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게임' 기훈은 해고노동자..모티브된 '쌍용차 사태'는
당시 해고노동자 이창근씨 "커다란 위로..감독에 감사"
11년 만에 일단락..지난 4월 또 다시 법정관리 들어가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주인공 기훈(이정재 분)은 16년차 해고 노동자다. 그는 자동차 회사인 ‘드래곤 모터스’ 사측의 구조조정에 맞서 파업에 참여하지만 끝내 해고됐다. 이후 통닭집을 차리거나 대리운전 기사로 일하며 생계를 이어오다 파업 진압 과정에서 동료가 경찰에게 맞아 사망하는 모습을 목격한 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트라우마)에 시달린다. 극중 기훈은 파업 참가 이유에 대해 “회사는 자기들이 망쳐놓고 우리보고 책임지라는데 화가 났다”고 했다.
기훈의 사연에 기시감이 드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바로 십여년 전 우리 사회를 뒤흔들었던 ‘쌍용자동차(쌍용차) 정리해고 사태’에서 모티브를 따왔기 때문이다. 드라마의 각본과 연출을 맡은 황동혁 감독은 지난 28일 기자회견에서 “구조조정에 따른 대량해고와 파업, 이어지는 소송과 복직투쟁, 해고자 및 가족들의 극단적 선택까지 뉴스로 접하고 있었다”며 “중산층이던 평범한 노동자도 해고와 자영업 실패로 가장 밑바닥까지 떨어질 수 있고, (이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걸 기훈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기훈 역을 맡았던 배우 이정재도 29일 인터뷰에서 “기훈이 아픈 과거가 있는 상태에서 이후 다른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어머니랑 살며 대리운전을 하는 사람으로 나오는데 그런 현실로 만들어놓은 게 개인적으로 마음이 무겁다”며 “극 중 게임을 하면서 트라우마로 고통받는 장면을 찍을 때 개인적으로도 슬펐다”고 털어놓았다.
당시 쌍용차에서 실제로 해고됐던 노동자 이창근씨는 페이스북에 “커다란 위로를 받은 느낌”이라며 “감독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고 글을 올렸다.
‘오징어게임’에서 로봇을 연상시키는 방호복과 곤봉으로 무장한 경찰이 파업 참가자를 구타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2008~2009년 한국 사회의 주요 이슈로 당시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됐던 쌍용차 사태를 연상시킨다. 민주화 이후 대규모 거리시위를 보지 못했던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이 장면이 미얀마와 홍콩을 연상시킨다며 “한국에서 벌어졌던 일이 맞느냐”는 반응도 나온다. 대체 당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쌍용차 사태는 2008년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금융위기는 경영상 어려움을 겪던 쌍용차를 코너로 몰아넣었고, 쌍용차의 대주주였던 중국 상하이자동차는 2009년 1월 쌍용차에 대해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법원이 회사의 회생을 위해 대규모 구조조정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자, 쌍용차는 같은 해 4월 전체 임직원의 약 36%인 2646명을 정리해고하기로 했다. 이에 반발한 노조원들은 5월 21일 경기 평택공장을 점거하고 이른바 ‘옥쇄 파업’에 돌입했다. 이 파업은 77일간 계속됐다.
당시 경찰은 파업을 강제해산하는 과정에서 헬기와 경찰특공대를 동원했다. 테이저건, 다목적발사기 등 대테러 작전에 사용되는 장비까지 총동원해 과잉 진압 논란이 불거졌다. 노조 측의 저항 또한 거셌고, 이 과정에서 경찰관 100여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 와중에 약 1700명이 명예퇴직 등으로 회사를 떠났다. 파업 기간을 끝까지 견딘 970여명은 무급휴직과 명예퇴직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454명이 무급휴직에 들어갔고, 나머지는 명예퇴직했다. 하지만 노조 집행부를 중심으로 165명은 두 선택지 모두 거부하고 해고자가 되는 길을 택했다.
쌍용차의 정리해고를 둘러싼 다툼은 법정으로도 이어졌다. 쌍용차 해고 노동자 153명이 ‘해고무효 확인 소송’을 낸 것이다.
1심 재판부는 사측의 정리해고가 유효하다고 판단했지만, 사측의 ‘회계 부정’ 정황이 나온 2심에서 상황이 반전됐다. 2심 재판부는 회사 측과 회계법인이 작성한 제무제표, 회계감사보고서 등에서 유형자산 손상차손(유형자산의 경제 가치 하락 등으로 미래에 발생할 것으로 예측되는 손실)이 과다하게 책정돼 위험이 부풀려졌고, 일부 차종의 예상 판매량도 과소 계상되는 등 회사가 의도적으로 기업 가치를 축소시켜 ‘정리해고’의 법적 요건을 맞췄다며 해고가 부적법하다고 판시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미래 경영상황 추정에는 불확실성이 존재할 수밖에 없으므로 회사의 예상 매출 추정이 다소 보수적으로 이뤄졌다 하더라도 합리성을 인정할 수 있다”며 사측의 손을 들어줬다. 회계 부정 의혹이 제기된 감사보고서의 내용은 신차 출시 여부가 불확실하고 기존 차종의 경쟁력이 약화된 상태를 감안한 것이므로 문제가 없다는 취지다.
이후에도 노조는 서울 대한문 앞 천막 등에서 기나긴 싸움을 이어갔다. 하지만 복직은 쉽게 이뤄지지 않았고 그동안 해고자와 그 가족, 협력업체 노동자 등 30명이 암담한 현실에 극단적 선택을 하면서 세상을 등졌다.
실제로 쌍용차 사태를 겪은 이들은 우울 증상을 겪는 비율과 자살 위험성이 매우 높았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 2018년 쌍용차 해고노동자 심리치유센터 ‘와락’과 함께 쌍용차 해고자와 복직자 각 89명(총 178명)과 그 배우자 66명을 대상으로 건강상태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다. 조사 결과, 해고자와 복직자 중 지난 1주일간 우울 증상을 겪은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한 비율은 각각 89.3%와 62.5%로 나왔다. 이는 2017년 한국복지패널 조사에 참여한 일반 인구와 비교해 각각 13.37배, 9.36배 높은 수치다.
가족의 자살 위험성도 일반인에 비해 크게 높았다. 지난 1년간 진지하게 자살을 생각해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해고자의 배우자 48.0%, 복직자의 배우자 20.6%가 ‘그렇다’고 답했다. 이는 2013년~2015년 국민건강영양조사에 참여한 일반 여성의 ‘지난 1년간 자살생각 유병률’ 5.7%에 비해 각각 8.67배와 3.72배 높은 수준이다.
사태는 11년 만에야 일단락됐다. 경영 사정이 나아진 쌍용차는 2013년 무급휴직자 454명을 전원 복직시켰고, 이후 해고자와 희망퇴직자 등도 순차 복직됐다. 2018년 9월엔 대통령 직속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중재로 전원 복직이 합의됐으며, 지난해 5월 마지막 남은 47명까지 최종 복직했다.
쌍용차는 지난 2010년 인도 마힌드라에 인수되며 기업회생절차가 종료됐고 티볼리 등 일부 차종의 인기에 힘입어 실적이 개선되는 등 활로를 찾는 듯했다.
하지만 마힌드라가 인수 당시 약속했던 투자 이행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흑자 전환을 통한 경영 정상화도 이뤄내지 못하면서 지난 4월 15일 다시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이에 따라 쌍용차 노동자들의 고용도 다시 위태로워졌다. 쌍용차 문제가 완전히 해결됐다고 보기 어려운 이유다.
이런 상황에서 쌍용차는 이번 달 우선협상대상자를 선정하며 새로운 주인을 찾기 위한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 인수전에 뛰어든 곳은 이엘비앤티 컨소시엄과 에디슨모터스 컨소시엄이다. 당초 인수의향서를 제출했던 미국의 전기차업체 인디EV는 1일 본입찰을 포기했다. 서울회생법원이 에디슨모터스 컨소시엄, 이엘비앤티 컨소시엄에 대해 “입찰 서류를 재보완해달라”고 요청하면서 이달 중순으로 예정됐던 우선협상대상자 선정도 다소 늦춰질 것으로 보인다.
안명진 기자 amj@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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