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논단] 왜곡된 소수의견, 권순일의 일탈
영화 ‘아수라’ 감독은 경악한 관객들에게 “이 영화에서 언급되거나 묘사된 인물, 지역… 사건과 에피소드 등은 모두 허구적으로 창작된 것이며, 만일 실제와 같은 경우가 있더라도 이는 우연”이라며 겁에 질린 듯한 자막을 남겼다.
대장동 사건 이후 몇 차례 다시보기를 하며 매번 영화와 비슷함을 느꼈다. 영화 ‘마스터’에서 이병헌은 고위 경찰과의 대화에서 “이제까지 와~ 하셨으면 이번에는 와우~ 하실 겁니다”라며 확실한 일 처리와 뇌물 정황을 묘사했다. 이젠 영화 ‘내부자들’의 이병헌과 조승우가 등장할 때가 됐다. 이미 천화동인 5호 소유주 정영학 회계사, 성남의뜰 초대 대표 최모 법무사 등이 등장했다. 검사 조승우 역은 누가 맡게 될까.
권순일 전 대법관이 작년 9월 퇴임 후 2개월 만에 화천대유 고문을 맡고는 매달 거액의 고문료를 받아 개인적 비난은 물론 대법원까지 ‘대범(犯)원’ 소리를 듣게 하고 있다. 하지만 중앙선관위원장을 10월까지 했으니 사실은 곧바로 고문을 맡은 것과 같다. 우리가 대법관과 헌법재판관을 존중하는 것은 그들의 높은 지위 때문이 아니라 공정한 판단에 대한 강한 신뢰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독일 연방헌법재판관들이 최고의 존경과 신뢰를 받는 근거도 이와 같다.
이재명 재판에서 권순일이 평의원칙의 순리에 따랐는지 의문이다. 심리 단계에서 의견이 나뉘면 최종 평결에 앞서 다른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 당해 사안에 대한 자신의 의견서를 돌리는 것은 허용되지만 표결 왜곡을 위한 더 이상의 활동은 안 된다. 평결 단계에서 후임부터 선임 순으로 마지막엔 재판장이 의견표명을 하는 표결 방식도 결론의 왜곡을 초래한다. 그들은 선임자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후임자를 앞세운다고 하지만 그것은 옳은 표결방식이 아니다. 오랜 관례였고 사실상의 평의원칙이라고 하지만 이런 원칙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지극히 권위적이고 비상식적이다.
권순일의 소수의견은 멋지게 성공했다. 이재명 재판에서 소수의견까지 준비했던 권순일은 단순한 의견서 회람 제공 수준을 넘어 더욱 적극적인 역할을 했고, 연구관의 당초 유죄 보고서에 더해 추가로 무죄 취지 보고서를 작성케 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5대 5로 유무죄가 나뉘자 실질적인 캐스팅보트를 행사해 무죄를 끌어낸 것은 비상식적 평의원칙의 최악의 결론이었다. 이런 형식적 위법성 외에도 실체적 위법성도 부정할 수 없다.
이재명 선거법 위반 사건은 법령의 위헌 여부를 다투거나 기본권 침해를 다투는 헌법재판 사건이 아니라 공직선거법상의 허위사실공표죄에 관한 구체적 사안에 대한 형사재판이었다. 실제로 이재명의 허위사실 공표 혐의에 관한 재판에서 권순일은 “선거 TV토론 과정에서 후보자 발언은 유무죄로 다툴 일이 아니라 헌법상 표현의 자유를 살필 문제”라며 다른 대법관들을 설득했다고 한다. 구체적 범죄 혐의를 다투는 재판에서 유무죄 판결을 한 것이 아니라 실질적 위헌 여부 판결을 한 것 자체가 법리에 반한다. 구체적 사건에서 그 판단기준으로 ‘헌법’을 들이대면 빠져나갈 구멍이 무한대로 넓어진다.
헌법상 표현의 자유를 근거로 판단기준이 확장되면 결론은 재판부에서 만들기 나름이다. 허위사실 공표에 해당해 유죄 심증은 짙지만, 선거에 대한 검찰·법원의 과도한 개입을 초래한다거나, 적극적·능동적 주장이 아니라 후보자 토론에서의 질문·답변이나 주장·반박 등 소극적·수동적 의견표명은 이른바 ‘숨 쉴 공간’에 해당해 이런 경우에까지 허위사실 공표로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 다수의견의 핵심 근거이지만 설득력이 약하다. 이 논리대로라면 임기응변 능력과 말주변 테스트에 불과한 후보자토론회는 할 필요가 없다.
화천대유 대주주 김만배가 8차례나 권순일 면담 방문을 하면서도 구내이발관 이용 목적이었다고 발뺌했다. 전 성남도시개발공사 기획본부장 유동규는 검찰 압수수색이 들어오자 창밖으로 휴대전화를 던져버리더니 결국 배임·뇌물 혐의로 구속됐다. 여야 곳곳에서 특검 요구가 분출하는 상황이다. 삼풍백화점 붕괴 같은 사건이 생겨야 묻힐까 말까할 정도로 의혹이 확산일로인데도 이재명이 경선에서 득표율 절반을 넘기며 파죽지세로 진격하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권순일은 이 고초 속에서도 이를 악물며 오로지 이재명 당선만을 고대하고 있지는 않을까. 그것이 그가 사는 유일한 길이니 말이다.
신봉기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공법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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