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녹취
말은 가볍다. 성대의 떨림을 통해 소리의 형태로 입 밖을 나서는 순간 즉시 증발해버린다. 대화 상대방의 뇌 속에 저장돼 전언(傳言)의 형태로 부활할 수는 있지만, 한 번 걸러진 말의 선명성은 크게 떨어진다. 전언 진술이나 증언이 수사기관이나 법원에서 하찮은 대접을 받아온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말을 붙잡아두는 기계들이 만들어지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물의 증발을 막는 기름층처럼 말이 달아나기 전에 제 모양 그대로 가둬버리는 저장 매체 속에서 말은 타율적으로 연명하는 존재가 됐다.
법적 증거로서도 의미가 커졌다. 대화나 방송의 녹음 또는 녹음한 것을 글로 옮겨 기록한다는 의미의 녹취(錄取)라는 용어가 공문서에 부쩍 자주 등장하게 된 이유다. 녹취의 형태로 저장된 말에는 문서에 준하는 증거능력이 더해졌다. 하지만 녹취의 보다 본질적 위력은 다중에게 날것 그대로 공개되는 순간에 발생하는 가공할 파괴력이다.
이른바 ‘최규선 게이트’의 주인공이 녹음테이프에 담아낸 독백은 모노드라마에 불과했지만, 그 혼잣말이 “청와대와 국정원의 밀항 종용”에 이르렀을 때 핵폭탄이 됐다. 병역 브로커 김대업씨가 내놓은 ‘대선 후보 아들 병역 비리 관련 대책 회의’ 녹취 자료는 대선판을 뒤흔들었다. 보이스펜으로 녹음한 뒤 테이프에 옮겨 담았다는 그 콘텐트는 검찰에 의해 위조된 물건으로 결론 났는데도 파괴력이 경감되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 초기 ‘썬앤문 사건’의 와중에 돌출된 ‘김성래 녹취록’은 서슬 퍼런 당시 실세들을 정치판에서 쫓아냈고, 노 전 대통령에게도 임기 내내 금품 수수 의혹을 원죄처럼 떠안겼다.
기술의 발전과 함께 휴대전화기가 등장하고 거기에 녹음 기능과 통화 자동녹음 기능이 추가되면서 녹취 대중화 시대가 열렸다. 이제 대형 사건의 와중에 녹취록이 등장하지 않는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어졌다.
대장동 개발 의혹 수사를 급진전시킨 것 역시 내부자가 제공한 19개의 녹취 파일이다. 그 중 극히 일부 내용이 정제되고 간추려진 글의 형태로 공개됐을 뿐인데도 판이 뒤집혔다. 감정이 고스란히 실린 음성 또는 적나라한 대화를 그대로 옮긴 문서가 공개된다면 그 파괴력은 어느 정도일까. 경험칙에 따르면 곧 알게 될 듯도 하다.
박진석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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