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영준의 시시각각] 신임 총리 기시다는 달라질까
재단 해산 결정에 불신으로 돌변
역사문제 입장 변화 기대 어려워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가 이끄는 새 내각이 어제 출범했다. 지난 2년 사이 이념 스펙트럼에서의 위치는 맨 오른쪽의 아베로부터 스가를 거쳐 중간을 향해 조금씩 이동했다고 보면 틀림이 없다.
신임 총리 기시다는 자민당 리버럴의 계보를 잇는 정치인이고, 아시아 국가와의 우호를 중시하는 굉지회(宏池會ㆍ고치카이) 출신이자 국제파를 자처하는 합리적 성향이다. 한국과는 특히 인연이 깊다.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문에 서명한 당사자였고, 그보다는 덜 주목받고 있지만 이듬해의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ㆍ지소미아) 타결도 기시다 외상 때 이뤄진 일이다. 한국의 논리와 사고방식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고 봐야 한다. 그래서인지 한·일 관계가 이제 조금씩 나아지지 않겠느냐는 기대도 있는 듯하다.
과연 그렇게 될까. 똑같은 기대가 1년 전에도 있었고,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지병 악화로 아베가 갑작스레 물러났을 때 일본의 경제주간지는 “아베 사임을 가장 반기는 건 한국일지 모른다”고 썼다. 2019년 불매운동의 구호였던 ‘No Abe’가 이뤄졌으니 한·일 관계는 좋아질 일만 남았다는 기대가 퍼졌다. 더구나 후임 총리 스가는 실리를 중시하는 스타일이어서 유연성을 발휘할 여지가 있다고 문재인 정부도 기대를 걸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건 우리의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지난 1년간 문 대통령은 스가 총리와 약식회담 한 번 하지 못했다.
스가와 기시다에겐 공통점이 있다. 아베-스가-기시다는 위안부 합의 당시 각각 총리-관방장관-외상이었다. 역사수정주의자인 아베는 애초부터 위안부 합의에 소극적이었다. 일본 정부의 책임을 공식 인정하고 총리 명의의 사죄를 표명한다는 합의가 내키지 않았을 것이다.
이걸 설득한 사람이 스가와 기시다였다. 실무진 간의 협상이 난관에 부닥칠 때 정치적으로 풀어 주는 역할도 했다. 당시 상황을 아는 전직 고위 외교관은 “당초 일본 정부가 제시한 거출 금액은 턱없이 낮았는데, 스가와 기시다의 힘으로 10억 엔으로 올려 우리가 수용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위안부 합의에 자부심을 갖고 있던 두 사람은 합의사항인 화해치유재단을 문재인 정부가 전격 해산하자 격노를 감추지 않았다고 한다. 사람은 누구나 체험으로 터득한 인식을 뼛속 깊이 새기는 법이다. “한국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 나라”라는 발언은 아베뿐 아니라 스가와 기시다에게서도 나온 말이다.
집권 초 문재인 정부는 일본의 태도 변화를 끌어낼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화해치유재단 해산 조치로 말미암아 한국에 대한 불신이 깊어진 사람이 잇따라 일본 총리가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역사 문제에 관한 한 기시다 내각의 입장은 별로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어제 발표된 새 내각의 면면을 봐도 그렇다. 한때 한국 국내에서 아베만 물러나면 한·일 관계가 풀릴 것이라고 본 것처럼, 일본에서는 모든 협의나 협상을 내년 한국 대선 이후로 미루려는 기류가 느껴진다. 아베 이후에 대한 한국의 예측이 빗나갔듯이 이 또한 옳지 않은 일이다. 선거 향방을 예측할 수도 없거니와, 설령 내년 한국에서 보수 정부가 출현한다 해도 한·일 관계가 반드시 좋아진다는 보장이 없다.
2008년의 기억이 선명하다. 노무현 정부에서 이명박 정부로 바뀐 뒤 만난 일본 외교관들은 “이제 좋아질 일만 남았다”고 했다. 초기엔 확실히 그랬지만, 이명박 후반부의 한·일 관계는 노무현 시절보다 훨씬 못했고, 그 여파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정권 교체가 모든 걸 해결해 줄 것이란 발상부터 접어야 한다. 그건 한·일 관계를 유통기한이 5년도 안 되는 일회용품으로 보는 것과 마찬가지다. 또한 그런 발상은 문제의 책임을 '내 탓'이 아니라 '네 탓'으로 미루는 것이다. 허물을 인정하는 게 뼈아프지만 내 탓은 없는지 돌아보고, 나부터 할 일을 찾는 게 문제 해결의 시발점이다. 두 나라 지도자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예영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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