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년 된 시골 버스터미널, 팔순 사진가의 '갤러리'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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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호철 기자]
▲ 경북 의성군 금성면의 버스터미널. 터미널 간판 아래 '해암 김재도 갤러리'라는 간판이 걸렸다. 1954년부터 67년간 계속 운영 중인 이 정류장은 경상북도 노포 기업에 선정되었다. 오른족 원 안은 노포기업 명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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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갤러리 겸 대합실 내부. 벽면은 전시 공간으로 이용되고, 오른쪽 앞에 매표창구가 있다. 매표창구는 버스 출발 30분 전에만 열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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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의성군에 귀촌한 벗으로부터 탑리 버스정류장을 갤러리(화랑)로 쓰는 사진가 한 분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지 한참 지났다. 그러나 나는 딴 데 정신을 팔았는지 그걸 전혀 유념하지 못했다. 지난 9월 16일, 함께 금성면 탑리의 시외버스터미널을 찾았다.
팔순 사진가가 정류장에 꾸민 갤러리
탑리 버스정류장은 인구 4500명이 있는 시골 마을의 버스정류장으로는 규모가 제법이었다. 대합실에 들어선 다음에야 비로소 '정류장이 갤러리'라는 벗의 얘기가 가늠되었다. 열두어 평쯤의 대합실 벽면엔 빼곡히 사진 작품이 걸렸고, 두 군데 텔레비전 모니터에선 관련 동영상이 흐르고 있었다. 출입구 오른쪽의 매표창구, 그 위와 맞은편 벽에 각각 붙은 버스 시간표와 요금표만이 그곳이 정류장 대합실임을 환기해 주었다.
매표창구마저 비어 있는 대합실 벽면을 따라 긴 나무 의자가 'ㄷ' 자로 이어져 있었다. 진행 중인 전시는 올 5월에 개막한 <해암 김재도의 조문국 전>이다. 밖으로 나와서야 정면 출입구 위의 '해암 갤러리' 간판과 '경상북도 노포 기업' 명패를 확인할 수 있었다.
옆 건물에 있는 '사진 문고'에서 사진가 해암(海巖) 김재도(84) 선생을 만났다. 지난 40여 년 동안 고향마을을 찍어온 사진가는 우연한 방문자들을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 해암의 사진 문고. 그간 모은 5천여 권의 사진집, 도록, 관련 서적으로 그는 '작은 사진 도서관'을 열고 싶어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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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암이 <내 고향 의성>전(2002)에 전시했던 사진을 흑백으로 인화하여 지난해 다시 <내 고향 의성 흑백 전시>전을 열었다. 그때의 흑백 사진들이 사진 문고 벽에 걸려 있다. |
ⓒ 장호철 |
▲ 사진 문고에 전시 중인 각종 카메라. 그가 산 것, 기증받은 것 등 필름카메라와 디지털카메라가 각각 200여 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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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리 버스정류장은 1951년에 그의 선친이 열었다. 3년 뒤, 선친이 세상을 떴을 때 6남매의 장남인 해암은 고1이었다. 그가 17살에 '정류소장'이 되어 올해까지 67년째 가업을 이을 수밖에 없었던 사연이다. 대학에서 토목공학을 공부한 그는 취업 대신 어머니와 여동생, 어린 남동생만 있는 집을 떠날 수 없어 다시 정류장에 주저앉았다.
67년째 운영 중인 정류장을 못 닫는 까닭
다행히 1980년대까지만 해도 정류장은 호황이었다. 금성면 인구가 1만8000명에 이르렀던 1970년대에는 하루에 차표를 산 이가 천 명 넘었으니 버스에서 내린 사람도 그만큼이었을 것이다. 군내 환승지 탑리는 대구·안동은 물론 청송 주왕산, 경주, 부산, 울산까지 가는 버스가 하루 스물몇 차례씩 정류장에 드나들 만큼 승객이 넘쳤다.
초가였던 매표소를 슬래브 건물로 짓고, 터도 확장해 버스 10대를 너끈히 댈 만큼 번창했던 정류장은 2000년대 들어 버스 이용객이 급격히 줄면서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하루 이용 승객이 하루 20~30명에 그치고, 들고나는 버스도 여섯 차례가 고작이다.
▲ 대합실 왼쪽 벽에 걸린 운행시간표(부분). 한때는 칠판의 빈칸을 꽉 채운 버스가 하루 스물몇 차례씩 정류장에 드나들 만큼 승객이 넘쳤지만, 지금은 상하행 여섯 차례가 고작이다. |
ⓒ 김재도 제공 |
고심 끝에 그가 하루 스무남은 명밖에 찾지 않는 대합실을 갤러리로 꾸민 게 2018년이다. 그는 자기 작품을 걸거나, 희망하는 작가들에게도 전시 공간을 제공할 생각이었다. 이후 한 해 3~4회씩 갤러리에서 전시를 해 온 덕분에 버스정류장을 찾은 이들은 대합실에서 사진 작품을 감상하고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시골 사진가, '고향'과 '독도'를 찍기 시작하다
1937년생인 해암이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것은 1980년, 40대 초반일 때다. 독일 광부로 갔던 후배가 휴가를 나왔다가 독일제 롤라이(Rollei) 카메라를 20만 원에 사라고 했다. 공무원 봉급이 8, 9만 원이던 시절, 망설임 끝에 그걸 사면서 사진 생활을 시작했다. 그 뒤 10여 년간 야유회나 잔칫집을 찾아다니며 부지런히 사진을 찍었다.
홀로 사진을 찍던 그가 50대 늦깎이로 읍내 사진 동호회에 가입한 때가 1988년이었다. 회원들과 어울려 일출 사진은 동해로, 일몰 사진은 서해로, 설경 사진은 태백산으로 이른바 '출사'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런 활동에 회의를 느낀 그는 사진 촬영의 방향을 튼다.
▲ 해암의 사진. 2000년 10월, 새벽안개 속에 함께 마늘을 심고 있는 노부부를 찍은 이 사진은 그가 가장 아끼는 작품이라고 한다. |
ⓒ 김재도 제공 |
▲ 해암의 사진 생활이 담긴 도록 <독도>(2020)와 해암 김재도 갤러리에서 연 전시회의 팸플릿들. |
ⓒ 장호철 |
의성을 기록한 그의 사진은 2002년에 군수의 권유로 연 첫 사진전 <내 고향 의성>으로 지역에 알려졌다. 이는 국립대구박물관 기획전 <조문국에서 의성으로>에 초대 전시되어 큰 호응을 받았다. 이 무렵 그는 우연히 경북경찰청장의 독도 순시에 동행해 독도 사진을 찍게 되면서 '독도 사진가'로도 알려지게 되었다.
그 뒤, 그는 십여 차례 경찰청의 도움으로 헬기를 타고 독도를 촬영했고, 혼자서도 울릉도에 가서 독도경비대의 지원으로 독도의 정경을 렌즈에 담았다. 독도를 십수 차례 드나들었으나 2013년에야 경북문화콘텐츠진흥원 개관 기념 초대전 <우리나라 독도>를 열게 된 것은 독도의 사계를 온전히 담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 2010년 8월, 해암이 헬리콥터를 타고 찍은 독도 사진. 이 사진들은 모두 독도재단에 기증하였다. |
ⓒ 김재도 제공 |
"괜찮았습니다. 자기 좋아서 하는 일이라면서 넉넉히 받아주었지요. 물론 돈 들어가는 일이면 좀 덜 좋아하는 기색이긴 했지만요."
그는 2년간 성심으로 구완한 부인을 2013년에 먼저 떠나 보냈다. 대구의 병원과 안동을 오가며 바쁘게 준비한 독도 사진전 개막 사흘 후였다. 자기 아픈 것보다 홀로 남아 정류장을 지킬 남편을 더 걱정하던 부인은 전시회 개막을 기뻐하다가 떠났지만, 고지식한 남편은 아직도 정류장을 지키고 있고 거길 떠날 생각이 전혀 없다.
그의 기록 사진을 받아 안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현실
망설이다가 떠나시기 전에 사진은 어디엔가에 맡기고 가셔야 하지 않냐고 물었더니 글쎄, 말이지요, 하고 그는 허두를 뗐으나 말꼬리를 흐렸다.
▲ 해암 김재도 선생. 그는 17살 때부터 부친이 물려준 버스정류장을 지금까지 67년간 운영해 왔다. 그는 고향인 의성과 독도 사진으로 알려진 사진가이기도 하다. |
ⓒ 장호철 |
그는 시종 겸손하고, 친절했다. 자기 사진을 자랑하거나 내세우지 않았으며, 현실을 과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냈다. 그가 전해준 소박한 삶, 고향과 이웃에 대한 애정 앞에서 우린 고개를 숙였다.
혹시 경북하고도 의성군 금성면, 탑리의 버스터미널에 오면 갤러리 대합실에서 열리는 사진전을 꼭 보시라. 혹시 날렵한 몸피에 상냥하게 말을 거는 중절모의 노신사가 있으면 그가 바로 해암 김재도 선생이다. 기억해 주시라. 그는 사진가이지만, 67년째 탑리 버스정류장 지킴이면서 소멸 위험 전국 1위의 의성 지킴이시기도 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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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자의 개인 블로그 ‘이 풍진 세상에’(https://qq9447.tistory.com/)에도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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