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임라이트]자본주의와 실패자 이야기..10년 지나 공감하는 세상 씁쓸

이종길 입력 2021. 9. 29. 12:15 수정 2021. 10. 20.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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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혁 '오징어 게임' 감독
국내 드라마 최초로 전 세계 넷플릭스서 가장 많이 시청돼
"한국 사회, 좁은 땅덩어리서 5000만 명 극한 경쟁 내몰려"
작품마다 새로운 가능성 천착..시즌2, 성기훈 반격이 전부 아냐

황동혁 감독(50)의 출발은 순탄하지 못했다. 영화 '마이 파더(2007)'가 흥행에 실패했다. 차기작 불발로 이어져 생활고에 시달렸다. 은행 대출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TV 뉴스가 비추는 사람들도 절망에 빠져있었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었다. 일방적 구조조정 단행에 반발해 평택 공장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였다. 경찰이 강경 진압으로 맞서면서 현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황 감독은 남의 일 같지 않았다. 평범한 직장인이 하루아침에 사회 밑바닥을 구르는 자본주의의 폐해를 실감했다. 서바이벌 게임이 떠올랐다. '오징어 게임'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누구나 한순간 실패자로 전락할 수 있다. 창작자로서 그런 문제를 내포한 인물을 창조하곤 한다. 그렇게 탄생한 배역이 성기훈(이정재)이다. 실제 경험을 반영해 불안정하고 힘든 사회를 가리켰다."

음지에서 써 내려간 '오징어 게임'은 10년도 더 지나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로 빛을 봤다. 반응은 경이로운 수준이다. 국내 드라마 최초로 전 세계 넷플릭스에서 가장 많이 시청된다. 최대 시장인 미국은 물론 독일, 프랑스, 일본, 베트남 등 76개국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린다. 초록색 추리닝과 달고나 세트가 온라인에서 거래되고, 메타버스에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게임이 진행되는 등 신드롬을 몰고 왔다. 테드 서랜도스 넷플릭스 공동 최고경영책임자(CEO)는 "추세가 계속된다면 넷플릭스 비영어권은 물론 전체 작품 가운데서도 가장 크게 성공할 수 있다"라고 했다. 황 감독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 이렇게 단기간 전 세계 열풍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애초 글로벌 시장이 목표이긴 했다. 봉준호 감독과 방탄소년단(BTS), 싸이가 가장 한국적인 게 가장 세계적일 수 있다고 입을 모으지 않았나. 저 또한 한국의 옛날 놀이가 세계적으로 소구력이 있다고 봤다. 그런데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오징어 게임'은 게임을 정교하게 설정해 승리를 따내기 힘든 일본 서바이벌 작품들과 다르다. 간단한 아이들 놀이를 빌려 직관적으로 게임을 따르게 한다. 이야기도 어렵지 않다. 거액의 상금이 걸린 게임에서 패하면 바로 목숨을 잃는다. 대본이 완성된 2009년에는 허무맹랑한 판타지로 치부되기 일쑤였다. 10년이 지나 반응은 판이해졌다. 슬프게도 세상이 바뀌어 빛을 볼 수 있었다.

"요즘 사람들은 게임에 익숙하다. 비트코인, 부동산, 주식 모두 일확천금을 노리고 하는 게임이다. 전 세계 누구나 관심을 보인다. 코로나19 확산으로 부익부 빈익빈이 가속화돼 더 심해진 듯하다. 특히 한국은 여전히 경쟁이 치열하고 스트레스로 가득하다. 좁은 땅덩어리에서 5000만 명이 '오징어 게임' 참가자처럼 극한 경쟁에 내몰려 있다. 이를 조장하는 사회를 용기 있는 영웅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로 우화처럼 보여주고 싶었다."

현대사회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자세는 영화 '도가니(2011)'에서도 엿보였다. 오징어 게임 참가자를 태운 배는 무진에서 출발한다. '도가니'의 배경이 된 도시다. 한국에서 벌어지는 폐해를 모조리 품은 공간으로 표현된다. 기원인 김승옥 작가의 '무진기행'에서도 산업화가 급격히 진전돼 생긴 병리적 현상들이 안갯속에 가려져 있다. 그 안에 발을 들인 성기훈은 '무진기행'의 윤희중이나 '도가니'의 강인호(공유)처럼 무기력하고 공허하다. 하지만 자기 존재 이유를 확인하며 지적 패배주의 혹은 윤리적 자기 도피를 극복하려 한다.

"평범한 사람이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는지 보여주고 싶었다. 물론 종국에는 희망에 다가간다. 성기훈의 마지막 다짐대로다. '난 말이 아니야. 사람이야. (…) 난 용서가 안 돼. 너희들이 하는 짓이.' 이제 우리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자문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황 감독의 세계관은 오징어 게임의 설계자인 오일남(오영수)에서도 나타난다. 동심을 되찾고자 직접 게임에 참여하기까지 한다. 황 감독은 이미 '수상한 그녀(2014)'에서 청춘을 향한 노인의 욕구를 그렸다. 얼굴이 주름으로 가득한 오말순(나문희)이 스무 살의 몸으로 되돌아간다. 오드리 헵번에서 딴 오두리로 이름을 바꾸고 새로운 인생을 즐기기로 마음먹는다. 황당한 설정은 육아와 가사에 매달리며 흘려버린 노인들의 청춘을 되짚어보려는 시도였다. 오일남은 오말순과 달리 동심을 회복하지 못한다. 끝까지 인간을 믿지 못한 까닭이다.

황 감독은 작품마다 새로운 가능성에 천착했다. 패배의 역사(병자호란)를 다룬 '남한산성(2017)'에서조차 김훈 작가의 원작 소설에 없는 대사를 넣어 주제 의식을 관통했다. 김상헌(김윤석)이 말하는 '백성을 위한 새로운 삶의 길'이다. 모든 낡은 것을 없애고 무로 돌아가서 새롭게 시작하는 편이 낫다는 혁명적 결론에 다다른다. 당시 황 감독은 "한국 사회의 변화를 바라는 개인적 소망과 상상을 얘기하고 싶었다"라고 했다.

간절한 바람과 달리 한국 사회는 더 치열해졌다. 희생자들은 '오징어 게임'의 유리 징검다리에서 드러나듯 까맣게 잊혀간다. 황 감독은 다시 새로운 희망을 모색한다. 종지부를 찍으며 예고한 성기훈의 반격이 전부가 아니다. '오징어 게임' 대본에는 영상화되지 않은 에필로그가 있다. 오징어 게임을 진행하던 황인호(이병헌)가 비좁고 낡은 고시원 방에서 새로 산 작은 물고기들을 빈 어항에 부어 넣는 장면이다. 멀리서 응시하는 남자가 있다. 경찰이자 그의 동생인 황준호(위하준)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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