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패킹 성지 굴업도, 고수는 홀숫날 들어간다

손민호 2021. 9. 24.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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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섬여행 ④ 굴업도 백패킹


굴업도는 인천에서 최소 3시간 걸리는 먼 섬이다. 이 먼 섬으로 전국에서 배낭 짊어진 백패커가 몰려든다. 특히 섬 남쪽 개머리언덕은 백패킹 성지로 통한다. 유튜버 ‘치도(오른쪽)’, 백패커 ‘채울’과 함께 성지를 순례하고 왔다. 손민호 기자
인천 먼바다에 풍문 같은 섬이 떠 있다. 굴업도(掘業島). 이름도 낯설다. 엎드려 일하는 사람처럼 생긴 섬이란 뜻이다. 드론 띄워 내려다보니 초원 펼쳐진 개머리언덕이 젊었을 적 아버지 등처럼 널찍하다. 수크령 흐드러진 이 해안 언덕이, 백패커라면 누구나 안달하는 꿈의 성지다. 사슴 뛰어놀고 송골매 날아다니는, 인공의 흔적이라곤 희미하게 드러난 길이 전부인 거짓말 같은 풍광에 이끌려 20㎏ 넘는 배낭 짊어진 백패커가 꾸역꾸역 찾아온다. 그리고 평생 잊지 못할 밤을 보낸다.

한국의 갈라파고스

드론으로 촬영한 굴업도 목기미해변. 물이 빠지면 1억년 전 형성된 지형이 드러난다. 손민호 기자, [중앙포토]

굴업도는 작은 섬이다. 1.7㎢ 면적으로 여의도 절반만 하다. 섬은 대체로 평평하다. 해발 100m 언저리의 산과 언덕이 길게 누운 섬 양쪽에 자리한다. 여객선 선착장은 목기미해변 곁에 있고, 섬의 유일한 마을은 큰말해변 주변에 있다. ‘큰말’이 큰 마을의 준말이다.

굴업도는 CJ그룹 사유지다. CJ그룹이 2006년 굴업도에 골프장을 짓기 위해 섬의 98.5%를 사들였다. 환경단체의 반발에 막혀 골프장 사업은 포기했지만, 소유권은 여전히 갖고 있다. 그래도 주민 10여 명이 관광객을 상대로 밥도 팔고 방도 팔며 살고 있다.

굴업도 명물 코끼리바위. 진짜 코끼리와 정말 비슷하게 생겼다. 손민호 기자, [중앙포토]

굴업도는 천혜의 비경을 간직한 섬이다. 하나 아름다운 섬이라고만 하면 곤란하다. 굴업도의 자연은,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가치를 품고 있다. 이를테면 지리학자에게 굴업도는 교과서 같은 섬이다. 약 9000만년 전 화산활동으로 생긴 지형이 거의 훼손되지 않고 남아있어서다. 목기미해변, 코끼리바위 같은 굴업도 명물은 그림 같은 풍경을 넘어 지리학적으로 매우 희귀한 지형이다. 문화재청은 굴업도를 천연기념물로 지정 예고하면서 “국내 어디서도 보기 힘든 해안지형의 백미”라고 평가했다.

개머리언덕에는 야생 사슴 수십 마리가 산다. 손민호 기자, [중앙포토]

굴업도는 국내 최대 송골매 서식지이자,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 1급 보호종 먹구렁이 서식지다. 세계적 희귀종인 왕은점표범나비와 검은머리물떼새도 발견된다. 하나 굴업도를 대표하는 야생동물은 따로 있다. 개머리언덕을 어슬렁거리는 사슴 수십 마리다. 옛날 섬 주민이 방목하던 사슴이 세월이 흘러 야생동물이 됐다. 텐트를 치고 있으면 가까이 와서 기웃거리는 녀석도 있다.

별 헤는 밤

물 빠진 큰말해변을 걷고 있는 치도와 채울. 손민호 기자, [중앙포토]

굴업도 백패커는 배에서 내리자마자 큰말해변을 지나 섬 남쪽 개머리언덕으로 향한다. 은근히 경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개머리언덕에 먼저 도착해야 좋은 사이트를 차지할 수 있어서다. 굴업도 백패킹은 개머리언덕에서 밤을 보낸 뒤 이튿날 목기미해변 너머를 돌아보고 나오는 1박2일 여정이 대부분이다.

선착장에서 개머리언덕 끝까지는 2.6㎞ 거리다. 하나 1시간이 더 걸린다. 배낭 메고 산 두 개를 잇달아 넘어야 해서다. 백패커 ‘채울(김채울·26)’과 유튜버 ‘치도(박이슬·26)’도 23㎏ 넘는 배낭 짊어지고 그 길을 걸었다. 땀이 뚝뚝 들었지만, 즐거운 표정은 잃지 않았다. MZ세대의 걸음은 씩씩했고 발랄했다.

굴업도 백패킹의 하이라이트는 일몰과 함께 시작된다. 손민호 기자, [중앙포토]

백패커가 텐트를 치는 개머리언덕엔 드넓은 초원 말고 아무것도 없다. 가게도, 화장실도, 전기도 없다. 굴업도 백패커의 배낭이 유난히 크고 무거운 까닭이다. 화기를 금지하지는 않지만, 백패커 대부분이 알아서 불을 쓰지 않는다. 굴업도까지 들어오는 백패커는 캠핑 고수가 대부분이다. 특히 자연주의 캠퍼가 많다. 쓰레기는 아예 만들지도 않으며, 외려 쓰레기가 보일 때마다 주워 담는다. 채울과 치도도 찬물에 먹는 간편식과 커피를 챙겨 왔다.

굴업도 백패킹의 하이라이트는 일몰과 함께 시작한다. 저녁 해가 하늘과 바다에 시뻘건 기운을 토해내고 사라지면, 굴업도의 새로운 주인이 나타난다. 굴업도의 밤을 지배하는 별이다. 인공조명이라곤 은은히 비치는 텐트 불빛이 전부였던 순전한 밤, 별이 이렇게 밝았었나 새삼 깨달았다. 개머리언덕에 팔베개하고 누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별을 헤아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굴업도 이후 백패킹은 시시하겠다고.

■ 여행정보

굴업도

굴업도는 인천항에서 85㎞, 덕적도에서 13㎞ 떨어져 있다. 굴업도에 가려면 덕적도에서 배를 갈아타야 한다. 인천항에서 덕적도까지는 1시간 남짓 걸린다. 덕적도에서 1시간가량 기다린 뒤 갈아타는데, 덕적도~굴업도 노선은 홀·짝숫날에 따라 노선이 달라진다. 짝숫날은 덕적도에서 출발한 배가 문갑도·지도·울도·백아도 등 4개 섬을 들렀다가 맨 마지막에 굴업도에 들어가고, 홀숫날은 역순으로 순회한다. 하여 백패커는 홀숫날을 골라 굴업도에 들어간다. 짝숫날에는 덕적도~굴업도 노선이 2시간 남짓 걸리고, 홀숫날엔 1시간이 채 안 걸린다. 홀숫날을 골라도 인천항에서 굴업도까지 3시간이 걸린다. 짝숫날은 5시간은 각오해야 한다. 경북 포항에서 217㎞ 거리인 울릉도도 세 시간 뱃길이다. 굴업도는 먼 섬이다 그래도 백패커는 찾아간다. 성지여서다.

굴업도=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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