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정의 왜 음악인가] 오징어 게임과 왈츠
계단은 분홍색, 하늘색, 노란색으로 아름다운데 오르는 사람들의 걸음은 무겁고 불안하다. 음악은 춤의 박자인 3박이다. 역사상 가장 우아한 ‘쿵짝짝’, 바로 왈츠다. 요즘 전 세계에서 인기 절정인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 이렇게 왈츠가 나온다.
돈이 목숨보다 절박한 참가자들이 게임장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를 때 흐르는 음악은 왈츠의 원조인 오스트리아 음악이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강’이다. 게임이 끝나고는 러시아 작곡가 표트르 차이콥스키의 ‘현을 위한 세레나데’ 중 왈츠가 흐른다.
왈츠는 평화로운 세상의 아름다운 음악이다.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강’이 작곡된 19세기는 그야말로 왈츠의 전성기였다. 오스트리아 빈의 연회장에는 왈츠에 중독된 사람들이 넘쳐났다. 왈츠의 호화로움에는 끝이 없었다. 오죽하면 “19세기 빈 사람들은 밤 10시부터 오전 7시까지 빙글빙글 돌았다”는 기록도 있다. 이 시절의 왈츠는 인생을 흥청망청 즐긴다.
차이콥스키에게 왈츠는 하나의 탈출구였다. 결혼 생활은 유례없이 비참했고, 바이올린 협주곡은 혹평 세례를 받았다. 참혹한 시절의 차이콥스키는 선배 작곡가 모차르트에게 눈을 돌렸다. 모차르트의 완벽한 형식에 매혹됐을 때 나온 곡이 바로 ‘현을 위한 세레나데’다. 여기에서 왈츠는 영화로웠던 옛 시절에 대한 회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차이콥스키는 같은 시기에 쓴 교향곡 5번의 3악장에도 왈츠를 넣으면서 회고를 계속한다.
두 왈츠는 태연하게 아름답고, 현실은 끔찍하다. ‘오징어 게임’의 왈츠는 이런 점에서 모리스 라벨의 왈츠에 가깝다. 라벨은 1920년 ‘라 발스’를 썼다. 제목은 프랑스어로 왈츠, 부제는 ‘환상적이고 운명적인 소용돌이의 인상이 뒤섞인 빈 왈츠에 대한 일종의 찬양’이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구름 사이로 왈츠를 추는 남녀들이 어렴풋이 보인다. 구름이 흩어지고 왈츠를 추는 사람들로 홀이 붐빈다. 샹들리에의 불빛이 휘황찬란하다.”
빛나며 시작한 ‘라 발스’는 작품 뒷부분에서 산산이 깨진다. 라벨은 여러 종류의 왈츠를 하나하나 소개한 다음, 클라이맥스에서 일그러뜨리고 변형시킨다. 쾌락에 중독돼 끝없이 춤을 추다 쓰러져버린 듯, 더는 춤출 수 없는 광기의 음악만 남는다. 라벨은 이 곡을 쓰기 전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전쟁 이후 그의 삶은 파멸로 향해갔다. 왈츠의 평화는 필연적으로 파괴될 수밖에 없다.
‘오징어 게임’은 왈츠가 암시하는 평화와 호화로움을 내던진다. 실제 세계는 한 발짝 차이가 삶과 죽음을 가르는 곳이다. 들리는 음악은 왈츠지만 화면은 라벨의 ‘라 발스’다. 쾌락적이고 중독적이기까지 한 평화로운 왈츠의 위험하고 불온한 이면을 포착하고 있다.
김호정 문화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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