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후 200년 뒤 알려진 비운의 천재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당대에 큰 인기를 누리다 후세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예술가는 숱하다. 하지만 그 반대로 생전에는 무명이었다가 먼 훗날 재조명받는 이도 간혹 있다.
오늘날 가장 신비로운 초상화 중 하나로 회자되는 명작을 남기고도 살아생전에 별다른 인정을 받지 못했음은 물론, 사후 200년 가까이 완전히 잊혔던 불운의 화가가 여기 있다. 17세기 네덜란드 바로크 미술의 거장,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 1632~1675년)가 그 주인공이다.
다빈치의 모나리자에 버금갈 정도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역사상 가장 유명한 초상화는 아마도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1665년경)’일 것이다. 실존 여부조차 알 수 없는 아름다운 여인, 매혹적인 눈망울과 오묘한 표정 등 신비로움과 궁금증을 자아낸다는 측면에서 그러하다. 어찌나 호기심을 유발하는지, 이 작품을 주제로 여러 소설이 쓰여졌을 정도다. 미국 유명 배우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할리우드 영화로도 제작됐다. 영국의 인기 낙서화가 뱅크시도 이 작품을 모티브로 벽화를 그렸다.
작품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한 과학적 분석도 꾸준히 이뤄져왔다. 특히, 최근의 한 연구는 엑스레이, 디지털 현미경, 물감 표본 분석 같은 다양한 기술을 동원, 안료의 성분과 생산지는 물론, 세월에 의해 지워진 부분들까지 모두 밝혀냈다. 심지어 화가가 어떤 순서로 그림을 그렸는지 알아내는 정도에 이르렀다. 흥미로운 사실은 원래 바탕이 검정색이 아니라 녹색 커튼이었다는 점과 속눈썹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일부 미술사학자들이 속눈썹이 없는 점을 들어 실제 인물이 아니라 이상적인 인물을 그린 것이라 주장한 것을 반박하는 증거였다. 하지만 터번을 두른 이 소녀가 누구인지만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아마도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신비로운 초상화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이런 사색적이고 고요한 분위기의 매혹적인 그림을 창조한 천재 화가가 무슨 연유로 그렇게 감쪽같이 역사에서 잊힐 수 있었던 것일까. 당대에는 물론, 타계 후 2세기가량 흐른 1865년경 프랑스의 한 미술사학자에 의해 우연히 재발견되기까지 말이다.
무엇보다 그의 성격 탓이 컸다. 페르메이르는 전혀 사교적이지 않은 데다가 지극히 사적인 제작 방식을 선호했다. 화가 활동을 위해 당시 필수였던 지역 협회, 길드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처갓집에 얹혀살면서 작은방 하나를 작업실로 사용, 혼자 조용히 그림을 그렸다. 그가 43세에 죽었을 때, 처자식에게 남긴 것은 빚뿐이었다. 그 흔한 제자 한 명 없었고, 동료 예술가들에게 알려질 방법이 전혀 없었다. 그의 방식을 이어받은 제자가 없고, 영향을 받은 동료들이 없으니 그의 스타일과 천재성을 상징하는 색채와 빛의 특정 효과, 안료의 정확한 혼합과 탁월한 배경 처리 기술은 그 누구에게도 전수되지 못했다.
푸른 벨벳 의자에 앉은 젊은 여인이 버지널이라는 당대 유행하던 건반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하얀 공단 드레스 위에 노란 숄을 두른 그녀는 진주 목걸이를 하고 있고, 머리에는 빨강과 하얀색 리본 장식을 둘렀다. 그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당대 전형적인 중산층 가정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인물과 악기는 어김없이 왼쪽 벽을 향해 배치돼 있다. 손바닥만 한 작은 작업실에서 그리다 보니 구성이 한정된 것이리라. 제한된 구성이기는 해도 섬세하게 통일된 빛으로 인해 주변 장식 하나 없이도 공간과 깊이에 대한 분위기와 깊은 인상을 창조해냈다.
이 작품이 세상에 처음 알려진 것은 190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다이아몬드 광산 재벌로 20세기 최고 컬렉터 중 한 사람이었던 알프레드 베이트가 자신의 소장품 책자를 발간하면서다. 그는 페르메이르의 작품을 여러 점 소장, 미술관에 기증하기도 했는데, ‘버지널 앞에 앉은 젊은 여인’은 자신이 개인 소장했다. 그가 타계하면서 이 작품은 동생에게 넘겨졌고, 이후 동생이 자신의 아들에게 유산으로 남겼다. 이 아들이 1960년 런던 화상에게 판매 의뢰한 것을 브뤼셀의 한 화상이 구매, 40년 넘게 소장했다. 화상이 2002년에 죽으면서 그의 유가족에 의해 경매에 나오게 된 것이다.
또 다른 한 점은 1655년작 ‘성 프라세디스(Saint Praxedis)’다. 이 작품은 폴란드의 유명 컬렉터인 바바라 피아세카 존슨 소장품으로, 1969년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중산층 가정의 일상생활 모습을 주로 다룬 페르메이르 작품으로는 상당히 드문 종교화이며, 알려진 작품들 가운데 가장 초기작에 해당한다. 화가가 1653년 결혼과 동시에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이 작품은 20대의 젊은 나이에도 불구, 그가 이미 안료, 색채 등에 대해 높은 이해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이탈리아 화가 그림을 모작한 것이다. 스승이 누구인지도 알려지지 않은 그가 이런 모작을 통해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했을 가능성이 높게 제기된다. 원래는 작품에 십자가를 더해 변화를 꾀했는데, 엑스레이 연구에 의하면 완성 후에 덧그렸을 확률이 높다. 이는 그림의 종교적 이미지 효과를 더 높이기 위함으로 보인다. 또한 인물에 보다 강렬한 물리적 존재감을 부여하기 위해 원작보다 훨씬 고밀도로 색채를 강조했다. 배경인 하늘에는 울트라 마린 물감을 사용했다. 당시 금보다도 비싼 고가의 물감이었음에도 그는 항상 푸른색을 표현하기 위해 이 물감을 사용했다. 아마도 그가 죽으면서 빚을 남긴 이유 중 하나리라. 이렇게 훌륭한 걸작을 그리고도 명성을 얻기 위해 그리 오랜 세월을 기다려야 한다면 감내할 수 있을까. 천재의 삶은 언제나 고단하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27호 (2021.09.29~2021.10.05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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