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소리일지 몰라도, 인간은 왜 개같은 사랑을 못하나 [마미손이 묻는다]

마미손 2021. 9. 30. 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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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 앞에서 데려온 마미손의 대문이. [사진 마미손]

너는 서울 동대문의 큰 길가 한복판에서 주워져 왔다. 가장 분주하고 복잡한 시간대의 동대문에서 사람들을 따라 한곳의 횡단보도를 반복해서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당시에 그곳에서 일하던 나의 사촌 형은 그런 너를 보고 잠시 가던 길을 멈춰섰다. 그리고 가만히 지켜보았을 것이다.
왠 새까만 작은 개가 주인도 없이 횡단보도를 계속 왔다 갔다 하는 걸까. 처음에는 단순한 궁금함이었을 거고 이내 그 궁금함은 안쓰러움이 되어 사촌 형은 너를 데리고 오게 되었다. 하지만 종종 성급한 동정심이 감당하지 못할 책임을 동반하듯이 데리고 오자마자 널 키울 수 없다는걸 깨달은 사촌 형은 용인 시골집에 사는 이모에게 전화를 하게 된다. 그 이모는 우리 엄마였고 넌 그렇게 우리 집에 오게 되었다.


백구였던 까만 개 대문이


너는 까만 개가 아니었다. 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 때가 타 그렇게 보였던 것이었다. 또 너는 특이하게 코와 입이 모두 핑크색이었는데 처음에는 그런가 보다 했던 것이 알고 보니 피부병이었다. 너를 씻기고, 병원을 데리고 가 피부약을 처방받고 그렇게 우리 엄마의 손을 타게 되었다. 이름을 뭐로 할까 고민하다 동대문에서 주워왔으니 대문이라고 하자 해서 넌 대문이가 되었다. 그때 당시 난 따로 혼자 나와 살 때라 너를 자주 볼 일은 없었다. 전적으로 부모님(특히 엄마)에 의해 길러지게 되었다.
마미손의 반려견 대문이. [사진 마미손]
흔히 사람들이 이야기하거나 방송에서 보여지는, 사람에게 버려지고 상처받은 개의 구김은 너에게는 없었던 거로 기억한다. 용인에 와서 넌 하루종일 동네를 쏘다니며 산책하고, 졸리면 자고, 배가 고프면 집에 잠시 들러 사료를 먹고, 가끔씩 고라니를 쫓아다니며 지내게 되었다. 가끔씩 내가 집에 오면 어떻게 알았는지 저 앞에서 날 마중 나오고 다시 이내 앞장서서 날 집으로 데리고 갔다. 시골길을 쫄랑쫄랑 걸어가며 흔드는 너의 엉덩이를 보며 생각했다. "대문이는 정말 행복한 시고르잡종이구나!"
너는 내일 먹을 끼니를 걱정하지 않는다. 비가 오면 털이 젖을까 안절부절못하지 않는다. 고라니를 쫓다 실패해도(늘 백 퍼센트 실패이지만) 시무룩해 하지 않는다. 너는 심지어 동대문의 까만 개였을 때도 자신을 불쌍하게 생각하거나 처량히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야생동물이 자기연민에 빠진 것을 본적이 없다"는 누군가의 말처럼. 나는 너의 그런 모습이 부러웠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부러운 건 한사람에 대한 너의 조건 없는 마음이다.

조건없는 '개같은' 사랑


언제나 보는 즉시 반갑게 꼬리를 흔들면서 달려드는, 외로워 보이면 슬그머니 와서 혀로 핥아주는, 누군가가 위협하면 지켜주려 짖어대는, 그리고 주인이 외출하고 나간 문을 하루종일 바라보며 기다리는 그 마음이 나는 부러웠다.
대문아, 사람에 대한 너의 바보스러워 보일 정도의 사랑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개는 주인이 자기를 버리면 그건 주인이 버린 게 아니라 자기가 주인을 잃어버린 거라고 생각한다는데, 아니 그건 도대체 어떤 마음인 걸까. 나는 저 정도까지의 마음을 알 수가 없다. 저 정도는 되어야 흔히 말하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그렇다면 나는 대문이 너보다 못한 존재인 건가.
하지만 사랑이란 단어는 함정이 많은 단어라 사용할 때 주의해야 한다. 설명이 굉장히 까다로운 단어이자 개념이다. 어쩌면 설명이 불가능한 개념인데 우리는 궂이 설명하려고 애를 쓴다. 영화에서, 소설에서, 시에서, 그리고 연인 사이에서.
사랑은 추상적인 단어이다. 그 추상적인 단어를 설명하기 위해 우리는 믿음, 소망, 책임 등등의 수많은 추상성을 끌어온다. 그리고 그 추상성에 또 다른 추상성을 덧대어 사랑이라는 거대한 추상을 겨우겨우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다. 사랑이란 단어는 직접 목격하기 전까지 정의내려서는 안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말할 수 없는 것은 말하지 않고 그냥 두는 것이 좋을 수도 있다. 연인들은 서로에 대한 사랑을 늘 아는척하지만 대부분 짐작할 수 만 있을 뿐이다. 어쩌면 사랑은 그렇게 거대하고 대단해야만 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대문아, 너는 지금 내가 하는 말이 이해가 되니? 개인 너의 입장에서 왠 개소리냐고 해도 형은 할 말이 없다. 문득 사촌 형이 너를 데리고 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너의 삶은 많이 달랐을 것이다. 나는 너를 발견했던 그 횡단보도에서 사촌 형의 발걸음을 잠시 붙잡아 두었던 그 마음에 대해서 상상해본다. 모든 게 정신없이 분주한 그곳에서 사촌 형은 잠시동안 너를 바라보았다. 그 바라봄으로 인해 너를 데리고 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난 이게 아주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


하지만 그 수많은 사람 중에 왜 사촌 형이었을까? 너를 보고 그냥 지나친 수많은 다른 이들의 무심함에 대해 난 또 생각해본다. 그렇지만 역시 알 수가 없기 때문에 '다만'이라는 말을 겨우 붙여, 사랑은 어쩌면 여러 시간과 공간 속에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다' 정도로 내버려 둔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사랑을 안 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랑을 못 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이말은 다 다른 말이다. 마음은 주는 게 아니라 '주게 되는' 것이 맞는 것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늘 불친절하고 괴팍스럽고 못된 사람도 어쩌면 마음을 주지 않는 게 아니라 마음을 주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사랑을 모를 수도 있다. 그리고 사랑은 그 사람을 아직 모를 수도 있다. 우린 그를 탓할 수 없다.
바라본다는 건 그 사람을 들여다본다는 것이다. 하루 중에 몇십초 몇분이라도 잠시 모든 걸 멈추고 그 사람을 생각해보는 것이다. 이건 구체적인 행동이기도 하고 동시에 추상적인 말이기도 하다. 대문아 너는 이걸 이해하기도 전에 몸으로 알고 있겠지. 나는 그런 네가 부럽다. 나도 개처럼 사랑하고 싶다.

마미손 힙합 뮤지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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