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경 칼럼] 수사로 결판나는 대선, 민주주의의 퇴행이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은 2008년에 각본이 완성됐지만 “낯설고 난해하다”는 이유로 외면당했다. 황동혁 감독은 중앙일보 이지영 문화팀장과의 인터뷰에서 “10여 년 만에 이 말도 안 되는 살벌한 서바이벌이 어울리는 세상이 됐다”며 “슬프다”고 했다. ‘오징어 게임’은 각자도생, 승자독식의 절망적인 현실을 은유한 우울한 서사인 셈이다.
대장동 개발 의혹의 주역들은 일확천금을 노리고 뛰어든 불나방이었다. 그래서 원주민과 입주자에게 돌아가야 할 8000억원을 집어삼켰다. 전직 대법관·검찰총장·특검·청와대 민정수석이 사적 인연으로 투기세력과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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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주민·입주자 농락한 투기세력
기자와 법조인 ‘형님, 아우’라니…
저신뢰 국가라는 후진성의 증거
민초들은 더 이상 속지 않는다
」
프랜시스 후쿠야마 스탠퍼드대 교수는 1995년 저서 『트러스트(Trust)』에서 “신뢰는 거래비용을 줄여 경제적 효율성을 증대시킨다”고 했다. 경제의 핵심인 신뢰는 문화를 통해 구축된다고 설파했다. 따라서 “경제가 문화를 만든다”는 카를 마르크스가 아닌, “문화가 경제를 만든다”는 막스 웨버를 지지하는 사상가다. 그는 한국을 사회적 자본이 부족한 저신뢰 국가로 분류했다. 거의 한 세대가 지난 지금도 한국의 신뢰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투명한 공적 시스템이 아닌 음습한 사적 연고의 카르텔이 주도한 대장동 개발 의혹은 움직일 수 없는 후진성의 증거다.
전직 법조기자인 화천대유의 김만배 대주주는 고문으로 끌어들인 법조인들을 “친한 형님”이라고 불렀다.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불문율이 깨진 순간 양자(兩者)는 윤리가 아닌 깡패의 의리로 움직인다. 감시자와 피감시자의 경계가 무너지면 공익은 설 땅이 없다. 이러니 돈 없고 빽 없는 약자는 ‘오징어 게임’의 아수라장(阿修羅場)에 뛰어드는 것이다.
권순일 대법관은 2019년 이재명 후보가 공직선거법 위반 재판에서 무죄 선고를 받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대법원은 "표현의 자유가 제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그 생존에 필요한 ‘숨 쉴 공간’이 필요하다”고 무죄 이유를 밝혔다. 그래서 “친형을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려 했느냐”는 질문에 “그런 일이 없었다”며 ‘허위 사실’을 발언한 이 후보가 무죄가 됐다. 권 대법관은 2015년 다른 사건의 재판에선 정반대로 유죄 판결했다.
바로 그 ‘형님’ 권순일 대법관의 사무실을 ‘아우’ 김만배가 판결을 전후해 여덟 번이나 들락거렸다. 김만배는 권순일을 화천대유 고문으로 모셔가 매달 1500만원씩 주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의형제의 우정이다. 김만배의 누나는 검찰총장 후보자로 지명돼 청문회를 앞두고 있던 윤석열 후보의 부친 집을 19억원에 샀다. 당사자들은 결백을 주장하지만 민초들은 더 이상 속지 않을 것이다.
박근혜 정부 청와대 민정수석을 지낸 곽상도 의원의 아들이 자신을 “치밀하게 설계된 오징어 게임 속 말”이라고 했다. ‘아빠 찬스’로 화천대유에 취직해 6년 일하고 50억원을 받고 나온 사람이 할 소리는 아니다.
박완서의 소설 ‘도둑맞은 가난’은 모든 걸 가진 부자가 ‘가난’이라는 빈자(貧者)의 남루한 영역까지 침범한 악행을 비난하고 있다. 고아가 된 어린 여주인공은 월세와 연탄값을 아끼기 위해 멕기(도금) 공장에 다니는 상훈과 동거한다. 어느 날 상훈이 좋은 옷을 입고 나타나 실은 자신이 가난을 체험하러 온 부잣집 대학생이라고 고백한다. 홀로 남은 주인공은 독백한다. “내 방에는 이미 가난조차 없었다. 나는 상훈이가 가난을 훔쳐갔다는 걸 비로소 깨달았다. … 내 가난을, 내 가난의 의미를 무슨 수로 돌려받을 수 있을 것인가.” 가슴이 먹먹해진다. 저 무례한 자들에게 상처받은 민초들의 영혼은 누가 위로해야 하나.
이재명 후보는 대장동 개발에 대해 “설계는 내가 했다”고 했다. “5503억원을 시민의 이익으로 환수한 모범적인 공익사업”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경실련은 “국민 상대로 장사하고 민간 업자에게 부당이득을 안겨준 공공과 토건 사업자의 짬짜미 토건부패 사업”이라고 규정했다. 검경은 개발 모델을 설계하는 데 깊숙이 개입한 유동규 전 성남시도시개발공사 사장 직무대리와 화천대유의 결탁 의혹을 규명해야 한다.
과연 제대로 해낼 수 있을까. 금융분석원(FIU)은 올해 5월 화천대유의 수상한 자금 흐름을 파악하고 관련 자료를 넘겼지만 경찰은 다섯 달이 지나서야 김만배를 소환했다. 성남의뜰 초대 대표는 “몇천억원 갖고 쳐발라놨다. 대장동 수사가 되겠나. 이 상황이 무섭다”고 했다. 검경이 적당히 수습하려 한다면 모욕당한 민심은 부패 카르텔을 단숨에 뒤엎을 것이다.
한국의 대통령 선거는 투표장에서 내 손으로 도장 꾹 찍어 뽑고, 국가의 진로를 결정하는 민주주의의 경건한 제의(祭儀)다. ‘아빠 찬스’로 정계에 입문한 세습 의원을 민의가 아닌 파벌의 이해관계로 총리를 만드는 일본의 ‘호텔선거’와는 차원이 다르다. 그래서 한국은 근대화의 후발주자지만 민주주의는 더 잘하는 나라가 됐다. 그런데 이번 대선은 여야 1위 후보의 ‘화천대유’ ‘고발사주’에 대한 검경의 수사 결과로 결판날 수 있다. 한국 민주주의의 비극적 퇴행이다.
이하경 주필·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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