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 차별의 역사, 이 영화에 이렇게 담겼다
[김동근 기자]
▲ 영화 <캔디맨> 포스터. |
ⓒ 유니버설 픽쳐스 |
세상이 많이 좋아졌다고 이야기한다. 실제로 경제적인 상황이 조금 나아지면서 평균적으로 비치는 세상의 모습은 과거에 비해서는 좀 더 나아 보인다. 하지만 여전히 부조리들과 차별은 존재한다. 많은 부분이 세상에 드러났다고 하지만, 사실 무수한 차별은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에 여전히 뿌리 박혀 있다.
각 나라의 이민자들을 향한 시선들과 다른 인종에 대한 시각에는 그런 차별의 시선이 여전히 담겨있다. 다양한 민족이 함께 생활해 나가야 하는 현대이기 때문에 대부분은 잘 어울리며 살아가려 노력하지만 일부에 깊이 박힌 마음은 은연중에 밖으로 돌출된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특히나 인종문제를 많이 가지고 있다. 과거 노예제에서 고통받던 흑인들을 향한 현재의 시선이나, 동양계를 바라보는 시선이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그들을 백인들과는 다른 존재로 생각하고 무시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래서인지 백인 경찰과 흑인 피해자의 문제가 빈번히 발생하기도 한다.
이 문제는 비단 미국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그 빈도는 적겠지만 한국에도 이제는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살아간다. 중국, 일본 사람뿐 아니라 동남아 국적의 사람들도 이민 생활을 하고 있는데, 한국에서도 그들을 대하는 태도나 시선에는 그들을 낮게 보고 무시하는 경향이 존재한다. 이런 보이지 않는 갈등은 바로 해결하기 힘들고, 앞으로도 계속 어딘가에는 존재하며 갈등을 만들어 갈 것이다.
흑인들의 보이지 않는 피해와 차별 말하는 <캔디맨>
영화 <캔디맨>은 그런 소수인종들의 보이지 않는 피해와 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담는다. 영화의 중심인물인 안소니(아히아 압둘 마틴 2세)는 새 미술작품을 구상 중인 아티스트다. 큐레이터인 여자 친구 브리아나(타요나 패리스)와 함께 생활하며 자신의 작품으로 미술계에서 좀 더 인정받길 원하는 안소니는 도시에서 떠돌고 있는 캔디맨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아 자신의 작품을 완성하려고 한다. 거울을 보고 캔디맨을 5번 부르면 실제로 캔디맨이 나타나 부른 사람을 죽인다는 이야기는 캔디맨이라는 이름을 누군가 거론할 때마다 불편하거나 조금은 공포스러운 느낌이 들게 만든다.
안소니는 아직 미술계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아웃사이더다. 큐레이터로서 인정받고 있는 브리아나의 도움으로 어떤 식으로든 세상에 자신의 그림을 보여주고 인정받으려고 한다. 영화 속 주요 인물들은 모두 흑인들이다. 그 등장인물들 사이에서도 안소니는 조금 더 아웃사이더처럼 보인다.
▲ 영화 <캔디맨> 장면 |
ⓒ 유니버설 픽쳐스 |
영화 속 안소니의 뒤를 따라가게 되는 관객은 그가 캔디맨의 전설에 그토록 몰입하고 빠져드는 이유를 완전히 이해하긴 어렵다. 하지만 영화를 끝까지 본 관객이라면 그가 왜 그렇게 그것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는지를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스포일러를 최대한 배제하고 이야기하자면 안소니는 현재의 사회에서 완전히 소외된 인물이라는 점에서 캔디맨과 비슷한 삶의 궤적을 따라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가 그렸던 많은 그림들은 그의 의도와는 다르게 해석되고, 그와 가까운 여자 친구조차 그가 그린 그림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특히 영화 중반 그의 작품을 취재하던 백인 기자는 흑인 예술가들이 땅값을 올리는 데 이용되는 바보 같은 존재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그의 작품을 이용하려 한다. 그런 백인 기자의 말에 안소니는 큰 실망감과 분노를 느낀다.
캔디맨의 전설에서 캔디맨은 한쪽 손이 없어 갈고리로 만든 존재다. 그가 아이에게 캔디를 준 후, 그다음에 그를 잡기 위해 그의 앞에 나타난 백인 경찰들은 인정사정없이 그를 폭력으로 제압한다. 거기엔 어떤 망설임도 없으며 상대방의 말이나 변명을 들어볼 생각조차 없다. 영화는 후반부 이 캔디맨의 전설을 아주 오랜 전으로 돌려 흑인으로서 피해를 받았던 최초의 피해자의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렇게 희생된 최초의 캔디맨은 현대로 오면서 여러 캔디맨을 만들었고, 여러 사람에게 전설을 전달하며 공포심을 통해 여전히 건재하는 것을 보여준다.
캔디맨의 의미
이런 캔디맨은 바로 온갖 차별 속에 희생당한 보이지 않는 흑인들을 의미한다. 차별을 받고 폭행당해 목숨을 잃은 흑인들은 세상에 제대로 항의도 해보지 못한 채 유명을 달리했다. 세대를 이어가며 내려온 그 차별과 폭력은 현대로 오며 그 방법을 달리했을 뿐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영화 말미 캔디맨은 그 피해 사실을 주변에 알리라는 말을 브리아나에게 전한다. 그 이야기는 어떤 권리 없이 희생당한 흑인들의 이야기를 계속해야 한다는 말처럼 들린다. 언론이나 대중매체가 제대로 하지 않거나 중요하지 않게 다루는 희생자들의 이야기는 캔디맨 같은 도시 괴담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그 문제가 알려질 때, 다시 그 문제가 반복되지 않고 조금이나마 개선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안소니가 하는 역할은 현재에 소외당하는 조금은 이상한 존재를 대표하는 것이다. 조금은 이상하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힌 그는 조금씩 캔디맨의 이야기에 동화되며 캔디맨의 발자취를 따라간다. 그리고 세상에 널리 알리라는 캔디맨의 말처럼 그가 겪은 일을 세상에 알릴 수 있는 어떤 사건들을 만들어나간다.
관객이 조금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과 선택을 보여주는 그의 모습은 결말부에 밝혀지는 그의 과거를 통해 그가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야기해준다. 캔디맨의 모습은 하나가 아니다. 누구나 캔디맨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캔디맨을 실제로 목격했을 때, 그것을 본 사람들의 의지에 따라 그 사건이 얼마나 주변에 알려질지 결정된다. 이 영화는 그런 상황들을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관객들을 향해 널리 이야기하라고 강조한다.
▲ 영화 <캔디맨> 장면 |
ⓒ 유니버설 픽쳐스 |
이번에 만들어진 <캔디맨>은 호러 영화 장르의 색을 띠고 있지만 사실은 메시지가 강력하게 들어가 있는 영화다. 미국 내에서 과거부터 현재까지 여전히 사회 한 켠에 자리 잡고 있는 인종 차별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은연중에 그것을 드러내기보다 아주 직접적으로 캔디맨의 전설과 그 차별을 연결함으로써 관객에게 보다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렇게 메시지가 강력하게 표현되면서 호러 영화로서의 수위나 효과는 상대적으로 덜 돋보인다. 그래서 호러 영화라는 느낌이 덜하고 공포스럽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캔디맨의 배우 토니 토드가 분장하고 잠깐잠깐 등장했을 때 무서운 느낌이 조금 들긴 하지만 영화 전반적으로는 다소 지루하고 딱딱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 사회비판 영화로서는 흥미롭게 볼 수 있지만 정통 호러 영화를 기대한 관객들이라면 조금 실망스럽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이 영화를 연출한 감독 니아 다코스타는 흑인 여성 감독으로 2018년에 <두 여자>라는 영화로 트라이베카영화제에서 수상을 하기도 했다. 또한 2022년에 개봉 예정인 <캡틴 마블>의 두 번째 영화 연출을 맡고 있기도 하다. 그는 이 영화의 제작도 맡고 있는 조던 필 감독과 같이 각본 작업을 하면서 이 영화를 만들었는데, 그래서 이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에 조던 필 감독 특유의 기괴한 감성이 담겨 있기도 하다.
비록 공포스러운 느낌은 덜하지만 과거 조던 필 감독의 영화가 그랬던 것처럼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를 각기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은 영화다. 이 영화를 보는 관객의 평가가 어떠하든 보여주고자 하는 메시지만큼은 명확히 전달하는 영화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김동근 시민기자의 브런치, 개인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합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