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드롱 격파, 당구계 해킹한 유튜버 '해커'
구독자 7만명, 아마추어 특별 출전
프로선수에 자극 주고 흥행 이끌어
"당구가 예능? 표정 숨긴 것도 특혜"
프로당구(PBA)에 등장한 ‘당구 유튜버’ 해커가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해커는 22일 경기 고양시 소노캄고양에서 열린 ‘TS샴푸 PBA-LBPA 챔피언십’ 4강에서 다비드 마르티네스(스페인)에게 세트스코어 0-4(9-15, 7-15, 13-15, 2-15)로 졌다. 3쿠션, 7전4승제인 이 경기는 15점을 먼저 따면 이기는 방식이다.
결승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해커는 추석 연휴 기간 이변을 연출했다. 지난 19일 32강전에서 ‘디펜딩 챔피언’ 프레드릭 쿠드롱(벨기에)을 3-0으로 완파했다. 쿠드롱은 딕 야스퍼스(네덜란드), 토브욘 브롬달(스웨덴), 다니엘 산체스(스페인)와 함께 ‘당구 4대 천왕’으로 불린다. 128강부터 출발한 해커는 16강에서 김종원, 8강에서 김만수를 연파했다.
4강전을 앞두고 심판은 그의 가면을 살짝 들춰 얼굴이 맞는지 확인했다. 해커가 가면을 쓴 채 경기에 나서기 때문이다. 흰색 가면에는 미묘한 미소와 붉은 볼, 양 끝이 올라간 수염이 그려져 있다. 저항의 상징으로 통하는 ‘가이 포크스’ 가면으로, 실제 해커 그룹인 ‘어나니머스’가 사용한 적도 있다.
해커는 프로가 아닌 아마추어 고수이며, 구독자 7만 명이 넘는 인기 유튜버다. 유튜브 ‘당구 해커’에서 레슨과 이벤트 경기를 펼친다. ‘당구 하는 법을 해킹한다’는 의미로 작명했다. 가면은 3년 전 방송을 시작하며 우연히 썼다고 한다.
당구 동호인들 사이에서 그의 정체는 이미 알려져 있다. 2018년 본명과 맨 얼굴로 코리아 당구왕에 출전해 우승한 바 있다. 아마추어 대회에서 30회 이상 우승한 그는 39세 한국인 남성으로 알려졌다.
해커는 지난 6월 PBA 대회에 처음 출전해 첫판(128강)에서 마민캄(베트남)에 0-2 완패를 당했다. PBA 두 번째 대회에서 프로와 대등한 경기를 펼쳤다. TV 해설위원은 중계 중 “해커가 당구팬 마음을 해킹했다”고 했다. 해커 덕분에 대회 관심도 높아졌다. 4강전 인터넷 동시 접속자는 3만 명을 넘었다.
해커를 바라보는 시선은 엇갈린다. PBA 1부 투어에 출전하려면 챌린지 투어(3부)와 드림 투어(2부)에서 승격하거나, 세계랭킹 상위권이어야 한다. 그러나 해커는 ‘스폰서 와일드카드’로 특별 참가했다. 힘든 과정을 거치지 않아 ‘특혜를 받았다’는 지적이 나왔다. PBA 관계자는 “대회 흥행과 볼거리 차원이다. 원래 대회 스폰서가 특별 출전권을 줄 수 있는 몫이 있다”고 밝혔다.
당구도 다른 스포츠처럼 상대 표정을 읽는 게 중요하다. 그러나 가면 뒤에서 해커는 표정을 감출 수 있다. 그래서 불공정 논란도 있다. 역으로 해커 입장에서는 가면을 쓴 채 땀을 뻘뻘 흘리는 고충도 있다.
해커의 활약을 두고 당구 팬들 반응도 엇갈리고 있다. “이게 예능이냐. 대회의 격을 떨어뜨린다”는 주장이 있다. 반대로 “해커 덕분에 흥미진진하다. 기존의 프로 선수들에게 자극제가 된다”는 의견도 있다. 한 당구 선수는 “PBA로서는 흥행 요소가 필요했을 거다. 난 상대 표정을 크게 신경 쓰지 않지만, 영향을 받는 선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해커는 “첫 PBA 대회 때 완패를 당한 뒤 ‘너 따위는 프로에게 상대가 안 된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번에 한 번이라도 이겨보자는 마음으로 나왔다. 내 마음속 영원한 1번 쿠드롱을 이겨 꿈만 같다. 3경기만 치를 줄 알고 옷도 3벌만 가져왔다. 사실 나도 난감하다”고 말했다. 이어 “못 쳐도 비난 받고 잘 쳐도 비난 받을 수 있는 위치다. 앞으로 일정을 정하지 않았지만 개인 방송을 열심히 하는 게 첫 번째다. 이번에 갑작스럽게 출전했는데, 나중에 나올 수도 있고 못 나올 수도 있다”고 했다.
박린 기자 rpark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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