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윤희숙이 뉴노멀이다

이정민 2021. 9. 23. 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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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민 논설실장

고발 사주 의혹, 대장동 개발 특혜 의혹 같은 대형 이슈에 가려 조명이 덜 됐지만 추석 연휴 직전 윤희숙 전 의원(국민의힘)의 ‘사직’이야말로 우리 정치사에 남을 대사건이었다고 생각한다. 윤 전 의원은 부친의 부동산 투기 의혹이 불거진 직후 곧바로 의원직 사퇴 의사를 밝혔고, 만류하는 당 지도부를 설득해 국회 본회의(13일)에서 사직안 처리를 관철했다. 물론 의원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중도 하차한 건 무책임하단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행여 의원직을 사퇴하는 것으로 의혹을 덮으려는 꼼수를 부려서도 안될 일이다. 윤 전 의원이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 재직 때 취득한 개발 정보를 이용해 부친의 부동산 매입에 관여했는지 여부는 철저한 조사를 통해 의혹의 실체를 가려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래 정치권에서 실종된 도덕적 올바름이나 언행일치를 윤 전 의원이 실천적으로 증명하려 시도했다는 점에선 용기있는 행동으로 평가할 만하다. 비록 부친의 투기 의혹이라고는 하나,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 실패를 누구보다 강도높게 비판해온 그였기에 말빚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처지이긴 했다. 그러나 대개의 정치인들은 이런 경우, 의혹 부인-논점 흐려 물타기-버티기로 대응해왔다. 그사이 의혹은 양비론으로 흐르고 진영 싸움이 벌어지며, 국민들은 정치 냉소증을 앓는다. 특히 문재인 정부 들어선 위선과 기만극이 최고조에 달해 정치가 조롱거리가 돼버렸다. 자신과 가족의 범죄를 덮기 위해 나라를 두동강 낸 조국 사태는 현재진행형이다. 법원에서 잇따라 유죄가 선고됐는데도 ‘무죄’를 외치고 있지 않은가. 대법원의 유죄 확정에도 “역사의 법정에선 무죄”라며 희생자 코스프레 하는 전직 총리도 있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 후원금 유용 의혹에 부동산 투기 의혹까지 받고 있는 윤미향 의원은 또 어떤가. 빗발치는 사퇴 여론에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았다”며 오히려 당당하다.

「 부친 투기 의혹에 의원직 내놓아
‘말에 책임지는 정치’ 실천한 결단
말과 행동 다른 내로남불을 저격
위선 정치 종지부 찍는 계기돼야

부친의 부동산 투기 의혹에 대한 도의적 책임을 지기 위해 대선 경선을 포기하고 국회의원직을 사퇴한 윤희숙 국민의힘 의원이 지난달 27일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저는 지금 저 자신을 공수처에 수사 의뢰한다″고 밝히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만약 사인간 관계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어땠을까. 신뢰할 수 없는 사람으로 낙인 찍혀 벌써 ‘퇴출’됐을 터다. 그런데 일반인보다 훨씬 높은 도덕적 수준이 요구되는 정치에선 왜 파렴치하고 부도덕한 적반하장 사례가 빈번하게 일어나는가. 탄식하는 국민을 향해 윤 전 의원은 새로운 눈금 자를 제시했다. 의원직을 반납함으로써 자신이 한 말에 책임지는 정치를 실천했다. 말 따로 행동 따로, 내로남불 정치의 급소를 가격한 ‘사건’이다. 그의 의원직 사퇴가 조명받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연휴 중 그와 나눈 대화의 일부를 소개한다.

Q : 사퇴 결정이 쉽지 않았을텐데.
A : “평생 말과 글로 살았던 사람으로서 지금까지 했던 말이 희화화되는 건 견딜 수 없었다. 배지를 살리고 말을 죽이는 것보다 말을 살리기 위해 배지를 버리는 길을 택했다.”

Q : 민주당은 ‘사퇴쇼’라고 공격했다.
A : “내가 정말로 사퇴할 줄 몰랐던 것 같다. 말을 죽이는 걸 할만큼 내겐 배지가 그 정도의 의미가 없다. 국회의원을 오래 하는게 무슨 큰 의미가 있을까. 정치에 화두를 던지고 뉴 노멀의 가능성을 던진 게 정치사적으로 더 큰 영광이다.”

Q : 뉴 노멀이란.
A : “말과 글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은 그렇게 염치없게 살진 않았다는 걸 국민들이 상기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앞으로 비슷한 사건이 나면 윤희숙이 소환될 것이다. 또 그러길 바란다.”
그의 말마따나 이제 ‘윤희숙이 뉴 노멀’이 돼야 한다. 그의 사퇴가 선례가 돼 위선의 정치에 종지부를 찍는 새로운 계기로 삼아야 한다. 정치인이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자신들의 정치 생명이 달렸음을 스스로 자각케 해 절제와 염치를 회복하는 전기가 되도록 말이다. 자신의 정치 참여는 ‘앙가주망’이라고 추켜세우면서 상대편에 대해선 ‘폴리페서’라고 비난하는 이중잣대, 전 정권 비리 수사 땐 박수치더니 현 정권 비리를 수사하려 들자 배신자 프레임을 씌워 공격하는 후안무치, 몰상식이 상식을 지배하는 사회는 정상국가도, 민주국가도 아니다. 그러니 정치가 비정상적으로 작동돼 주권자인 국민을 경시하고 모욕하려 들 때마다 ‘윤희숙’은 계속 소환돼야 한다.

이 참에 하나 더. 일반 국민의 평균적인 삶을 넘어서는 정치인의 권한과 특권을 회수하는 국민 운동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철도 이용금액을 할인해주는 것 같은 사소한 특권도 가급적 없애는 쪽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이다. 특별한 권한에 익숙해지면 특권을 당연시하게 되고, 부패에 관대해지고, 주권자를 경시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국회의원은 우리 사회 상위 1%에 준하는 대우를 받고 있다. 국회의원이 되는 순간 평균적인 국민과의 삶에서 유리돼 국민들의 아픔에 다가설 수 없다”(정진석 국회 부의장)는 고백은 진솔하다. 미국·유럽의 정치 선진국들이 정치인의 특권을 축소해가는 건 주권자인 국민이 깨어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국회의원은 세계 3위 수준의 특권 혜택을 받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정치는 3류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 둘이 아주 무관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이정민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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