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수수께끼, 신라 향가를 해독한 최초의 인물 [세상과 도서관이 잊은 사람들]
[백창민, 이혜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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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은 일본에서 먼저 문을 연 '제국대학 도서관' 제도를 받아들여 운영했다. 직제와 조직도 제국대학 도서관 사례를 따랐다. 우리 대학도서관의 출발이, 일본 제국대학 도서관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도서관 설립 이후 경성제대는, 제국대학 부속도서관협의회 일원으로 책과 정보를 공유하고 협력했다.
도서관의 3요소인 건물, 장서, 사람에, 제도와 운영까지, 경성제대 부속도서관은 일본이 앞서 세운 다섯 개 제국대학 도서관을 전범으로 문을 열고 유지되었다. 해방 후 미군정에 의해 경성제국대학이 서울대학교로 바뀌면서, 부속도서관은 서울대 중앙도서관으로 이어졌다.
일제는 왜 오구라 신페이를 경성제국대학 초대 도서관장으로 임명했을까? 식민지 학술 지원기관인 경성제대의 성격에 비춰볼 때, 조선 관련 자료는 장서에서 중요한 영역을 차지했다. 오구라의 뛰어난 조선어 능력은, 도서관장 발탁의 주요 이유였을 것이다.
▲ 경성제국대학 부속 도서관 설계도 경성제대 부속도서관은 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에서 가장 규모가 큰 도서관이었다. 경성제대 부속도서관은 어디에 있었을까? 지금의 동숭동 마로니에공원 아르코예술극장과 공공일호(옛 샘터사옥) 자리에 있었다. 서울대가 관악캠퍼스로 이전하면서, 도서관은 철거되었다. 위쪽 도면이 북쪽에서 본 도서관 모습이고, 아래쪽 도면이 남쪽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
ⓒ 국가기록원 |
오구라 신페이는 1926년부터 1929년까지 3년 동안 경성제대 도서관장으로 일했다. 경성제대 부속도서관이 1,491평에 달하는 건물을 완공하고, 장서를 본격적으로 수집한 것도 그의 재임 기간에 이뤄졌다. 특히 경성제대는 1926년부터 1928년까지 도서관 장서 구입을 위해 대학 예산의 20%인 80만 엔을 지출했다.
오구라 신페이는 도서관장 재임 시절, 경성제대 부속도서관 설립과 운영의 초석을 놓았다. 이런 노력 속에 경성제대 부속도서관 장서는, 1932년 35만 권을 넘어섰다. 전폭적인 지원을 통해 경성제대 부속도서관은, 식민지 조선 최대의 도서관으로 부상했다. 이런 위상 덕분에 1935년 일본도서관협회는, 전국도서관대회를 조선총독부도서관이 아닌 경성제국대학에서 개최했다.
경성제대 부속도서관은 1926년 경성도서관연구회와 1931년 조선도서관연구회 창립과 운영을 주도했다. 이 땅 최초의 도서관 조직 결성도 경성제대 도서관이 이끈 것이다. 오구라 신페이는 도서관장을 그만둔 후에도 조선도서관연구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오구라 신페이의 경성제대 제자인 이재욱은, 해방 후 국립도서관(지금의 국립중앙도서관) 초대 관장이 되었다. 서울대 초대 도서관장이 된 김진섭은, 오구라 관장 시절에 경성제대 도서관 직원으로 근무했다. 도쿄제대 대학원 제자인 김수경은 김일성대 초대 도서관장을 거쳐, 북한 국가도서관인 인민대학습당에서 30년 동안 일했다. 해방 후 남북한 국가도서관과 최고 대학도서관의 수장이 오구라의 제자이거나 부하직원이었다.
경성제국대학은 1929년 5월 오구라 신페이 후임으로, 오타니 가즈마(大谷勝眞)를 임명했다.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은 오구라 신페이를 시작으로, 오타니 가즈마, 후나다 쿄지(船田享二), 다카기 이치노스케(高木市之助), 토리야마 기이치(鳥山喜一) 다섯 명의 관장이 거쳐 갔다.
오구라 신페이를 포함하여 모두 일본인이었다. 다섯 명의 경성제대 도서관장은 모두 도쿄제국대학 출신이다. 제국대학 네트워크 속에 도쿄제대 출신이, 경성제대 도서관장 자리를 독식했음을 알 수 있다. 경성제대는 초대 핫토리 우노키치(服部宇之吉)부터 7대 야마가 신지(山家信次)까지, 일곱 명의 총장 역시 모두 도쿄제대 출신이다.
도서관장뿐 아니라 경성제대 부속도서관의 사서관, 사서, 서기 같은 핵심인력은 모두 일본인이었다. 도서관의 의사결정과 운영은 일본인에 의해 이뤄졌다.
▲ 오구라 신페이 오구라는 ‘우리말’을 왜 연구했을까. 그는 이런 말을 남긴 바 있다. "나의 조선어 연구 동기는 조선어란 원래 어떤 언어인가, 즉 조선어가 어떤 구조를 가지며 주위 언어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밝히고 싶다는 생각해서 출발한 것이다." |
ⓒ <조선어 방언 사전>(한국문화사) |
오구라는 1927년에 신라 향가(鄕歌)와 이두(吏讀)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29년 오구라가 발간한 <향가 및 이두의 연구>(鄕歌及び吏讀の研究)는 다카하시 도루, 쓰치타 교손, 마에마 교사쿠, 양주동 같은 일본과 한국 학자에게 큰 자극을 줬고,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오구라는, 1935년 제국학사원(帝國學士院) 은사상(恩賜賞)을 받았다.
1933년 도쿄제국대학은 오구라를 문학부 언어학과 주임교수로 임명했다. 도쿄제대와 경성제대 교수를 겸임한 그는, 1년에 일정 기간씩 조선에 머물며 학생을 가르쳤다. 1930년대 이후 일제는 황국신민화 정책에 따라, 조선인에게 일본어 사용을 강제했다. 언어학자인 오구라는 이에 관해 어떤 입장이었을까? 그는 '각 언어에는 저마다 고유의 국민적 내지 민족정신이 깃들어 있다'라며 일본어 상용 정책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언어학자인 오구라가 '언어에 의한 동화'는 불가능하다고 바라본 것은 흥미롭다. 다만 그는 조선인이 일본말을 배우려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이해했다. 조선과 타이완에서 일본어 보급이 늘어나는 것은, 우수한 문화를 지닌 언어가 열등한 문화를 지닌 민족에게 저절로 흘러드는 현상으로 해석했다.
오구라는 향가와 이두를 체계적으로 해독한, 최초의 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1923년 아유가이 후사노신이 <서동요>, <처용가>, <풍요> 3편을 해독한 연구를 바탕으로, 신라 향가 25수 전체를 처음으로 해독했다. 천년 동안 해독하지 못한 향가의 수수께끼가, 오구라 신페이에 의해 풀린 것이다. 그는 향가 25수 주해와 함께, 향가 형식과 이두 해독 방법을 제시했다.
도남(陶南) 조윤제(趙潤濟)는 "향가 문학이 성립함으로써 국문학은 비로소 형성되었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 오구라 신페이는 향가가 한자를 빌려 '우리말'을 표기한 문학이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오구라의 향가 해독이, 우리 국문학 분야에서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지 알 수 있다.
오구라의 향가 연구와 관련하여, 함께 언급할 사람이 무애(无涯) 양주동(梁柱東)이다. '국보'를 자처한 그는 이런 말을 남기기도 했다.
"우리나라 재주를 통틀어 10섬이라고 하면 6섬은 이광수가 가졌고, 1섬은 내가 갖고 있으며, 나머지 3섬은 삼천만 국민이 나눠 가졌다."
그가 인간 '국보'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릴 수 있으나, 양주동이 '신동'과 '천재', '기인'으로 불린 것만은 틀림없다. 1903년 경기도 개성에서 태어난 양주동은, 1920년 서울 중동학교에 입학, 전 과정을 1년 만에 마쳤다. 그 후 1921년 와세다대학 불문과에 입학했다.
와세다 시절인 1923년 11월 양주동은 손진태, 이장희와 함께 한국 최초의 시 문학잡지 <금성>을 발간했다. 손진태는 훗날 보성전문학교 도서관장을 지내고, 이장희는 국립도서관 초대 관장 이재욱의 삼촌이다. 영문과로 전공을 바꾼 양주동은, 1928년 와세다를 졸업하고 평양 숭실전문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쳤다.
▲ 무애 양주동 황해도 장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양주동이 자신을 ‘해서 천재’로 칭한 것은 이 때문이다. ‘해서 천재’ 무애는 오구라의 향가 연구 저작을 읽고나서, ‘장기판을 패어서 불 때고, 영미 문학서는 궤 속에 집어넣어 두고, 자신이 즐기는 심야에 독작하는 술도 삼분의 일 쯤으로 줄이고’ 향가 연구에 몰두했다. |
ⓒ <외국문학연구회와 해외문학>(소명출판) |
어느 날 양주동은 교수로 재직하던 숭실전문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한 권 발견했다. 책을 살펴본 그는 충격과 경악에 휩싸였다. 조선인이 아닌 일본인이 신라 향가 25수를 최초로 해석한 책을 펴냈기 때문이다. 양주동을 충격에 빠뜨린 책은, 오구라 신페이의 <향가 및 이두의 연구>였다. 양주동은 오구라 책을 처음 읽었을 때의 충격을 회고로 남긴 바 있다.
"나로 하여금 국문학 고전 연구에 발심(發心)을 지어준 것은 일본인 (조선)어학자 오구라 신페이 씨의 <향가 및 이두의 연구>란 저서가 그것이었다. <문예공론>을 폐간하고 심심하던 차 우연히 어느 날 학교(숭실전문학교) 도서관에 들렸더니, 새로 간행된 <경성제국대학 기요(紀要) 제1권>이란 어마어마한 부제가 붙은 방대한 책이 와 있다. 빌려다가 처음은 호기심으로, 차차 경이와 감탄의 눈으로써 하룻밤 사이에 그것을 통독하고 나서, 나는 참으로 글자 그대로 경탄하였고, 한편으로 비분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천년 동안 아무도 해독하지 못한 향가를, 일본인이 처음으로 풀었다는 점에 양주동은 비분강개를 느꼈다. 국문학자도 아닌 그는, 왜 오구라 책을 읽고 분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을까? 양주동은 <문주반생기>에 그 사정을 자세히 남겼다.
"첫째, 우리 문학의 가장 오랜 유산, 더구나 우리 문화 내지 사상의 현존 최고(最古) 원류가 되는 이 귀중한 '향가'의 해독을 근천년래 아무도 우리의 손으로 시험치 못하고 외인의 손을 빌었다는 그 민족적 '부끄러움', 둘째, 나는 이 사실을 통하여 한 민족이 '다만 총, 칼에 의해서만 망하는 것이 아님'을 문득 느끼는 동시에 우리의 문화가 언어와 학문에 있어서까지 완전히 저들에게 빼앗겨 있다는 사실을 통절히 깨달아, 내가 혁명가가 못 되어, 총, 칼을 들고 저들에게 대들지는 못하나마 어려서부터 학문과 문자에는 약간의 천분(天分)이 있고 맘속 깊이 '원'(願)도 '열'(熱)도 있는 터이니 그것을 무기로 하여 그 빼앗긴 문화유산을 학문적으로나마 결사적으로 전취, 탈환해야 하겠다는 내 딴에 사뭇 비장한 발원과 결의를 했다."
그때부터 양주동은 향가 연구에 착수했다. 연구 과정에서 양주동은, 향가 25수를 안방부터 화장실까지 집안 곳곳에 붙여 놓고 해석에 골몰했다고 한다. 연구에 몰두한 끝에 양주동은, 1937년 <향가 해독, 특히 원앙생가에 취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1942년 양주동은 조선인 최초로 향가 25수를 해독한 <조선고가연구>를 출간했다. <조선고가연구>는 <여요전주>와 함께, 양주동 스스로 자신의 대표작이라 일컬은 책이다. 오구라 신페이의 연구를 뛰어넘은 양주동의 향가 연구서는 이렇게 탄생했다. 육당 최남선은 양주동의 연구에 대해 이런 찬사를 남기기도 했다.
"해방 전후에 출간된 학적(學的) 저서로 후세에 전할 만한 것은, 오직 양모(梁某)의 <조선고가연구>가 있을 뿐."
양주동의 뛰어난 업적도 경성제대 초대 도서관장 오구라 신페이의 선행 연구에 도움받은 바가 적지 않다. 양주동의 향가 연구가 '오구라의 방법론을 충실히 계승해서 오구라의 연구를 보완했다'라는 평이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숭실전문학교 폐교 후 양주동과 경신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던 고병려 교수에 따르면, 양주동은 방학 내내 경신학교 도서실에 드나들며 <조선고가연구>를 집필했다고 한다. 양주동의 향가 연구가 '도서관'에서 촉발되고 탄생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도서관장이 출간한 책을 이용자가 도서관 통해 읽고, 더 뛰어난 책을 도서관에서 집필한 이야기인 셈이다.
▲ 도쿄대학교 종합도서관 도쿄대학교는 혼고, 코마바, 가시와 3개 캠퍼스로 이뤄져 있다. 캠퍼스마다 소고(綜合)도서관, 고마바(駒場)도서관, 가시와(柏)도서관이 있다. 중심이 되는 종합도서관 외에 단과대와 연구소별로 32개 부국(部局)도서관을 두고 있다. 사진은 도쿄대 혼고캠퍼스의 소고도서관이다. |
ⓒ Wikimedia |
오구라는 고대 우리말과 방언 같은 연구를 통해, 우리 국어학 발전에 기여했다. 1943년 오구라는 업적을 인정받아, 조선총독부로부터 조선문화공로상을 받았다. 1943년 정년퇴임한 그는, 1년 후인 1944년 2월 8일 세상을 떠났다.
조선총독부 관료와 경성제국대학 교수로, 오구라는 식민 지배를 학술적으로 뒷받침했다. 동시에 그는 남다른 열정과 성실함으로, 우리 향가와 방언 연구에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그가 아니더라도 일제 식민통치에서 오구라가 담당했던 몫은 누군가 감당했을 것이다. 다만 오구라가 아니었어도, 우리말 연구에서 그가 이룬 성취를 누군가 대신했을 것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이 점이 오구라가 남다른 평가를 받는 대목일 것이다. 오늘날 향가 분야에서 오구라는 그리 언급되지 않는다. 그만큼 우리의 향가 연구가 깊어졌기 때문이다.
도서관 분야는 어떨까? 우리 근대도서관은 일제강점기에 틀이 놓였다. 일본의 '제국대학 도서관' 제도를 통해 탄생한 우리 대학도서관은, 해방 후 미국식 문헌정보학을 받아들이면서 이식에 이식을 거듭했다. 일제강점기에는 강제적 '이식' 단계였고, 해방 직후에는 미국의 강력한 영향 속에 강제에 가까운 '모방' 과정을 거쳤다.
유럽과 사회주의권, 제3세계 도서관 제도는 검토 대상이 아니었다. 이런 일률적인 이식과 모방, 변용을 거쳐, 한국 대학도서관은 탄생했고 오늘에 이르렀다. 이 여정의 출발점과 꼭짓점에 자리한 인물이, 바로 오구라 신페이다.
국문학 분야에서 오구라 신페이는 '찬사'의 대상인 동시에 '극복'의 대상이었다. 우리 도서관 분야에서도 마찬가지 아닐까. 1926년 오구라 신페이와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으로부터 출발한 한국 대학도서관은, 일본과 미국식 도서관에서 얼마나 '탈피'했을까? 우리 학문의 종속성과 독자성에 대한 질문만큼, 우리 도서관 역시 이 질문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극복할 도서관 식민 잔재는 '칸막이 열람실'뿐인 걸까? 도서관 제도를 '이식'했다는 점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이식한 제도를 해방 후 70년이 넘도록 관성으로 '유지'한다는 점이 부끄러운 것은 아닐까? 생각 없이 살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마련이다. '우리의 도서관'에 대한 화두를 붙들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까지나 '그들의 도서관'에 머물 것이다.
오구라 신페이가 사망한 후 그의 문헌과 각종 자료는, 그가 배우고 학생을 가르친 도쿄제국대학에 기증되었다. 도쿄대학교 문학부의 '오구라문고'(小倉文庫)는 이렇게 탄생했다. 그가 우리말을 연구하며 남긴 문헌과 자료는, 국문학 분야 대표적인 장서로 알려져 있다. 도서관장이었던 오구라의 장서는, 그가 세상을 떠난 후 거대한 '도서관의 일부'가 되었다. 그가 우리 도서관 '역사의 일부'가 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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