때 잘나가던 제조업체 대표였다. 20여년간 업체를 운영했다. 160∼170명의 직원을 뒀고, 많을 땐 200명이 넘을 정도로 사업은 번창했다. 최씨는 2년마다 고용노동부 근로감독관의 지도·감독을 받았고, 직원들의 노동 관련 민원에 여러 차례 대응하면서 근로기준법 내용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현재 일하는 장례식장이 실제로는 하나의 사업장이나 다름없지만, 5인 미만으로 인력을 나눈 채 업체 등록을 해 법망을 피해간다는 사실도 곧장 파악했다.
하지만 최씨는 이를 바로잡으려는 시도를 쉽게 하지 못한다. 항의하고 고발해도 바뀌지 않을 현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대표 시절 회사 편에 선 근로감독관의 모습이 수시로 떠오르기도 했다. 월 200만원 남짓 받는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회사와 싸울 순 없었다. 냉혹한 현실 앞에 자조적 침묵을 택한 셈이다. 최씨는 “처음에는 묵인한 채 2∼3개월 견뎌보고, 그래도 바뀌지 않으면 그냥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냥 다니고 있다”며 “회사랑 싸워 어떻게 이기겠나”라고 말했다.
새로운 일을 구할 자신도 없었다. 나이가 족쇄처럼 여겨졌다. 제조업체 대표 경험이 있었지만 은퇴 뒤엔 별다른 쓸모가 없었다. 고용주들은 그의 나이에만 관심이 있었다. 최씨는 “노년 준비도 못 하고 허우적거리는 우리 또래에게 나이는 가장 큰 약점”이라며 씁쓸해했다.
월급이 밀릴 경우에도 회사엔 싫은 내색조차 할 수 없다. 앞서 약 1000만원의 돈을 받지 못한 동료가 퇴사하면서 회사 측을 고발한 일이 있었는데 회사는 그 후로 현 직원들의 근태 감시를 강화했다. 추가 고발에 대비해 근태 문제로 꼬투리를 잡으려는 의도로 보였다. 최씨 역시 회사로부터 받지 못한 돈이 있지만 일단 덮어두기로 했다.
다만 최씨도 용기를 내 그간의 문제를 바로잡고 싶다는 생각은 마음 한편에 갖고 있다. 예순이 넘은 최씨가 마음에 드는 새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 거란 기약은 없지만, 용기를 내고 싶다는 마음이 불쑥불쑥 고개를 든다. 앞서 1400만원이 넘는 돈을 받지 못한 채 퇴사한 동료가 아파트 환경미화 일을 새롭게 구한 뒤 회사를 상대로 법적 대응을 준비 중이라는 소식도 최근에 들었다. 바늘구멍처럼 좁은 노년 채용시장에서 생존한 이들만이 부당함을 지적할 수 있는 것 같아 서글프게 느껴졌다.
“현실에선 ‘정의’보다 ‘돈’이 더 세더라고요”. 노년에 괜찮은 일자리 하나 구하기 힘든 한국 사회에서 최씨 같은 이들에게 바깥세상은 더 ‘지옥’이다. 그는 오늘도 아침 일찍 장례식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박장군 기자 genera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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