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동해바다 트레킹..지경에서 물치까지, 해파랑길을 걷다
지치고 힘들 때는 길을 걷는 것이 좋다. 길은 어디에나 있고 누구에게나 가슴 설레는 길이 있기 마련이니 그저 걸으면 된다. 그럴 때 생각나는 길이 있다. 짙고 푸르며 망망하기만 한 바다가 끝없이 이어지는 동해안 바닷길. 문득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 설레는 양양의 바닷길. 그래서 해파랑길 양양 구간을 걸어보기로 했다.
아직 끝난 게 아니지만 지독한 열병을 앓은 기분이었다. 몸도 마음도 온통 수척해진 일상이 다람쥐 쳇바퀴처럼 반복되고 희망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돌이켜 보니 지나간 시간이 꿈만 같다. 누구나 할 것 없이, 속절없이 무력해지고, 불안해지며, 끝 간 데 없이 지쳐가고 있었다. 막바지로 가는 듯했던 코로나 블루가 변종이라는 또 다른 위력으로 세상을 어지럽히던 그 즈음이었다. 하늘과 맞닿아 새파랗게 물든 바다, 그 옆으로 찬란한 금계국이 넘실거리고 해당화 향기 짙게 풍기는 청정 바닷길이 떠오른 것은.
천천히 걸어보고 싶었다. 보고 듣고 기록하는 식의, 일을 위한 여행보다는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지친 심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것에 집중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여행은 없으리라. 그래서 이번 걷기 여행은 생전 처음 겪는 두려운 일상을 용케도 잘 버텨온 내게 주는 일종의 선물이자 새로운 파이팅을 위한 다짐이기도 했다. 생각만 해도 가슴 설레는 길, 그냥 걷고 싶은 길. 아무 생각 없이 그 길을 걷고자 주문진과 양양의 경계인 지경해변으로 갔다.
▶Course 1 지경해변-원포해변-남애항-죽도정
(해파랑길 41코스 양양 구간, 총 거리 8.4km, 소요시간 3시간)
‘지경’이란 예쁜 이름의 마을이지만 싱겁게도 그건 강릉과 양양의 경계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다소 번잡한 주문진항을 벗어나 만나는 지경해변은 반가울 정도로 조용하고 한적하다. 수심 1m의 바다를 안은 백사장이 500m. 길고 널찍한 해안선이 시원하게 펼쳐지고 바다는 에메랄드 빛으로 맑다. 해변과 나란히 소나무 숲이 길게 이어지는 것도 특별한 풍광이다.
해파랑길 양양 구간의 시작점인 지경해변으로 들어가기 전, 7번국도 바로 건너편에 있는 향호를 잠깐 둘러봐도 좋다. 행정구역 상 주문진에 속하지만 지경해변과 맞닿아 있는 석호로 바다 옆 호수의 풍경이 이채롭다. 약 8㎢ 넓이의 향호는 경관이 빼어나고 수변 둘레길도 조성돼 있어 잠깐 휴식과 함께 가벼운 산책에도 적합하다.
지경해변에서 북쪽으로 바다와 나란히 걷다 보면 원포해변이 이어진다. 오대산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동해로 흘러 드는 화상천을 경계로 북쪽으로 길게 펼쳐진 원포해변은 바닷가 곳곳에 솟아있는 바위섬의 정취 때문에 아기자기함마저 느껴지는 곳이다. 화상천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에는 투망으로 고기를 잡는 사람들이 많다.
원포해변을 지나면 해안선이 바다 쪽으로 둥글게 굽어지며 그 끝에 빨강 등대가 서 있다. 등대 안쪽으로 보일 듯 말 듯, 살포시 그림 같은 항구가 있다. 삼척의 초곡항, 강릉 심곡항과 함께 강원도의 3대 미항으로 꼽히는 남애항이다. 남애항에는 곳곳에 돌고래 조형물이 서있다. 남애항과 고래를 쉽게 연결 지을 수 없는 세대도 있지만, 80년대에 청춘을 보낸 사람이라면 ‘고래사냥’이라는 노래와 영화를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맞다. ‘자 떠나자 동해바다로~’하는 송창식의 노래가 주제곡으로 쓰였던 영화 ‘고래사냥’의 촬영지가 바로 남애해변이다. 40년 가까이 세월이 흘렀음에도 변함없는 풍경과 그 속에 녹아 있는 추억 한 자락, 여전히 남애 바닷가가 정겹고 또 그리운 이유다. 예전과 같다면 여전히 그 바닷가에 젊음이 넘실댄다는 것, 다른 게 있다면 통기타와 노래 대신 서프보드에 올라 파도를 탄다는 것 정도. 남애는 여전히 가고 싶은 곳이며 조그만 예쁜 고래 한 마리가 살고 있을 것 같은 아름다운 바다다.
광진해변을 지나면 길은 잠시 바다를 떠나 7번국도와 만나고 머지않아 바닷가에 자리한 휴휴암으로 이어진다. 넉넉한 바다를 품에 안은 관음성지다. 쉬고 또 쉬어가라는 의미의 휴휴암에는 책을 들고 서있는 거대한 지혜관세음보살이 모셔져 있다. 묘적전 하나 덩그러니 짓고 시작한 휴휴암은 바닷가에 누운 부처님 형상의 바위가 발견되며 불자들 사이에 성지로 소문난 곳이다.
휴휴암을 지나면 인구해변과 인구항이 이어지고 그 뒤로 죽도라 불리는 작은 섬이 있다. 물론 과거에 섬이었다가 지금은 육지가 된 곳이다. 울창한 대나무 숲이 있어 죽도라 불렸는데 지금은 대나무 대신 소나무가 빽빽하게 그 자리를 메우고 있다. 죽도 정상까지는 가파른 나무 계단이 놓여 있고 꼭대기에는 인구해변과 죽도해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죽도해변쪽으로 난 둘레길을 따라 잠깐만 걸으면 닿는 죽도암도 가볼만한 곳이다. 작은 관음전 하나 있는 소박한 사찰이지만 바닷가 도량을 꾸민 석탑과 바위 위에 놓인 동자상 덕분에 신심이 절로 난다. 사찰과 어우러진 바다 풍경도 예술이다.
▶Course 2 죽도해변-동산해변-기사문항-하조대
(해파랑길 42코스, 총 거리 9.6km, 소요시간 3시간 30분)
서핑의 성지이자 메카로 통하는 죽도해변은 젊음으로 넘실댄다. 해변은 온통 서퍼들 세상. 서핑숍이 즐비하고, 서퍼들의 취향을 저격하는 펍과 식당, 카페 등 힙한 공간들로 가득하다. 서핑 천국인 호주 브리즈번의 골드코스트가 부럽지 않은 곳이다. 죽도해변이 서핑의 메카가 된 건 수심이 비교적 얕고 딱 좋은 파도 때문이다. 특히 가을은 바다에서 육지로 바람이 불어오는 온쇼어 덕분에 서핑을 즐기기 좋다. 거기에 춥지도 덥지도 않고, 휴가철을 비켜선 요즘 죽도는 서퍼들의 천국이 된다.
38선휴게소는 7번국도에서 만날 수 있는 휴게소다. 기사문항과 이어진 이곳은 동해바다와 가장 가까운 휴게소로, 그만큼 멋진 풍경을 만들어낸다. 38선 표지석이 서있는 아픈 역사의 현장이지만, 죽도에서 비롯된 서핑 바람이 휴게소의 앞마당 격인 기사문해변까지 불어와 서퍼들로 시끌벅적 붐비는 곳이다.
38선휴게소와 기사문항을 지나면 해파랑길 42코스의 끝 지점인 하조대가 지척이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풍광의 여행 명소이자 조선 역사의 자취가 서린 유적지 하조대는 언제 가 봐도 좋은 곳이다. 우뚝 솟은 기암괴석에 뿌리를 내린 해송, 고고한 학 같다 하여 ‘백년송’으로 부르거나, 애국가 영상에 나왔다고 해서 ‘애국송’으로도 불리는 소나무도 건재하고, 까마득한 절벽 위에 선 하얀 등대도 여전하다. ‘하조대’란 이름만으로도 너무 벅차, ‘하륜’과 ‘조준’이란 이름을 번번이 잊게 되지만 경치 하나로 모든 걸 정리해주는 절경 중의 절경이다. 하조대와 등대를 오가며 대면하는 진풍경들을 한참 동안 바라본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기암들 사이로 밀려드는 푸른 파도, 보면 볼수록 신비스런 해송들은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환상적인 아우라를 만들어낸다. 그 장면 하나하나가 눈이 부실 정도다. 제법 먼 거리를 걸어온 도보 여행자에겐 이 이상의 보상이 있을 수 있을까. 하조대는 그런 곳이다.
▶Course 3 하조대해변-서피비치-동호해변-수산항
(해파랑길 43코스, 총 거리 9.4km, 소요시간 3시간 30분)
하조대해변을 지나고 중광정해변이 가까워지면서 뭔가 쨍한 느낌이 온몸을 휘감는다. 잠시 동안의 정적과 고요함을 깨는, 도회에서 경험하는 익숙한 소란함이다. 신나고 유쾌하며 활기 넘치는 소음, 젊음과 열정으로 가득한 서피비치가 그곳에 있었다. 동해안 최고의 서핑 명소이자 힙플레이스인 서피비치는 바다와 해변, 사람들 풍경 모두가 이국적이다. 잠시 낯선 외국의 해변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 서핑에 대한 대한민국 젊은이들의 로망이 어떠한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곳이다. 프라이빗한 느낌의 입구를 통해 해변으로 들어가면 EDM이 몽환적 분위기를 이끌고 해먹과 그늘막 아래에선 맥주를 든 서퍼들이 환호작약한다. 모래사장 위에 지어진 노천 펍은 해방구처럼 자유롭고, 동해바다의 정경을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는 루프톱도 근사하다.
잠시 불타는 청춘으로 돌아갔던 서피비치를 뒤로 하고 다시 길을 걷는다. 7번국도 옆으로 난 보행도로 겸 자전거도로를 따라 걷다 잠시 동호해변을 들렀다 다시 국도변으로 나오는 구간이다. 그리고 이 길은 해파랑길 43코스의 끝인 수산항까지 이어진다. 수산항은 소박한 어촌마을의 모양이지만 항구에는 세련되고 럭셔리한 요트들이 가득하다. 항구의 또 다른 한쪽에서는 투명 카누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인다.
길을 걷다 수산항에서 저녁을 맞는다면 도시에서 경험할 수 없는 특별한 밤을 제안한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솔비치양양에 여행자의 하루를 멋지게 마무리할 특별한 프로그램이 있다. 바로 해변 영화관인 선셋 시네마다. 해변 산책로 옆에 마련된 야외극장에서 파도소리를 배경 삼아 영화를 보는 즐거움은 근사한 추억거리다. 영화는 오는 10월10일까지, 매일 저녁 8시에 상영한다.
▶Course 4 수산항-낙산사-헤밍웨이파크-물치항
(해파랑길 44코스 양양 구간, 총 거리 11.4km, 소요시간 4시간)
해파랑길 44코스 전체를 걷지 않더라도 꼭 권하고 싶은 코스가 있다. 몽돌소리길 전망대에서 강현면사무소까지 이어지는 2.3㎞의 바닷길이다. 일명 ‘헤밍웨이길’로도 불리는 이 길은 짙고 푸른 망망대해를 바로 곁에 두고 걷는 길이다. 이 길 중간쯤인 정암해변에는 최근 『노인과 바다』를 콘셉트로 한 ‘헤밍웨이파크’가 조성됐다. 소설에 등장하는 산티아고와 마놀린의 이름이 새겨진 두 척의 배와 원목그네, 해먹 등이 소설 속 그 바닷가로 여행자들을 안내한다. 피서지로는 그다지 각광받지 못하는 정암해변이 헤밍웨이의 소설을 테마로 거듭나면서 일부러 그곳을 찾는 여행자들이 늘고 있다. 헤밍웨이길은 걷는 즐거움이 있는 길이다. 길 곳곳에 만들어진 소라 모양의 벤치에 앉아 자그락거리는 몽돌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어느새 마음의 평화가 찾아온다. 길 중간에 있는 바다 전망대에 올라 ‘하트바위’를 찾는 즐거움, 작고 예쁜 바닷가 카페 ‘양양그곳 카페이룸’의 커피 한 잔과 바닷가 나무 그네도 헤밍웨이길에서만 찾을 수 있는 힙한 감동이다.
해파랑길 양양 구간의 끝은 물치항이다. 해파랑길 44코스의 끝인 속초해맞이공원까지 가도 상관없지만 싱싱한 자연산 회가 있는 물치항에서 맛있게 도보여행을 마무리하는 것도 좋다.
[글과 사진 이상호(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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