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 in 이건희 컬렉션] 체념·응전 서린 말들의 포효.. 세 여인 헌신에 피어난 예술혼

손영옥 입력 2021. 9. 26.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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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운보 김기창의 '군마도'
운보 김기창의 ‘군마도’. 종이에 수묵 채색, 1955년, 205×408.2㎝. 김기창은 한국화가로서 필획이 무르익기 시작한 40대에 격정이 넘치는 붓질로 달리는 군마, 싸우는 소 등을 소재로 그림을 그렸다. 김기창은 여러 군마도를 남겼는데, 이건희컬렉션에 포함된 이 작품이 화면 구성이나 붓질의 힘 등에서 압권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무리를 이룬 말이 포효하고 있다. 각기 다른 방향으로 머리를 향한 채 날뛰는 말들의 기세가 얼마나 등등한지 가로 4m 대형 화폭을 뛰쳐나올 듯하다. 치켜든 목, 뒤틀린 몸뚱이 등 근육의 움직임을 붓질 몇 번으로 표현한 솜씨가 놀랍다. 나부끼는 말갈기와 말꼬리 털 역시 붓질 몇 번으로 과감하게 끝냈다. 말의 앞모습, 옆모습, 뒷모습을 골고루 보여주면서도 일획의 붓질로 역동성을 표현해 ‘한국화의 교과서’라는 평가를 듣는 이 작품은 한국화가 운보(雲甫) 김기창(1913∼2001)의 ‘군마도’(1955)다. 운보가 6·25전쟁이 끝난 후 폐허를 딛고 재개된 대한민국전람회에 추천위원 자격으로 1956년 출품했다. 그는 여러 군마도를 남겼지만 이건희 컬렉션에 포함돼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된 이 작품이 단연 압권이다.


운보의 작품 세계는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들다. ‘군마도’가 보여주는 것처럼 힘이 넘치는가 하면 인물화 화조화에선 놀라울 정도로 꼼꼼한 붓질을 보여준다. 민화풍의 ‘바보 산수화’나 세련된 현대적 풍속도, 추상적 이미지의 작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소재를 소화하면서 섬세함과 분방함을 자유자재로 오갔다. 한마디로 붓을 갖고 논 작가라고 할 수 있다.

‘군마도’는 작가의 기량이 완숙해지던 40대 장년기의 작품이다. 이 시기에 그는 싸우는 소, 격렬하게 달리는 군마 등을 소재로 격정적인 화면을 선보였다. 이 그림을 보면 말의 눈빛에서 복잡한 감정이 읽힌다. 청천벽력처럼 갑자기 청력을 잃어버린 사내가 삼켜야 했던 분노와 한숨, 체념과 응전이 엉겨 있는 눈빛이다. 운보는 청각장애인이었다.

7세 때였다. 보통학교에 들어간 그해 소풍 겸 운동회에 다녀온 후 장티푸스를 앓았는데 후유증으로 청각을 잃었다. 12세에 뒤늦게 2학년에 복학했지만 수업을 따라가기 힘들었던 운보는 무료함을 달래려고 수업시간에 공책에 사람, 새, 기차 등 그림을 그렸다. 아들의 재능을 알아본 어머니는 17세의 늦은 나이로 보통학교를 졸업한 그를 당대 최고 화가였던 이당 김은호의 화실에 입문시켰다. 감리교 신자인 어머니 한윤명씨는 진명여고를 졸업하고 교사와 간호사로 일한 신여성이었다. 어머니의 판단이 옳았다. 운보는 1931년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출품해 입선했다. 이당의 문하생이 된지 6개월 만이었다. 장애인 아들에게 살길을 열어준 어머니는 아들의 예술적 성취를 제대로 지켜보지 못한 채 32년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이후 운보를 뒷바라지해 준 이는 외할머니였다. 운보는 자신의 인생에 영향을 끼친 이로 세 사람을 꼽는데 어머니와 외할머니, 아내 우향 박래현(1920∼1976)이다.

평생의 예술 동지이자 경쟁자인 박래현을 만난 것은 43년이다. 그 무렵 운보는 원로 대접을 받을 만큼 미술계의 거물이 돼 있었다. 선전 첫 입선을 포함해 내리 6회 입선하고 내리 4회 특선을 한 뒤 41년부터 추천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군산 갑부의 딸인 박래현은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 3학년에 재학 중 선전에 출품한 ‘장’(粧)이 특선으로 총독상을 받게 되자 시상식 참석차 경성에 왔다. 운보의 명성을 듣고 지레 노화가라 생각했던 그는 인사를 갔다가 30세 노총각인 그를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둘은 3년간 필담을 나누며 열애한 끝에 46년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했다. 결혼식장에 박래현의 부모는 모습을 비치지 않았다.

박래현은 대단한 아내였다. 47년 첫 딸이 태어난 후 필담만으로는 삶의 기쁨과 슬픔을 나누는 데 한계가 있다고 느꼈다. 그 무렵 외국 영화에서 청각장애자가 말을 하는 걸 보고 남편 운보에게도 입을 움직여 말하는 구화법을 가르쳤다. 각고의 노력 끝에 운보는 어눌하게나마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할 수 있게 됐다. 아내는 남편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갔다. 때때로 남편의 발등을 밟아가며 발음의 억양을 조절해줬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두 사람은 결혼 때 약속한 대로 47년 첫 부부전 이후 지속적으로 공동전시회를 가졌다. 아내가 76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모두 17차례 부부전을 했다. 한국화를 했던 두 사람이 해방 이후 한국화의 현대화를 모색하며 동시에 입체파의 영향을 받은 작품을 시도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운보는 50년대 들어 군마와 투우를 그리며 새로운 화풍을 개척했다. 한국화가 갖는 기운생동의 붓질이 가장 잘 발현된 장르인데, 가정의 안정 속에 예술가로서 아내와 경쟁이 한껏 달아오르기 시작할 무렵에 탄생했다.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신에게 선택받은 몸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일곱 살의 어린 내가 열병을 앓아 귀를 먹었겠는가. 어쨌든 나는 세상의 온갖 좋고 나쁜 소리와 단절된 적막의 세계로 유배됐다. 그래서 나는 세상에서 버려진 인간인 것을 절감했다. 그러나 나는 소외된 나를 찾기 위해 한 가지 길을 선택했다. 그것은 예술가가 되는 것이며, 나는 화가가 됐다.”

세상의 소리와 단절된 채 적막의 세계에 유배돼 살아오며 얼마나 세상을 갈구했을까. 현실에선 들리지 않던 소리를 화폭 속에서나마 재현하고자 군마도를 그리지 않았을까. 먼지를 일으키며 힘차게 내달리는 말발굽 소리, 포효하는 울음소리가 군마도에서 들려오는 듯하다.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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