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현의 '인물로 보는 차 이야기'] (22) '발로 비벼 만드는 더러운 차' 이미지 바꾸다

2021. 9. 30.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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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 기계가 물건을 만들어내는 세상에 살고 있다. 차도 마찬가지다. 거대한 기계에 들어간 찻잎은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 차로 완성된다. 하지만 우리는 사람 손길 한 번 닿지 않은 차보다는 찻잎을 한 장 한 장 정성스럽게 따고, 장작불 지펴서 솥을 달구고, 뜨거운 솥에 손을 익히면서 찻잎의 온도를 가늠하고, 눈으로 찻잎의 색을 관찰하고, 찻잎의 향기가 바뀌는 것을 감지하면서 만들어내는 차를 마실 때 감동한다. 정말 훌륭한 차는 기계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장인의 손에서 완성된다.

하지만 손으로 만든 차를 고급으로 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십여 년 전, 중국 한 농업대 차학과 수업 시간에 교수님이 “지금 중국 차 가공의 목표는 100% 기계의 힘을 빌려 차를 만드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중국 사람들은 차를 손으로 만드는 것은 낙후하고 비효율적이라는 생각했다.

장텐푸가 제작한 나무로 만든 유념기. 중국 최초의 차 가공 기계다. 손으로 찻잎을 유념하는 모습. 지금은 이렇게 손으로 만드는 차를 고급으로 친다.
비슷한 시기 아주 오지에 있는 차 가공장을 방문한 적이 있다. 말이 가공장이지 차나무를 심고 초벌 가공해 파는 농가였다. 생활 공간과 차 가공 공간이 따로 분리되지 않았고 전반적으로 매우 지저분했다. 농부의 아내가 잎을 따다 반찬 볶던 솥에 넣고 달달 덖었다. 반찬 덖는 솥과 차 덖는 솥이 따로였다면 좋았겠지만, 그래도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그다음에 일어났다. 이제 잎에 힘을 줘 비비고 문질러야 한다. 그렇게 해야 찻잎의 세포 조직이 파괴되면서 이파리 안쪽에 들어 있는 맛을 내는 물질이 흘러나온다. 이 과정을 유념이라고 부른다. 녹차를 만들든 홍차를 만들든 매우 중요한 과정이다. 유념 과정을 잘 처리하지 못하면 차의 품질이 떨어진다.

농부의 집에는 작은 유념기도 없었다. 농부의 아내는 우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전혀 거리낌 없이 시멘트 바닥에 잎을 펴놓고 비비고 문지르기 시작했다. 화장실까지 신고 가는 신발로 밟고 다니던 바닥을 쓸거나 닦지도 않고, 그 바닥에 바로 차를 널고 유념하는 것을 본 우리는 눈을 의심했다.

이게 20년도 안 된 가까운 과거의 일이다. 100년, 200년 전에는 어땠을까?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편전쟁 후 중국이 급격히 망해가고 있을 때 중국의 차 산업은 오히려 반짝했다. 영국이 요구한 전쟁 배상금을 물어내려면 차를 많이 수출해서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 중국 차 상인들은 차를 함부로 만들었다. 차의 무게를 늘리려고 톱밥을 섞어 넣기도 하고, 예쁜 색을 내겠다고 쪽물을 들이기도 했다. 이런 일을 하면서도 전혀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들의 생각이 짧았다. 중국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차를 만드는 나라라면 소비자들이 어쩔 수 없이 참고 이런 차라도 마셨지만, 당시는 이미 그런 세상이 아니었다.

영국 사람들이 인도에 차나무를 심고 차를 만드는 데 성공한 후 중국 차는 몰락의 길을 걸었다. 무엇보다 영국 사람들은 차를 기계로 만들었다. 기계는 위생적이고 효율적이었다. 중국 사람들은 몇천 년 동안 차를 마셨다고 하면서도 한 번도 사람을 대신할 기계를 만들어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증기 동력까지는 아니더라도 간단한 장치로 노동력을 줄이고 효율을 높일 기구 정도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것은 시도도 하지 않고 오로지 사람 힘으로 차를 만들었다.

장텐푸가 푸젠성에 세운 유기농 다원.
중국 사람들이 차 가공 기계에 관심이 없었던 것은 인건비가 저렴했기 때문이다. 노동력을 제공할 인력이 얼마든지 있으니 굳이 비용을 들여 기계로 대체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중국이 기계로 차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아편전쟁에서 지고 나서 거의 100년이 지난 후부터다. 그사이 중국 차는 완전히 몰락했다. 이 시대에 이 같은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다시 한 번 중국 차의 영광을 불러오자고 결심하는 이들이 등장했다. 장텐푸도 그중 한 명이다.

장텐푸는 상하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의사였다. 장텐푸가 태어난 다음 해 아버지는 그를 데리고 고향 푸젠성으로 돌아갔다. 부모는 아들이 가업을 이어 의사가 되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는 과거 황실에 진상하는 차를 만들고 유럽에 홍차를 수출하던 푸젠성의 차 산업이 무너져 내려서 차나무 자원을 두고도 활용하지 못해 농민들이 헐벗고 굶주리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래서 차에 투신하기로 결심하고 난징 금릉대 농학원에 진학한다.

▶한때 ‘손으로 만드는 차’ 비위생 대명사…지금은 ‘최고급 수제’ 인식

1932년 대학을 마친 장텐푸는 고향으로 돌아와 다엽개량장에서 근무했다. 이때 그는 유념 기계를 만드는 데 몰두한다. 장텐푸가 유념 기계를 만들겠다고 결심한 것은 일본 신문에 난 기사를 보고 나서였다. 일본 신문에 차를 만들고 있는 중국 농부 사진이 실렸다. 변발을 하고 웃통을 벗어젖힌 남성이 유념을 하는 중인데 놀랍게도 손이 아니라 발로 찻잎을 문지르고 있었다. 일본 신문은 중국이 이렇게 미개하다고 조롱했다. 기사를 본 장텐푸는 분노가 치밀었지만 신문 사진이 조작된 것은 아니었다. 실제 당시 중국 농민들은 유념을 발로 했다. 손으로 유념하는 것보다 훨씬 힘이 덜 들기 때문이다.

1934년 그는 유념기를 만들었다. 원가를 절감하기 위해 나무로 만들고, 동력을 쓰지 않고 사람이 손으로 돌릴 수 있게 설계했다. (항저우 중국다엽박물관에 장텐푸가 만든 목제 유념기가 있다. 육중해 보이지만 손잡이를 살짝 밀어보니 놀랄 정도로 부드럽게 움직였다.)

그 이후에도 장텐푸는 학교에서 후학을 가르치는 한편 연구를 계속했다. 일본에 가서 그들의 차 산업을 시찰할 때는 모든 것을 눈에 담아 가겠다고 결심했다. 그 후 일본에서 선진 가공 기계를 들여와 차 가공에 적용하고 가공의 원리를 연구해 차의 품질을 높이기 위해 애썼다. 퇴직한 후에도 차 산지를 둘러보고 공장에 기술 지도를 나가고 차 시장을 둘러보고 책을 쓰고 차 심사대회에 나갔다.

놀랍게도 이런 활동을 100세가 넘을 때까지 했다. (1910년에 태어나 2017년에 107세로 사망했다.) 이렇게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그는 언제나 “차를 마셔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장텐푸의 필생의 바람은 차 재단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의 바람은 100세 생일쯤에 이뤄졌다. 그는 자신이 갖고 있었던 유일한 재산인 80㎡짜리 집을 재단에 기증했다. 본래도 “100세가 넘으면 외부 활동을 많이 하지 않고 조용히 여생을 보내겠다”고 했지만 재단이 세워지는 바람에 100세가 넘어서도 쉴 수가 없었다. 푸젠성에 유기농 다원을 개발하기 위해 노구를 이끌고 부지를 보기 위해 자동차 바퀴가 빠질 정도로 험한 길을 마다 않고 덜커덕거리며 다녔다. 현재 장텐푸 재단은 푸젠성에 세 군데 유기농 다원을 개발해 차를 생산하고 있다. 일생을 중국의 차 산업 발전에 헌신한 그는 소원대로 중국이 세상에서 차를 제일 많이 만들고, 제일 많이 재배하는 것을 보고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 순간 그는 만족스러운 삶이었다고 생각했을까? 이제 차나 한잔 마셔야겠다고 생각했을까?

[신정현 죽로재 대표]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27호 (2021.09.29~2021.10.05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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