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 압박에 기밀정보 요구까지..美 무리수에 당혹스러운 K-반도체
판매·재고량, 고객, 공급 확대 방안 등 민감정보까지 요구
사상 유례 없는 요구에 곤혹..신중 모드 속 깊어지는 고심
미국 정부가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을 진단한다는 명분으로 삼성전자 등 주요 반도체 기업들을 상대로 제품 판매량과 재고량 등 민감한 정보를 요구하면서 기업들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형식적으로는 자발적인 제출 요청이지만 45일 이내라는 시한을 정해놓고 제출하지 않을 경우 별도의 조치에 나설 수 있다는 점을 언급하면서 사실상 반강제적 성격을 띠고 있어 삼성전자 등 국내 반도체 기업들에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27일 반도체업계와 외신들에 따르면 미국 상무부 기술평가국은 지난 24일(현지시간) 관보를 통해 '반도체 공급망 위기에 대한 공개 의견 요청 알림'이라는 공지를 게재하고 공급망 전반에 걸친 기업들에 대해 설문조사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이번 설문조사는 미국 정부가 전 세계적인 반도체 공급난의 원인을 파악해 해결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마련한 조치다. 백악관은 전날인 23일(현지시간) 화상회의 형식으로 3차 반도체 회의를 소집해 주요 글로벌 기업들과 반도체 공급 부족 현황과 이를 타개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했다.
이 회의에는 지난 4월과 5월 1·2차 회의때와 마찬가지로 삼성전자를 비롯, 인텔·TSMC·마이크론·애플·마이크로소프트(MS)·GM·포드·BMW 등 다양한 반도체 제조 기업과 수요 기업들이 참석했다.
회의를 주재한 지나 러몬도 상무부 장관은 이 자리에서 전반적인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을 점검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이에 이날 회의에 참석한 기업들에게 향후 45일 이내에 제품 판매량과 재고량 등의 기업 정보를 제출할 것으로 요구했고 이를 위해 설문조사를 시작한 것이다.
지난해 말부터 지속되고 있는 차량용 반도체 등 일부 품목의 공급난은 공급망에 문제가 있다는 방증으로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시장 상황을 보다 면밀하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설문조사에 활용되는 설문지에는 조사 대상 회사가 제조 가능한 반도체 제품 유형부터 제품별 월별 매출, 3대 고객사 리스트와 공급 제품 예상 매출과 비중, 현재 일별 재고 수준까지 자세히 기재하도록 돼 있다.
특히 지난해부터 이어진 반도체 공급 부족 사태와 관련해 수요 급증시 공급 확대 방안, 구체적으로 향후 6개월 동안 공급을 확대할 수 있는 방안까지 기술하도록 돼 있다.
이에대해 국내 반도체 업계에서는 미국 정부의 요구가 유례가 없이 과도한 것이라면서 매우 난감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설문조사 내용들이 기업들로서는 상당히 민감한 영업 기밀일 수 밖에 없어 공개하기가 쉽지 않은 것들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요구하는 정보를 그대로 넘겨줄 경우, 수치뿐만 아니라 기업의 생산과 영업 노하우 등이 그래도 노출될 가능성에 대한 우려도 크다.
미국 정부가 요구한 정보가 외부에 노출될 경우, 반도체 기업의 경쟁력 뿐만아니라 비공개가 원칙인 고객사 정보까지 그대로 드러나면서 제품 생산과 영업에 큰 차질이 빚어질 수 있다.
기업이 보유한 반도체 제품의 재고와 생산력(캐파·CAPA) 등의 정보가 경쟁사나 고객사에 노출되면서 가격에 악영향을 미치고 협상력도 그만큼 떨어질 수 밖에 없다. 관련 정보 노출을 극도로 꺼리는 수요 기업들의 성향상 신규 고객 확보에도 악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고 법적인 책임까지 져야하는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다.
업계 한 관계자는 “아직 모든 것이 불명확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미국 정보가 반도체 기업들의 정보를 원한다는 것”이라며 “결국 정보의 수준이 관건일텐데 반도체 패권을 잡기를 원하는 미국인 만큼 기업들에게 상당한 부담스러운 요구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세계 최강대국이자 반도체 주요 시장인 미국 정부의 요청을 그대로 무시하기는 어려운게 현실이다. 또 설문조사 제출을 자율에 맡겼지만 미국 정부가 별도의 조치가 있을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 상황이어서 향후 보복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또 설문조사 대상이 이날 회의에 참석한 기업들로만 국한되지 않고 범위가 더 넓어질 수 있어 SK하이닉스 등 다른 반도체 기업들로까지 불똥이 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국내 기업들로서는 미국 정부의 현지 투자 요구와 함께 민감한 기밀 정보까지 내줘야 하는 처지에 직면할 수 있어 대응책 마련에 고심이 깊어질 수 밖에 없다.
특히 미국 정부가 주도하는 조사라는 점에서 국내 반도체 기업으로서는 인텔과 애틀 등 미국 경쟁사들로의 정보 유출도 우려할 수 밖에 없다.
이번 설문 조사가 외국 기업들뿐만 아니라 자국 기업들도 대상으로 하고 설계 및 제조 기업뿐만 아니라 자동차와 전자 등 수요 기업들에게도 함께 이뤄지기는 하지만 자국 정부와 외국 정부에 관련 정보를 제출하는 것에 있어서의 온도차는 분명히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국내 반도체들은 당분간 상황을 주시하면서 미국 정부의 의중을 파악하는데 집중할 것으로 보인다. 설문조사 시한이 오는 11월8일까지로 아직 한 달 이상 시간이 남아 있는 만큼 이후 상황 변화를 살피며 제출할 정보 수위를 결정하는 신중한 접근을 취할 것으로 보고 있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미국 정부의 요구가 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어서 반도체 제조 기업뿐만 아니라 수요 기업들도 의사 결정을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며 “제출할 정보 수준을 놓고 기업들간 치열한 눈치 싸움이 전개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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