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청년기자단] '순결', '어머니'.. 시대 따라 변하는 여중·여고 교훈
[쿠키뉴스] 박서현 객원기자 =지난해 9월, 여성정책연구원에서 전국 1,016개 초·중·고를 대상으로 성차별적 표현이 담긴 교가와 교훈을 조사한 결과, 전국 97개의 여중 가운데 64.9%(63곳)가 △향기 △꽃송이 △순결 △아름다움과 같은 성차별적 표현을 사용하고 있었다. 남학교의 경우 전국 99개 남중 중 24.2%(24곳)가 △건아 △씩씩한 △나라의 기둥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러나 중학교의 경우 여학생이 성차별적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남학생의 2배 이상이었고, 고등학교는 1.7배였다. 또한, 관계지향적 표현이 사용된 사례는 남중에서는 찾을 수 없었지만 여중은 34%(32곳)였다. 성취지향적인 표현의 경우 여고보다 남고에서 많이 사용되는 경향을 보였다.
본지 조사 결과, 위의 조사 결과를 입증하듯 전국 수많은 여중·여고에서 여전히 ‘순결(純潔)’, ‘어진 어머니’, ‘여성의 참모습을 갖자’, ‘경건한 여성이 되자’ 등 특정 여성상을 강조하는 듯한 표현이 담긴 교훈을 내걸고 있었다. 교훈과 관련해 각 지역의 여러 여중·여고에 문의한 결과, 대부분 잘 알지 못하거나 답변을 해 줄 교직원이 부재 중이라고 답했다.
‘전통’이라 유지하거나 ‘문제의식’ 느끼지 못하거나
‘훈’을 통해 개인을 규정하고 통제하는 우리 시대의 욕망을 살펴볼 수 있는 「훈의 시대」(2018, 와이즈베리)의 저자 김민섭 작가는 “아직 학교에는 구시대적이라고 할만한 여러 훈이 존재한다”며 “이런 것들을 전통이라고 여기거나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여전히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언어가 전통이 되어서는 안 된다. 훈이라는 건 누구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가운데 개인들에게 익숙하게 침투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강원도 모 여고는 교훈과 관련해 과거 강원도 교육청에서 시정을 요구했지만 현재까지 변화가 없었다. 이에 해당 학교 관계자는 “과거 교육청에서 교훈과 관련한 공문을 받았지만 동문들의 반발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 공문이 다시 와 학교에서 학부모와 학생, 동문 의견을 취합하려 노력 중”이라고 전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하 전교조) 손지은 여성부위원장은 시대를 역행하는 교훈이 여전히 존재하는 이유로 “학교 문화 자체가 변화에 대한 거부감이 있다. 특히 관행에 익숙한 문화라거나 동문, 지역사회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며 “여중이나 여고는 문제의식으로 바꾸려는 노력이 있지만 동문이나 학부모들의 반대에 부딪혀 힘든 상황이다. 한 프로그램에서 ‘순결’이라는 교훈을 가진 여고의 교훈을 바꾸려고 시도했는데, 동문과 학부모들이 ‘순결은 성적인 의미만 담은 단어가 아니다’라며 성차별적 맥락이 있는 단어도 보편화하며 문제를 축소시키는 경향을 보였다”고 설명했다.
구시대적 교훈 두고 재학생·졸업생 ‘시대착오적’이라 비판
그렇다면 해당 학교 재학생들은 교훈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한 여고에 재학 중인 A(18) 학생은 “학교에 입학할 때 교훈을 보고 ‘지금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이런 말을 하지?’라는 생각을 했었다. ‘학생’이 아닌 ‘여성’을 강조하는 게 이 시대에 맞지 않는 교훈이라고 생각한다”며 비판했다.
또한, 모 여고에 재학 중인 B(18) 학생은 “처음 교훈을 보고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학교를 다니면서 교훈이 의미하는 게 무엇인지 의문이 들었다. 계속 생각을 해 봤지만 교훈이 강조하는 여성상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고, 성차별적인 교훈이라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좋지 않았다”며 심경을 전했다. 이어 그는 “주변 친구들도 구시대적 교훈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선생님들께 불만을 표출하기도 했다. 선생님들도 교훈에 의문을 가진 분들이 계셔 교훈이 바뀔 줄 알았지만 여전히 그대로다”라며 아쉬움을 표했다.
졸업생들도 교훈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이해인(가명, 24) 씨는 “실제로 고등학교 재학 당시 선생님들이 다리를 오므려라, 치마 속에 체육복을 입지 말라고 했던 게 떠오른다. 이런 말처럼 구시대적 교훈은 학생들에게 조신하고 순종적인 모습이 올바른 여성의 모습이라고 인지하게끔 일조했다고 생각한다”고 의견을 전했다. 또한, 그는 “학생을 학생으로 보지 않고 기성세대들의 왜곡된 인식을 통해 만들어진 ‘여성상’을 담은 교훈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 분명 바뀌어야 한다”며 시대를 역행하는 교훈을 지적했다.
김민주(가명, 24) 씨도 성차별적인 교훈을 가진 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구시대적인 교훈에 대해 교직원이나 학교 관계자들이 문제의식이 있을까 의문스럽다. 앞서 문제가 된 교훈 중에서도 ‘어진 어머니’나 ‘여성의 참모습’, ‘순결’이 어떤 형태인지도 사실 잘 모르겠다. 이제는 과거와 달리 여성의 역할이 한정적이지 않고, 또 한정적이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며 교훈의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고 꼬집었다.
이지현(가명, 24) 씨 또한 “여중·여고를 졸업했다는 자부심은 있지만 구시대적인 교훈은 바뀌었으면 좋겠다. 교육기관인 만큼 특정 여성상이 아니라 ‘학창시절’이나 ‘학습’을 중요시하는 교훈이 적절한 것 같다”고 의견을 전했다.
문제 인지하고 교훈 변경한 곳도 존재해
시대 흐름에 맞춰 교훈을 변경한 학교들도 존재했다. 지난 2018년 서울신문 보도에서 서울 모 여고가 ‘고운 몸매’를 교훈으로 삼아 논란이 됐다. 보도 이후, 해당 여고에서는 홈페이지에 “교훈 속 ‘고운 몸매’의 의미를 ‘내면의 아름다움에 바탕을 둔 행동의 성숙’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신체적인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것으로 인식될 수 있다는 점에서 개선이 필요하다는 학교 공동체의 논의가 있었다”고 설명하며 교훈 변경에 대한 의견을 수립했다. 그리고 해당 학교는 교훈 공모를 받아 ‘맑은 마음, 바른 지혜, 바른 행동’으로 교훈을 개정했다.
이처럼 해당 학교에서 문제를 인식하고 구성원들과 합의를 거쳐 교훈을 변경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해인 씨는 “교훈이란 학생이 학교를 다니면서 갖추고 함양해야 할 가치관을 뜻한다. 요즘 학생들은 과거보다 성인지 감수성이나 여성 의제에 관심이 많아 이와 관련한 문제에서 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들었다. 학교에서도 대외적인 이미지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학생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소통해 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김민주 씨도 “학교 교육의 역할과 나아가야 할 방향을 함께 논의하는 건 당연한 시대다. 설문조사 등을 통해 학생들과 교직원의 의견을 종합해 학내 구성원 모두가 동참해 교훈을 새로 세워야 한다. 그렇다면 교육 목표 달성 효과와 효율 모두 높아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민섭 작가는 “학교의 훈을 불변의 가치로 고정할 것이 아니라 급훈처럼 구성원들의 합의에 따라 바꿔나갈 수 있는 대상으로 둬야 한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언어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하고, 그들이 스스로 자아와 욕망을 언어로서 정서할 수 있게 도울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각 학교의 장들이 자신에게 익숙한 언어가 아닌 학생들에게 익숙한 언어가 무엇인지 끊임없이 살펴야 한다”고 조언했다.
전교조 손지은 여성부위원장은 “현재 대안학교에는 교내 성평등위원회를 자체적으로 꾸린 것으로 알고 있다. 이처럼 각 학교에도 학생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의견을 반영할 수 있는 기구가 자체적으로 만들어져야 한다”며 “교직원이나 관리자들의 성평등 연수 교육이 있어야 한다. 교육청 차원에서도 산하에 성평등 지원 센터를 두거나 관련 법 제도를 마련해 법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 장치 마련이 필요하다”고 의견을 전했다.
현재 강원도교육청은 지난 7월 20일부터 ‘우리 학교 교가·교훈 돌아보기’를 추진해 11월 30일까지 각 학교별로 동문회, 운영위원회, 학부모회, 학생자치회 등과 협업해 교가나 교훈을 자율 수정하도록 권장했다. 교육청 담당자는 “현재 교가와 교훈을 모두 전달받아 1차로 취합 후 여성가족연구원 측 컨설팅을 통해 성차별적 요소가 나온 학교에 결과를 전달한 상태”라고 설명했다. 또한, 서울시교육청과 대구시교육청도 특정성별영향평가를 시행할 계획이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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