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청년기자단] 의심하고 실패하며 공감을 넓히는 채식
정의(正義)는 내 일상과 분리된 무결함이라고 생각했었다. 채식 실천을 미루기만 했던 이유 중 하나는 ‘완벽히’ 동물성 식품을 끊고 ‘대단한’ 비건을 해낼 자신이 없었다. 돌이켜 보니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나 자신을 단정 짓고 있었다.
따져 보면 내가 무엇을 먹을지 선택하는 일에 불과했다. 선택을 바꾼다는 것은 불편하지만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우유가 아닌 두유를 마시고 베이컨 대신 버섯을 선택했다. 그렇지만 마냥 쉬운 일은 아니었다. 습관적으로 소고기가 들어간 쌀국수를 주문하고 ‘고기는 빼주세요’라는 요청사항은 걸핏하면 까먹었다. 외식을 하는 경우에 육수, 소스까지 고려한다면 선택지는 전멸이었다. ‘이게 이렇게까지 어려워야 하는 일인가?’하는 배신감과 ‘알면서도 제대로 해내고 있지 않다’는 배덕감이 공존했다. 모든 나의 행동과 끼니는 평가대에 올라 성공 혹은 실패의 판결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때마다 ‘완벽한 원칙주의자 1명 보다 10명의 불완전한 실천’을 떠올렸다.
음식은 나에게 중요하지만 반대로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고루고루 끼니를 챙겨 먹는 것은 당연히 중요하지만 꼭 고기를 먹지 않아도 되는 거였다. 진정한 의미에서 ‘맛있는’ 음식이 무엇인지 반추해 보았다. 자극적이고 쾌락적인 맛이 정말 ‘맛있다’라고 할 수 있을까. 자극적이고 쾌락적인 맛은 순간만 있을 뿐 이후에는 공허했다. 식사에는 음식을 먹는 순간 느껴지는 맛만 존재하지 않는다. 음식을 먹기 위해 고민하는 과정, 먹고 난 후의 만족감까지 식사의 과정에 포함되어야 한다. 한 끼에 동물의 희생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머리에 열을 내며 고민하고 그렇게 한 끼를 먹고 난 후의 만족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어쩌면 채식 실천조차도 나 자신을 위한 이기적인 행동이라는 생각을 한다.
비단 고기뿐 아니라 우리 눈앞에 놓이는 상품들은 군침 돌도록 예쁜 포장지를 입고 나타난다. 타자를, 물건을 들여다보지 않는다면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가늠하기 어렵다. ‘예쁘다’는 불편하지 않다는 뜻이고 이는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앎은 불편함을 동반하고 판단을 어렵게 만든다. 가장 쉬운 방법은 무지한 채로 외면하면서 나의 일상만을 꾸려가면 된다.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음식을 먹고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모르는 물건을 사용하면서.
믿고 싶은 진실은 굳게 믿어버리지만 정작 자신이 먹고 있는 음식이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채식이 영양적으로 어떻게 구성되는지, 육식은 영양적으로 어떤 이점과 단점이 있는지 잘 알지 못하지만 다들 그렇다길래 그렇게 믿을 뿐이다. 무엇을 먹는지 집착하지만 왜 먹는지는 자세히 알려고 하지 않는다. 비닐봉지가 편해서 사용하지만 잠깐의 사용 이후 어디로 버려지는지 신경 쓰지 않는다. 자신의 눈앞에서 현현하는 순간만 존재할 뿐 이전과 이후는 안중에 두지 않는 것이다.
진실이라고 믿는 것들을 얼마나 관습적으로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인가 돌이켜 봐야 한다. 과거엔 담배 광고에 의사, 운동선수가 등장해 담배가 건강과 운동능력에 도움이 된다는 마케팅이 가능했다. 간접흡연은 유해한 것이 아니었고 실내 흡연은 가능했다. 지금 보면 너무나 허무맹랑하지만 그땐 그것이 당연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부정할 필요는 없지만 의심 없이 믿는 것은 위험하다.
나는 여전히 실패하고 가끔 성공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히 확장이 일어나고 있다. 음식뿐 아니라 다른 물건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학살이나 착취가 일어나지는 않았는지, 이 물건을 쓰고 난 후 어떤 과정이 일어나는지. 나의 쾌락만을 생각하지 않고 다른 생명체의 고통도 생각하면서 선택하고 있다. 공감의 면적을 넓히는 과정에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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