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규의 야구라는 프리즘]일본야구의 '克美'와 오타니

이종길 2021. 9. 30.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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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미우리 초대 구단주 쇼리키 '미국 야구 넘어선다' 유훈
일본 야구계 중요한 코드로..개인보다 집단 강조하는 문화
1870년대 초반 '베이스볼'서 1895년 '야큐'로 일본화시켜
쇼리키가 꿈꿨던 '극미', '일본식' 벗은 오타니가 이뤄내
[이미지출처=연합뉴스]

메이저리그 LA 에인절스의 오타니 쇼헤이(27)는 지난 27일(한국시간) 시애틀 매리너스와의 홈 경기에 선발투수로 등판했다. 7이닝 5피안타 1실점에 삼진 10개를 잡아내며 호투했다. 1-1 동점에서 마운드를 내려와 10승 달성에는 실패했다. 오타니는 투수로 두 자릿수 승리, 타자로 두 자릿수 홈런이라는 대기록에 도전하고 있다. 1918년 베이브 루스가 투수로 13승, 외야수로 11홈런을 때려낸 뒤 103년 만이다. 오타니는 27일 현재 9승(2패)·45홈런을 기록 중이다.

루스는 야구를 넘어 미국 스포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힌다. 홈런으로 야구라는 경기의 양상을 바꿔버렸다. 그와 비견될 선수는 농구의 마이클 조던 정도다. 루스는 1914년 메이저리그에 투수로 데뷔해 1920년부터 야수에 전념했다. 투수로 등판하지 않는 날에 야수로 뛰는 ‘투타 겸업’ 시즌은 1918년과 1919년 두 해였다. ‘가장 위대한 투타 겸업 시즌’이라는 기준에서는 오타니의 2021년이 루스의 두 시즌을 앞선다. 권위 있는 미국 스포츠주간지 '스포츠일러스트레이티드'의 지난 7월 평가다.

루스는 생전에 오타니의 고국인 일본을 방문한 적이 있다. 요미우리신문사의 쇼리키 마쓰타로 사장이 1934년 루스와 루 게릭 등을 포함한 메이저리그 올스타팀을 초청했다. 당시 일본에는 프로야구가 없어 아마추어 스타 서른 명으로 구성된 전 일본팀이 루스의 팀을 상대했다. 식민지 조선에서는 이영민이 유일하게 전 일본팀에 포함됐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이 팀을 기반으로 1935년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탄생했고 이듬해 최초의 프로야구 리그가 결성됐다. 지금도 요미우리가 일본프로야구(NPB)의 맹주 대접을 받는 데는 이런 배경이 있다. 요미우리 구단에는 초대 구단주 쇼리키의 ‘유훈’ 세 가지가 전해져 내려온다. 여기서 세 번째는 ‘미국 야구를 따라잡고 넘어선다’이다. ‘극미(克美)’는 일본 야구에서 중요한 코드 가운데 하나다.

야구는 1870년대 초반 일본에 도입돼 인기 스포츠로 자리매김했다. 한동안은 외래어인 ‘베이스볼’로 불렸다. 하지만 1895년 ‘야큐(野球·야구)’라는 번역어가 등장한다. 유격수 등 다른 용어들도 번역됐다. 야구의 일본화가 시작됐다. 쓰쿠바대학 교수 출신 태가트 머피는 2014년 출간한 '일본의 굴레'에서 “일본인들은 항상 무엇이 바다 건너로부터 온 것이고 무엇이 자기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자각이 있었다”라고 지적한다. 미국의 베이스볼과 일본의 야큐는 같은 경기지만 상당히 다르다. 머피는 쇼리키의 유산인 요미우리 구단에 대해 “왕정치나 나가시마 시게오 같은 야구 스타들은 모두 팀 플레이어였다”라고 기술했다. 개인보다는 집단을 강조하는 일본 문화가 야구에 그대로 녹아있다고 봤다.

1995년 노모 히데오의 성공 뒤 숱한 NPB 출신 스타가 메이저리그 문을 두드렸다. 가장 일본 야구팬의 사랑을 받은 선수는 2019년 은퇴한 스즈키 이치로였다. 홈런보다 안타가 트레이드 마크여서 더 일본식 야구를 한다는 이유가 컸다. 그는 메이저리그 통산 3089안타를 때렸다. 올해 오타니는 과장 없이 메이저리그 최고의 스타다. 쇼리키의 유훈이 드디어 실현된 것일까. 하지만 오타니의 플레이는 ‘야큐’와는 사뭇 다르다. 어떤 메이저리거보다도 빠른 공을 던지고 강한 타구를 날린다. 올 시즌을 앞두고는 근육량을 크게 늘렸다. 아직도 일본에는 웨이트트레이닝을 피하는 선수가 많다. 오타니가 중·고교와 프로 데뷔 구단인 니혼햄 파이터스에서 선수로 성장하는 과정도 전형적인 일본식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일본야구의 ‘극미’는 어떤 측면에서 열등감의 표현이다. 열등감은 적대감과 이어진다. 일본 야구계에서 반골로 통하는 구와타 마스미 요미우리 투수코치는 일본식 야구의 특징을 ‘훈련량 중시’. ‘정신 단련’. ‘절대복종’ 세 가지로 압축한다. 이 특징이 1930년대 이후 야구계가 군부에 ‘적성국 스포츠’인 야구를 어필하는 과정에서 정립됐다고 본다. 거슬러 올라가면 야구용어가 처음 번역된 1890년대는 청일전쟁의 영향으로 일본에 국수주의가 극성이던 때였다.

문화적인 배경 외에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서 발현한 내셔널리즘이 베이스볼이 야큐로 일본화되는 과정에 개입했다. 하지만 오타니의 시속 164㎞ 패스트볼과 비거리 140m 홈런이 ‘일본산’인지 ‘미국산’인지 따지는 건 무의미하다. 오타니가 대스타로 거듭난 이유는 그 자신이 ‘치고, 던지고, 달린다’라는 야구의 기본 플레이를 누구보다 사랑하기 때문이다. 어떤 국적의 야구가 우월한지를 따지는 것도 넌센스다. 기실 작전을 중시하는 일본 야큐의 원형은 미국에서 루스가 본격적으로 홈런을 치기 전 성행했던 볼티모어식 야구에서 찾을 수 있다. 본고장에서 잊힌 스타일이 태평양 너머에서 오래 살아남아 새로운 전통이 된 셈이다.

'일본식'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자 비로소 쇼리키가 꿈꿨던 ‘극미’를 이룬 선수가 나타났다. 한국에서 ‘극일’과 ‘K’ 접두사가 유난히 강조되는 시기에 생각해볼 만한 아이러니다.

한국야구학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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