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목희의 호모폴리티쿠스] 선택의 중요 잣대, 이너서클

2021. 10. 1.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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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목희 아시아경제 전문위원

언론인으로 가장 부끄러웠던 기억은 최순실(최서원으로 개명) 사건이었다. 최씨를 은둔형 박근혜 전 대통령의 말벗 정도로 생각했다. 최씨 남편이었던 정윤회. 그를 수장으로 하는 문고리 3인방이 센줄 알았다. 나중에 보니 3인방도, 어떤 친박 실세도 최씨에게는 어림없었다. 경찰 정보통 출신 청와대 행정관 박관천씨가 역사에 남을 보고서를 썼다. '청와대 서열 1위는 최순실, 2위 정윤회, 3위 박근혜'.

최씨 사건은 기자로서 무능했음을 뼈저리게 느끼게 한 경험이었다. 스스로 위안해 보기도 했다. 박근혜 정권의 청와대 비서실장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비서실장은 온갖 정보가 몰리는 자리다. 비서실장 출신 A씨의 고백. "최순실이라는 존재를 어렴풋이 알았지만 실체를 정말 몰랐다"고 했다. 역시 비서실장을 지낸 B씨는 A씨보다는 상황을 파악한 듯했다. 하지만 B씨 역시 신중했다. "최씨 부분은 건드리기 어려운 역린이라고 생각, 구체적 정보를 일부러 멀리 했다"고 고백했다.

퇴임 직후의 김영삼(YS) 전 대통령을 만난 적이 있다. YS는 분한 마음을 토로했다. 이유는 임기말 터진 아들 현철씨 사건.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자존심을 가진 YS. 그에게는 현철씨가 그렇듯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는 게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YS는 현철씨에게 큰 직함을 주지 않았다. 바로 곁에 두고 정책, 인사를 일일이 묻지도 않았다. 현철씨에게 힘이 쏠린 것은 동숭동팀을 비롯한 이너서클 때문이었다. 핵심요직을 현철씨 계보가 장악했다.

청와대의 정무, 민정 라인과 정보기관, 집권여당까지 이너서클이 포진하고 있었다. 일관된 보고가 올라오는데 대통령인들 다른 판단을 하기 어려웠다. 당시 이너서클에 끼지 못한 청와대 비서실장 C씨는 정무, 민정쪽은 손을 놓다시피했다. 경제와 외교안보만을 챙겼다. 고인이 된 김광일씨가 비서실장이 된 뒤 상황이 묘해졌다. 정무쪽을 건드리면서 이너서클과 부딪혔다. 김 전 비서실장은 사석에서 "정보기관이 비서실장인 나까지 도청하는 것 같다"고 한탄했다.

다른 정권에서도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이너서클의 힘은 강했다. 비서실장, 수석, 장관. 자리의 높낮이가 권력의 강도를 결정하지 못했다. 일개 행정관이라도 이너서클에 끼면 힘이 셌다. ‘왕행정관’으로 불리는 이가 있었다. '왕행정관'이 각 수석실, 여당, 정부 부처의 실력자들을 종횡으로 엮으면서 영향력을 발휘했다.

더불어민주당의 송영길 대표가 지난 7월 문재인 정권의 이너서클을 향해 일침을 날렸다. 관훈토론회에서 청와대의 인사와 민정 라인을 비판했다. 이너서클 출신에 대한 검증이 너무 느슨해 인사 참사가 이어지고 있다고 일갈했다. 현 정권 초기, 야당은 문재인 대통령이 친북좌파에 둘러싸여 있다고 공격했다. 돌이켜 보면 그런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나 친문 세력은 분명히 존재했다. 부엉이모임, 광흥창팀 등. 알려진 그룹 외의 비선 존재가 나중에 드러날 수도 있다.

지금의 대선주자 캠프도 벌써 이너서클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쪽은 '성남 라인'의 독주 지적이 나온다. 성남 지역에서 변호사를 하던 때, 그리고 시장 시절부터 끈끈한 연을 맺어온 이들이 성골이다. 이어 '경기 라인'이다. 경기도정을 다루면서 친해진 이들이 진골에 속한다. 나머지 합류자는 6두품이다.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는 검찰총장 시절부터 '윤석열 사단'을 이끌고 있다고 비판받았다. 정치 입문 후 검사 출신을 앞세우지 않고 있다. 특정인에게 힘이 쏠린다는 인상 역시 주지 않으려 노력하는 눈치다. 그러다 보니 일사불란함이 떨어져 보이기도 한다.

이너서클이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건전하게, 정상적으로 작동되면 효용성이 있다. 관료사회의 경직성을 깨는데도 일조한다. 하지만 소수 집단이 나라를 좌우하다 보면 문제가 생긴다. 그들만의 세계에 갇혀 객관성을 잃기 십상이다. 권력집중은 부패를 낳는다. 다소 효율이 떨어지더라도 민주적 제도화를 추구해온 배경이다.

이너서클이 과도하게 작동하면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린다. 당선을 위해서는 충성과 열의를 가진 세력이 필요하다. 집권 후는 다르다. 답답하더라도 제도를 중시해야 한다. 때문에 유권자들은 단순히 후보의 품성과 자질을 따져 보아서는 나중에 후회하게 된다.

그를 둘러싼 세력은 어떤가. 후보 자신은 대통령이 된 후 이너서클에 휘둘리지 않을 절제력이 있는가. 이때도 진정성이 중요하다. 김대중 정권이 출범하면서 동교동 실세들은 정부 공직을 맡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막후 영향력을 발휘했다. 최고 권력자가 대단히 모질지 않으면 이너서클과 비선은 깨지지 않는다.

2012년 대선 과정에서 최순실의 실체를 기자들이 분명히 취재했더라면 어땠을까.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 국민들에게 알려야 했다. 그랬다면 정치사의 굴곡이 덜했다고 본다. 박 전 대통령도 말년의 망신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타산지석이 되어야 한다.

기자들도, 유권자들도 소명의식을 갖고 후보 주변을 면밀히 살펴야 한다. 벌써 몇몇 후보 진영을 향해 부정부패 의혹, 불법·탈법 의혹이 제기된다. 이를 단순 사건으로 보지 말고 인적 배경까지 밝혀내야 한다. 제도를 무시한 이너서클은 인사참사에 이어 부정부패와 반드시 연결된다는 게 역사의 교훈이다.

이너서클이 핵심 정보를 독점하면 이권이 눈 앞에 펼쳐진다. 행정 집행 부서는 물론, 정보기관과 사정기관까지 이너서클이 장악하고 있으면 통제불능이다. 정권이 끝난 후 "조금 자제하고 조심할걸"하고 참회하는 인사들을 여럿 보았다. 합리적으로 엮이지 않은 이너서클은 대선 과정에서 미리 걸러져야 한다. 이번에는 견제와 균형이 제대로 작동하는 정권이 탄생하길 바란다.

이목희 아시아경제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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