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순의 화가 박서보 "마음이 병든 시대, 치유의 예술이 답이다"
색채묘법 근작 16점 전시
"자기 표현보다 자기 비움
스트레스 보듬고 흡인해야"
"이제 내가 지구에 살아 있을 시간이 별로 많지 않다. 죽어서 후회하지 않으려고, 무덤에 가서 후회하지 않으려고 한다."
올해 아흔 살인 박서보(90) 화백이 최근 기자들 앞에서 털어놓은 얘기다. "요즘에도 지팡이를 짚고 서서 하루 5시간 연필로 선을 긋는다"는 그는 "다리에 힘이 없어서 자꾸 넘어진다. 며칠 전에도 넘어져 얼굴을 다쳐 꿰맸다. 그래도 2019년부터 그려오고 있는 그림은 내 인생을 걸고 완성하고 싶다"고 했다.
박서보 화백의 개인전이 서울 삼청동 국제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2000년대 이후 자연에서 영감을 받아 작업한 근작 16점을 한자리에 모았다. 이른바 '색채 묘법'이라 불리는 그의 작품들이다.
박서보의 묘법(描法·Ecriture) 연작은 1970년대 초 연필 묘법으로 시작됐다. 공책에 글씨 연습을 하던 둘째 아들이 노트 네모 칸 밖으로 글씨가 삐져 나가자 화가 나서 빗금을 막 치던 모습에서 착안한 기법. 박 화백은 "그림은 수신을 위한 도구라 생각했는데, 그것을 본 순간 '저게 바로 체념이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의 초기 묘법이 반복되는 행위를 통해 자신을 비우고 수신(修身)하는 과정에 중점을 뒀다면, 후기에 시작한 색채 묘법은 손의 흔적을 강조하는 대신 일정한 간격의 고랑으로 형태를 만들고 풍성한 색감을 강조한 것이 특징이다.
이번 전시에서 단연 시선을 사로잡는 건 매혹적인 색(色) 그 자체다. 그가 사각 프레임 안에 담아놓은 홍시색, 벚꽃색, 유채꽃색, 와인색, 단풍색, 황금 올리브색이라 이름 붙인 색들이 탄성을 자아낸다.
"자연이 내 스승"
"자연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운다"는 그는 "개인전을 위해 일본을 찾았다가 나를 태워죽일 듯이 새빨갛게 불타오르는 단풍을 보고 '악'하고 비명을 지른 적도 있다. 내가 쓰는 색은 모두 자연이 애써서 이룬 것들에서 왔다"고 말했다.
제주도 해변도로에서 본 하늘과 바다, 밤에 아파트에서 내려다본 한강 다리 등도 그의 그림에 영감을 주었다. 구도도 색채도 모두 자연에서 나왔다. 특히 "색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치유하기 위한 것"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색채 치유론'이다. 박 화백은 "21세기 디지털 시대에 사회변화 속도가 엄청 빨라지면서 수많은 사람이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온 지구가 스트레스 병동이 됐다. 21세기 예술은 치유의 예술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나를 표현한답시고 감정을 토해내고 밖으로 분출하는 것이 남을 공격하는 행위에 가깝다면, 그 치유는 "자연의 색채로 사람을 끌어들이고, 보듬고, 보는 이의 고뇌와 스트레스를 흡인지처럼 빨아들이는 것"이라고 했다. "내 메시지를 강요하는 대신에 나를 비워내고 화면에 정적인 고요함과 리듬감 있는 활력만을 남겨둬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그림이 보는 이의 마음을 위로하고 치유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치유의 예술이다."
1931년 경북 예천 생인 박서보는 홍익대를 졸업하고 1962년 처음 강단에 선 후 홍익대 미술대학 교수(1962~1997)와 학장(1986~1999)을 역임했다. 한국 현대미술의 전위적 흐름을 주도하고 평생 그림을 그렸으나 인지도에 비해 그림이 잘 팔리는 작가는 아니었다.
하지만 2010년 들어 세계 미술계에서 단색화가 주목받으며 세계 주요 컬렉터들에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영국의 화이트큐브에서만 2016년 첫 개인전 이후 2021년 3월 대규모 회고전까지 총 네 차례의 개인전이 열렸으며, 2019년 프랑스 파리 페로탕에서도 개인전을 열었다. 그가 기자들 앞에서 "한국에서 대학을 나오고 끝까지 살아남아 단색화를 일궈내고 세계화했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이유다.
지난 8월 22일부터는 프랑스 프로방스 지역 샤토 라코스트( Château La Coste) 로저스 갤러리에서 그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지난 10년 사이 작품값도 크게 상승해 100호 크기의 작품은 3억5000만~4억 원 선에 거래되고 있다.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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