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이 뭐길래.."10년차 일베도 모른다"? [국민적 관심사]

송태화 2021. 9. 23.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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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호남 경선 화두로 떠오른 '수박' 논란
이낙연 측 "일베식 호남 비하 발언" 비판에
일베어 혐오 표현 활용 사례 있지만 많진 않아
국민일보DB


더불어민주당 대선 경선의 최대 격전지로 꼽히는 호남 대첩(25~26일)을 앞두고 ‘수박’ 표현을 둘러싼 논쟁이 한창이다. 민주당 대선 주자인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성남시 대장동 개발사업 의혹을 반박하면서 쓴 ‘수박’이 극우 성향 온라인 커뮤니티 ‘일간베스트 저장소’(일베)에서 광주 시민을 조롱하는 의미로 사용됐다는 게 알려지면서다.

‘수박’을 둘러싼 공방전은 두 의견으로 압축된다. 이 지사와 당내 경선을 벌이는 이낙연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측은 ‘수박’을 일베에서 사용하는 혐오 표현으로 규정했다. 일베에서 5·18 당시 머리에서 피를 흘리는 광주 시민을 조롱하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반면 이 지사 측은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을 의미하는 일반적인 관용구”라고 항변했다. 누리꾼들도 포털사이트 뉴스 게시판 등에서 이 지사의 수박 표현을 놓고 의견이 엇갈리는 모습이다.

그렇다면 ‘수박’은 일베 표현일까. [국민적 관심사]가 실제로 ‘수박’이 일베를 포함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5·18 민주화운동 희생자나 호남 지역을 비하하는 표현으로 사용됐는지 살펴봤다.

이재명 경기도지사 페이스북 게시글 캡처
정치권 ‘수박 대전’ 확산… 수박은 혐오 표현?

‘수박 논쟁’은 “우리 안의 수박 기득권자들이 있다”는 지난 21일 이 지사의 페이스북 글에서 시작됐다. 수박이라는 용어가 일베에서 사용되는 혐오 표현이라는 주장이 나오며 부적절하다는 비판이 일었다.

이 전 대표 대선 캠프의 이병훈 대변인은 “이낙연 캠프와 우리 사회 보수기득권자들이 한통속으로 자신을 공격하고 있고 자신은 피해자라는 생각을 담고 싶었나 싶지만 사실관계가 맞지 않는 혐오 표현”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경선 내내 이재명 후보의 지지자들은 이낙연 후보 지지자를 문파, 똥파리, 수박이라고 공격하면서 차별, 적개심, 언어적 폭력을 선동해왔다. 호남을 비하, 배제하는 용어 사용을 중단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이재명 캠프와 지지자들은 이런 요청에 대해 ‘관용구로 사용했을 뿐이다’며 별것 아닌 일로 치부했다”고 비판했다.

야권에서도 이 지사의 혐오 표현을 힐난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하태경 국민의 힘 의원은 23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뉴스쇼)에 출연해 “수박은 일베식 호남 비하 발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전날 페이스북 게시글을 통해 “수박은 ‘택배’와 더불어 일베들이 5·18 영령들을 비하하는 데 동원한 표현”이라며 “한때 일베 회원이었다는 이재명 후보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하필 호남 경선을 앞두고 ‘수박 기득권’ 운운하며 일베 용어를 대선판에 소환한 저의가 무엇인가”라고 묻기도 했다.

이에 맞서 이 지사 측은 ‘수박’이 일베 용어가 아닐뿐더러 지역감정 등을 조장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는데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이 지사는 “(수박은) 겉과 속이 다르다고 일상적으로 쓰는 용어인데 그렇게까지 해석해가면서 공격할 필요가 있나”라고 해명하기도 했다.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도 ‘수박’ 논쟁에서 이 지사의 손을 들어줬다. 이날 뉴스쇼에서 “개혁에 말만 앞서고 실천하지 않는 것에 좌절한 지지자들이 민주당에 실망했다는 표현을 ‘겉 다르고 속 다르다’며 과일 수박에 비유한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이것을 ‘일베 용어’라거나 ‘호남 특정 지역 비하’라는 주장은 어처구니없다”고 이 전 대표를 직격했다.

지난 17일 오전 광주 동구 전일빌딩245에서 광주·전남·전북 특별메시지 발표 기자회견을 마친 이재명 경기도지사. 연합
정작 일베선 “수박이 5·18 비하?” 갸우뚱

전혀 상반된 주장이 맞선 가운데 실제로 ‘수박’이 일베 용어인지를 확인해보기 위해 이번 논란이 시작되기 이전 ‘수박’ 키워드가 들어간 200여 개의 일베 게시글들을 조회했다.

그 결과 일단 일베 게시글 중에 호남 비하 용어로 사용된 실례는 거의 없었다. 다만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사진에 수박을 합성해 조롱한 회원이 있었다. 또한 기간과 범위를 넓혀 수년 치 게시글을 살펴본 결과 일베를 비롯해 친문 성향의 온라인 커뮤니티 ‘클리앙’ 등에서 광주특산품이 무등산 수박임을 빗대 광주 시민을 비하하는 용도로 사용된 사례가 일부 발견됐다.

이렇다 보니 논란의 근원지인 일베에서는 ‘수박 논쟁’을 지켜보며 갸우뚱한 반응을 보인다. 일베 회원 상당수는 혐오 표현으로 범용 되는 ‘수박’의 뜻을 “몰랐다”고 했다. ‘수박 논쟁’이 촉발된 후 이에 관한 일베 게시물을 살펴본 결과 “수박이 왜 일베 표현이냐”는 취지로 작성된 게시글들이 다수 올라왔다.

한 일베 회원은 “10년간 활동했지만 수박이 5·18 비하 용어로 활용됐다는 건 이번에 알았다”고 적었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수박을 일베 표현이라고 하느냐”는 다른 회원의 게시글에도 동조 의사를 밝힌 댓글이 이어졌다.

오히려 ‘수박’이란 표현은 일베가 아니라 민주당 강성 지지자들 사이에서 사자성어 ‘양두구육’(羊頭狗肉)과 비슷한 뜻으로 많이 쓰이고 있다. 민주당 소속이지만 당에 반대되는 행동을 하는 의원들을 조롱하는 의미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을 감싼 당의 행태를 지적했던 민주당 초선의원들, 지난 4월 오세훈 서울시장의 ‘상생 방역’에 공개적으로 지지 의사를 표명했던 민주당 신현영 의원 등이 일부 지지자로부터 “수박”이라고 비난을 받았던 게 대표적이다. 당내 경선이 본격화된 후 이 전 대표 지지자들은 이 지사 지지자들이 이 전 대표를 비난할 때 ‘수박’이라는 표현을 써 왔다고 주장한다.

결국 현재 정치권의 ‘수박 논쟁’은 소수 이용자의 혐오적 언급과 민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이용됐던 표현이 혼용되면서 벌어진 착시적인 논쟁으로 볼 수 있다. ‘수박’이란 표현이 정치권에서 일상적인 의미와 다르게 사용되는 측면이 있지만, 호남 지역이나 5·18 희생자를 겨냥한 혐오표현이라고 일반화하는 것은 확대 해석으로 볼 수 있다.

타인을 언어로 재단하려는 현상은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언어의 폭을 줄이고 다양한 생각과 의견의 공존을 방해한다. 단어 한마디에조차 한껏 민감해진 사회 분위기는 매 순간 엄격한 자기검열을 하게 만들 수 있다. 전문가들도 일베와 관련된 용어의 사용 여부가 사상검증과 가치 판단의 척도가 돼선 안 된다고 지적한다.

하재근 문화평론가는 “얼마 전 모 운동선수의 혐오 표현도 그렇고 일베에서 쓰였다는 이유만으로 그 말과 연관된 사람을 색출하려는 움직임이 있다”고 진단하면서 “그 단어가 실제로 일베에서 만들어진 건지도 불분명할뿐더러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발화자가 일베와의 관련성을 인식하고 썼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다만 대선 주자라고 하면, 적어도 편 가르기식 이분법적 표현 사용은 지양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수박이 비록 ‘일베 표현’은 아니더라도 진보 진영에서 변절자를 겨냥해 비난하는 용어로 사용돼왔으니 혐오를 부추길 수 있는 표현은 맞다는 지적이다.

[국민적 관심사]는 국민일보가 국민적 관심을 받는 발언이나 주장을 ‘팩트체크’하는 코너입니다. ‘저 말이 진짜인가’ 궁금하시다면 제보를 부탁드립니다.

송태화 기자 alv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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