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재호 칼럼] 판타지의 정치와 냉혹한 현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넷플릭스를 시청하는 전 세계 83개국에서 모두 1위를 차지하는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 CNN이나 BBC에서도 ‘오징어 게임’의 흥행을 심층 분석하여 보도했다. 빌보드 차트 선두를 이어가는 BTS를 위시한 K팝뿐 아니라 아카데미상에 빛나는 영화 ‘기생충’과 ‘미나리’ 등 한국 문화의 열풍이 이어지고 있다. 심지어 ‘오징어 게임’의 인기 덕에 넷플릭스 주가가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고도 한다.
‘오징어 게임’은 인생의 나락에 빠져 희망이 없는 사람들에게 판타지 게임을 제시하며 현실을 탈출할 수 있는 유혹으로 드라마가 시작된다. 어린 시절 흔히 하던 게임만 잘하면 엄청난 상금을 받게 된다. 능력주의로 치닫는 경쟁사회의 낙오자인 주인공들에게는 꿈 같은 제안이다. 하지만 한번 참여하게 되면 공정과 질서를 앞세운 독재 정치의 틀 속에 갇히게 된다. 게임 운영위원들에 의해 탈락자들은 무참히 제거되는 무섭고 냉혹한 현실을 직면하게 된다. 하지만 자신들이 선택하고 참여한 룰이기 때문에 반론도 제기 못하고 게임을 이어나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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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타지로 유혹하는 대선 레이스
꿈 같은 유혹에 열광하는 유권자
전문가 팩트체크에 귀 기울여야
로또보다 능력발휘 시스템 공약을
」
최후 승자가 받게 되는 456억 원이라는 엄청난 액수의 로또 상금은 탈락자들이 처형된 대가로 받는 돈이다. ‘오징어 게임’의 판타지는 현실보다 더 극단적인 경쟁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비인간적 경쟁의 진실을 깨닫고 이성을 되찾아 게임을 포기하기도 하지만 마약과 같은 치명적 판타지의 매력은 게임을 떠났던 참가자들이 슬금슬금 그 자리를 다시 찾아오게 만든다.
대선 레이스가 시작되면 꿈 같은 정치의 판타지가 펼쳐진다. 이명박 대통령의 경제성장률 7%, 1인당 국민소득 4만불, 세계 7대 경제대국이라는 747전략, 300만개 일자리 창출, 청년실업 절반 축소, 상생과 협력으로 사회양극화 해소, 다목적 한반도 대운하 사업인 4대강 사업의 공약이나 박근혜 대통령의 국민대통합, 경제민주화 실현, 행복주거, 통일대박 공약은 판타지를 꿈꾸는 유권자들에게는 달콤한 약속이었지만 실현된 것은 거의 없다.
문재인 대통령도 청와대에 일자리 현황판을 만들어 일자리를 우선적으로 챙기겠다고 했고, 광화문 시대를 열어 국민과 소통하고 대통령의 권한을 분산하겠다고 했고, 한미동맹을 강화해 안보를 튼튼하게 하겠다고 했다. 더 나아가 출범 후 집값 안정, 탈원전, 비정규직 철폐, 남북 평화안보, 그린 뉴딜 등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꿈 같은 약속을 이어갔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사회문제를 풀어내는 정책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다. 정책은 현실의 복잡성을 풀어내야 하기 때문에 좋은 의도로 시작되었어도 예기치 못한 난관에 부딪히기도 하고 전혀 엉뚱한 결과가 나오기도 한다. 더 나아가 새 정책은 기존 균형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에 누구에게는 이익이 되지만 다른 누구에게는 치명적인 손실이 되곤 한다.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은 후쿠시마 사태 이후 원자력의 위험을 덜어준다는 좋은 뜻이었지만 원자력 산업의 붕괴, 전기값 인상, 화력 발전과 대체에너지 전력 생산의 역비용이 나타났다. 무리하게 추진한 사법개혁은 사법시스템의 혼란을 초래했고, 여야를 막론하고 법조인 출신들의 사익추구 현상은 더 큰 비리로 지금도 드러나고 있다. 재개발 사업의 억제는 강남 부동산 가격의 폭등으로 이어졌고 수십 차례 시도된 부동산 정책은 집행과정에서 모두 반작용으로 나타났다.
정책 이론에서는 정책 결정보다 집행이 더 어렵다고 한다. 일찍이 프레스만(Pressman)과 윌다브스키(Wildavsky) 교수는 『집행론(Implementation)』이라는 저술을 통해 샌프란시스코 인근 오클랜드의 항만개발 사업의 사례를 통해 정책 집행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분석했다. 오클랜드에 만연한 실업 문제를 해결하고, 항만시설을 확충하는 꿈 같은 사업이었지만 결국 실패로 끝난 정책을 분석한 것이다.
우리는 대선 때만 되면 판타지 정치에 빠져서 흥분한다. 하지만 집권 말기가 되면 좌절감과 배신감으로 우리 손으로 뽑은 대통령을 비난한다. 지금 대선 주자들도 우리를 판타지의 세계로 이끌고 있다. 국민들에게 기본소득 제공, 여행비 1000만원, 군대 전역할 때 3000만원, 사회초년생에게 1억원, 청년원가주택, 강북에 4분의1 가격의 쿼터아파트 공급, 골프장, 공항이전 아파트단지 건설 등 현실을 무시한 공약을 남발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런 판타지에 또 넋을 잃게 된다.
정치의 판타지를 피하기 위해서는 후보자들의 예능프로 출연이나 말장난으로 치닫는 후보자 TV 토론보다는 학회의 대선공약 평가나 전문가들의 팩트 체크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유권자들도 이제는 로또를 기대하기보다는 내 능력으로 노력하면 잘 살 수 있는 대한민국을 만들어줄 후보를 눈여겨보아야 한다.
로또의 판타지는 더 큰 희생의 대가가 기다리고 있다는 냉혹한 현실을 명심해야 한다. 잠시 이성을 되찾았다가도 치명적인 판타지의 유혹에 달려드는 불나방 같은 게임 참여자가 되지 않으려면 다음 대선에서 우리 모두 깨어 있어야 한다.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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