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언의 '더 모닝'] '뭣도 모르는' 사람들이 지켜주는 우리의 자유

이상언 2021. 10. 1.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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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언론중재법 개정안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언론중재법 개정 반대 시위에 등장한 피켓. [뉴스1]


‘개정 법률안은 비판 언론을 침묵시키고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전통을 훼손시킬 우려가 있다. 이런 유형의 규제는 권위주의적인 정권들에 의해 조장됐으며, 정치ㆍ경제 권력에 대한 비판을 잠재우는 데 사용되는 편리한 수단이었다. -세계신문협회(WAN-IFRA).

‘개정안은 자의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으며 언론에 압력을 가하는 도구로 쓰일 수 있다. 민감한 사안에 대한 법원의 결정은 주관적일 수 있기 때문에 입법자들은 충분한 제도적 장치를 보장하지 않은 상태에서 결코 새로운 법을 만들어선 안 된다.’ -국경 없는 기자회(RSF).

‘IPI 회원들은 독립적 언론을 방해할 몇몇 새로운 법과 규제 조치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한다. 여기에는 한국에서 발의된, 이른바 허위보도에 대해 언론사에 징벌적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도록 한 ‘가짜뉴스 법’과 언론에 대한 국가 통제를 급격히 확대하는 파키스탄의 법안이 포함된다. IPI는 이 두 조치 모두를 철회할 것을 요구한다.’ -국제언론인협회(IPI).

‘이 법안은 ‘가짜뉴스’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 법안은 부정확한 보도에 과도하게 징계를 해 한국 언론인들 사이에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위협을 가하고 있다.’ -국제기자연맹(IFJ).

‘언론중재법 개정 움직임으로 인해 그간 대한민국이 쌓아 올린 국제적 이미지와 자유로운 언론 환경이 후퇴하게 될 위험에 빠지게 됐다.’ -서울외신기자클럽(SFCC).

‘개정안의 모호한 문구와 언론사에 대한 불균형적인 손해배상 규정은 비판적 보도와 소신 발언, 소수 의견 보도 등에 대한 표현을 제한할 수 있고, 언론사들은 자기검열을 통해 소송 유발 가능성이 있는 보도를 피해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릴 수 있다. 이 법안은 정치인들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보도에 대해 보복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여 비판적 보도를 크게 위축시킬 수 있다.’ -휴먼라이츠워치(HRW).

‘표현의 자유는 인권옹호자들이 활동하기 위한 환경을 조성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요소다. 과도한 징벌적 배상을 부과하는 것은 인권옹호자들의 활동을 위축시키는 효과를 가져오고, 인권옹호자들이 재정적인 처벌을 당할 것을 우려하여 인권유린을 드러내는 것을 주저하게 만들 수 있다.’ -매리 롤로(Mary Lawlor) 유엔 인권옹호자 특별보고관.

‘한국을 그동안 언론 자유의 ‘롤 모델’로 삼은 많은 다른 국가에 잘못된 메시지를 줄 수 있다. 시민의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ICCPR) 제19조에 의견과 표현의 자유를 존중하고 보호할 의무가 명시돼 있다.’ -아이린 칸(Irene Khan) 유엔 인권특별보고관.

지금까지 나온 국제 언론ㆍ인권 단체 및 기구의 ‘언론중재 및 피해구제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에 대한 비판의 핵심을 모아 봤습니다. ‘뭣도 모르고’(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말에서 유래된 표현, 본인은 ‘뭐 또 모르고’를 기자들이 잘못 들었다고 합니다) 나선 단체와 사람이 이처럼 많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23일 미국 방문을 마치고 귀국하는 비행기에서 “언론이나 시민단체, 국제사회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검토될 필요가 있다”고 입장을 밝힌 뒤 여당의 법안 강행 처리 기조가 뒤집어졌습니다. 올해 말까지 국회가 ‘특위’를 운영한 뒤 내년에 법안 처리를 다시 논의하는 것으로 여야 합의가 이뤄졌습니다. 그동안 정부와 여당이 원하는 법안은 언론이나 시민단체가 반대해도 고집을 꺾지 않고 국회에서 통과시켰습니다. 이 법안이 다른 길을 걷게 된 것은 ‘국제사회에서 문제를 제기’라는 특별한 사정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나마 다행이지만 한편으론 우리의 인권과 시민의 자유가 그 ‘뭣도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 지탱이 되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국제기구의 감시와 비판 덕에 인권유린의 고통을 덜 수 있었던 군사독재 시절이 오버랩됩니다.

중앙일보 사설이 이 법안 폐기를 요구합니다. 후퇴할 때를 아는 것도 장수가 갖춰야 할 덕목입니다.

■ ‘언론징벌법’ 연기 아니라 폐기가 답이다

윤호중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와 김기현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29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박병석 국회의장 주재로 열린 언론중재법 관련 여야 원내대표 회동을 마친 뒤 합의문을 발표하고 있다. 임현동 기자

연말까지 특위서 논의키로 했으나 명분 없어
여당 강경파, 국회의장에 “특단 조치” 협박도
숱한 논란을 낳았던 ‘언론중재 및 피해구제 등에 관한 법률’(언론중재법) 개정안의 정기국회 내 처리가 사실상 무산됐다. 그제 더불어민주당이 강행 처리 방침을 접고 국회에 언론미디어제도개선 특별위원회를 꾸려 연말까지 논의하기로 국민의힘과 합의했기 때문이다. 여러 독소조항 때문에 ‘언론재갈법’ ‘언론징벌법’으로 불린 해당 법안이 국회 본회의에 상정되지 않고 연기된 것은 다행이다. 앞으로 여야는 동수로 참여하는 특위에서 언론제도 전반에 대한 개선 방안을 논의할 계획이라고 한다. 하지만 언론중재법의 독소조항은 여야 합의 가능성이 거의 없어 폐기 수순에 돌입했다는 시각이 많다.

당초 민주당이 추진한 법안 자체에 언론의 자유를 위축시킬 요소가 많았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은 당연하다. 징벌적 손해배상과 기사열람 차단 청구권 등 문제 조항에 대해 국내 모든 언론 단체는 물론이고 세계신문협회(WAN)와 국제언론인협회(IPI), 국경없는기자회 등 해외 언론 단체까지 잇따라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가 정부에 우려 서한을 보냈을 뿐만 아니라 정부 기구인 국가인권위원회도 헌법상 언론의 자유를 위축시킬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비판 여론을 의식한 민주당이 뒤늦게 야당과 협상 과정에서 개정안을 내밀었지만 오히려 개악을 했다는 비판만 더해졌을 뿐이다.

민주당 지도부가 강행 처리를 포기하는 과정에서 당내 강경파가 반발하며 보인 태도는 볼썽사납다. 박병석 국회의장이 본회의 상정을 미루면서 여야 합의를 주문하자 정청래 의원 등 30여 명은 “의원들의 뜻을 모아 특단의 조치를 하겠다”고 목청을 높였다. 국회법상 의장의 고유 권한임에도 ‘특단의 조치’ 운운하자 국회 관계자들 사이에서 “귀를 의심했다”는 반응이 나왔다. 어제도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이 페이스북에 “여당이 언론과 야당의 협박에 굴복한 것”이라는 주장을 올렸다. 당원 게시판 등에는 박 의장 등을 비난하는 글이 게재됐다.

민주당발 언론중재법은 정기국회와 특위가 끝난 후인 내년에도 재추진돼선 안 된다. 국제사회와 국제기구까지 반대하는 위헌적 조항이 담긴 만큼 처리 연기가 아니라 폐기하는 게 마땅하다. 야당에선 여당 대선후보가 선출된 이후 불씨가 살아날 가능성을 경계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 문재인 대통령도 “언론이나 시민단체, 국제사회에서 이런저런 문제제기를 하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검토할 필요성이 있다”고 말했다. 야당과 합의 없는 강행 처리에 부정적인 입장을 밝힌 셈이다. 주무 장관인 황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도 “정부가 할 일은 언론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런 마당에 민주당이 대선을 앞두고 무리수를 다시 두는 일은 없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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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언 기자 lee.sang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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