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장비번 큰소리 외쳐야만 하는 그들..두 경찰이 손 내밀다
“이름과 주민등록 번호 불러주세요.” “사인은 여기에 제가 대신 해드릴게요.”
가끔 경찰서 민원실에서 마주치는 장면이다. 다른 민원인이 듣는데도 주소와 이름, 주민등록번호가 큰 소리로 공개된다. 자신의 서명까지, 문서에 적는 모든 것들을 도움을 받아야 한다. 민원 창구를 찾은 시각장애인들의 얘기다.
비밀번호 큰소리로 외치며 사는 그들

서울 마포경찰서에선 이런 시각장애인들에게 소소하지만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법정 용어로 가득한 경찰서의 민원 문서를 점자와 음성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작은 기적’은 마포경찰서 정보안보외사과의 한창원 경사의 안타까운 마음에서 시작됐다.
지난 5월 민원실에 들어온 50대 시각장애인을 만났을 때였다. 그 남성은 ‘이름’ ‘주소’ ‘나이’ 등을 묻는 활동보조인에게 계속 답변만 하고 있었다. 한 경사는 “대답만 하는 시각장애인을 보며 그분이 공문서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는지 의구심이 들었다”고 했다. 그때 개인정보 등을 수동적으로 제공해야 하는 처지를 처음으로 생각해 보게 됐다고 한다.
한 경사는 자신의 팀장인 한상훈 경감과 그 고민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 서울경찰청에서 수년간 정보 업무를 담당하면서 시각장애인 단체들과 인연이 있었던 한 경감은 한 경사와 함께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도움이 될 방안에 대한 자문을 구했다. 이후 점자 문서 제작, 음성 녹음 등을 시작했다. 출근 전에 4개 단체를 10여 차례 방문하며 도움을 구했다고 한다.
“서식 직접 읽으니 안전함 느껴”

민원 서식을 모아둔 책자에 과거엔 없던 서식이 추가됐다. 저시력자를 위해 보통 활자보다 훨씬 크게 인쇄된 접수 서류도 있고, 전맹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 서식도 있다. 맨 앞장과 각 서식의 상단에는 QR코드가 있다. QR코드를 스마트폰으로 찍으면 문서의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주는 음성 파일이 재생된다. 점자를 익히지 못한 시각장애인도 문서의 내용을 숙지할 수 있다.


점자·음성 민원 서식은 하성준 시각장애인연합회 사무총장이 검토했다. 그는 “과거 고소장을 접수하기 위해 경찰서를 찾았다가 몇 시간이 헤맸던 기억이 났다. 어떤 정보들이 필요한지 몰라 우왕좌왕하다가 결국 접수를 포기했었다”고 말했다. 그는 “활동보조인도 법률 전문가가 아니어서 경찰서에선 헤매게 된다. 시각장애인에겐 흔한 일”이라고 했다. 하 사무총장은 “이번 서식에는 모든 내용이 꼼꼼하게 점자와 음성, 그리고 확대문자로 서비스된다. 이 한 권에 전맹과 약시 등 모든 상황의 시각장애인이 다 배려됐다”고 반겼다.
마포서에서 민원 서식을 시연한 김훈 시각장애인연합회 단장은 “점자 문서를 한줄 한줄 읽으면서 이젠 안전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고 했다. 여전히 서류 작성에는 도움을 받아야 하지만, 어떤 개인정보를 제공해야 하는지 왜 필요한지를 혼자서도 이해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라고 했다.
투입 예산 22만원…돈보다 관심이 부족했다
새로운 서식을 갖추는 데 든 돈은 22만원이다. 점자 프린터기 사용료, 인쇄료, 인건비 등을 합친 액수다. 돈보다는 관심이 부족했던 셈이다. 한 경사는 “당연히 있어야 하고, 있는 줄 알았다. 이제라도 도입해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한 팀장은 “몇 명이나 이용하겠느냐는 지적도 있었다. 하지만, 일 년에 한 명이 와도 그 민원인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석경민 기자 suk.gyeong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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