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환 "내 경험 떠먹여 줄게" 오상욱 "형처럼 되고 싶어"
도쿄올림픽은 한국 펜싱 남자 사브르 대표팀의 세계적 위상을 다시 한번 확인한 무대였다. 명승부 끝에 단체전 금메달을 딴 김정환(38), 구본길(32), 김준호(27), 오상욱(25)은 귀국 후 수많은 방송과 광고에 출연해 신드롬을 일으켰다. 동시에 두 차례 국가대표 선발전을 겸한 국내 대회에 나가 1~3위를 휩쓸었다. 실력과 외모, 인기를 모두 갖춘 이들은 ‘어펜저스(어벤저스+펜싱)’라 불린다. 이들 중 맏형 김정환과 막내 오상욱을 만났다. 둘의 나이는 13세 차. 김정환은 “오상욱의 중·고교 은사들이 나보다 후배”라며 웃었다. 나이의 간극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둘은 만나자마자 서로 장난치고 폭소를 터트렸다. 같은 반 친구처럼 완벽한 ‘케미(케미스트리)’를 뽐낸 둘의 인터뷰는 최근의 인기와 유명세 얘기로 시작됐다.
Q : 유명인이 된 기분은 어떤가요.
김정환(이하 김)=최근 백화점에 갔다가 ‘우리가 좀 유명해졌구나’ 하고 실감했어요. 모자랑 마스크를 썼는데도 많은 분이 알아보시더라고요.
오상욱(이하 오)=저도 여기저기 돌아다닐 때 많이들 알아보셔서 신기해요. 기분 좋으면서도 ‘앞으로 행동을 조심해야겠다’는 생각도 했어요.
Q : SNS 게시물이 기사로 나오고, 아내와 여자친구까지 화제에 오르죠.
김=장모님이 생일상 차려주신 게 기사로 나온 걸 봤어요. 깜짝 놀랐죠. 올림픽 전엔 SNS 팔로워가 100명도 안 됐거든요. 지금은 30배 넘게 늘었어요.
오=저도 기사를 보면서 많이 놀라요. 제목부터 제 이름 앞에 여자친구(펜싱 플뢰레 선수 홍효진) 이름이 적혀 있더라고요.
김=앞으로 상욱이가 여자친구에게 잘해야 해요. (웃음) 올림픽 후에 알게 되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상욱이를 ‘금메달리스트’로 인식하잖아요. 그래서 제가 ‘앞으로 순수한 유기농 사랑을 찾는 건 불가능하다. 효진이에게 고마워하라’고 했죠. 지금 여자친구가 정말 착하고, 괜찮은 사람이거든요.
오=제가 여자친구 언급을 조심스러워하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어요. 얼마 전 여자친구 휴대전화로 사진을 같이 보는데, SNS로 쉴 새 없이 욕설 메시지가 오더라고요.
Q : 유명세의 그림자네요.
오=그런 것 같아요. 유령 아이디가 계속 욕을 보내요.
김=저에게도 그런 게 와요. 제가 JTBC ‘아는 형님’에서 김희철 씨와 ‘전주 1초 듣고 노래 제목 맞히기’ 대결을 해서 이겼는데, 어떤 사람이 ‘김희철이 널 띄워주려고 져준 것이니 너무 좋아하지 말고 고마워해라’ 하더라고요.
Q : 서로 첫인상은 어땠나요.
김=괴물 루키가 나타날 때의 분위기는 늘 비슷해요. 상욱이가 고3일 때, 경기장에서 사람들이 수군거리더라고요. ‘오상욱이라고 알아? 원우영, 오은석을 이겼대’ 하면서요. 처음엔 제가 크게 이겨서 ‘생각보다 강하진 않네’ 싶었어요. 그러다 상욱이가 국가대표로 뽑혀서 방을 같이 쓰게 됐어요. 옆에서 보니 펜싱에 열정이 많고, 틈날 때마다 펜싱 영상을 보더라고요. 제 영상도 물론 많이 보고요. (웃음)
오=겉모습만 봤을 땐 형이 좀 차가워 보였어요. 형이 경기장에서는 자기 일에 집중하는 스타일이라 말을 잘 안 하거든요.
김=후배들은 저를 어려워했어요. 상욱이는 룸메이트가 돼서 저의 본모습을 많이 봤고요.
Q : 오상욱에게는 김정환 선배와의 친분이 자랑거리였겠네요.
오=처음엔 워낙 대선배니까 방을 같이 쓰는 게 부담스럽기도 했어요. 그런데 얘기를 나눌수록 편하고 좋더라고요. 그때 경기장에 나가면 정환이형 덕에 제 어깨가 으쓱했어요. 우리 또래들은 형이 ‘잘 있었어?’라고 아는 척만 해줘도 다들 좋아하던 시절이거든요. 형이 저한테 친근하게 대하니까 다들 부러워하고, 전 기가 살았죠.
김=저는 상욱이가 질문을 많이 하는 게 좋았어요. ‘이 친구는 내가 조언을 해주면, 그걸 극대화할 수 있겠다’는 마음이 생겼어요. 그래서 제 경험의 농축액을 떠먹여 줬죠.
Q : 후배의 시행착오를 줄여줬군요.
김=저는 오래전부터 여러 길을 가봐서 ‘모범답안’을 갖고 있잖아요. 수많은 경험 중 내가 해보고 후회했던 건 거르고, 좋은 것만 알려주려고 했어요. 펜싱뿐 아니라 인생에서도요.
오=예전부터 제가 늘 ‘김정환 선수처럼 되고 싶다’고 말한 이유가 이거예요.
김=처음에는 성장 속도가 생각보다 더디더니, 어느 순간 ‘팍’ 터지면서 진짜 무섭게 성장하더라고요. 그때 저도 조금 보람을 느꼈고, 대견했어요. 또 한편으로는 지금 상욱이의 나이와 시절이 부럽기도 하고요.
Q : 둘의 스타일이 다른 것 같아요.
김=공룡으로 치면 저는 육식, 상욱이는 초식 공룡이에요. 초식 공룡만의 장점도 있겠지만, ‘고기도 먹으면 좋은 점이 더 많을 텐데’ 하는 마음으로 조언하는 거예요. ‘근성’은 쉽게 화를 내고 성질을 부리는 게 아니라 승부와 자신의 이름에 대한 책임감을 보여주는 거거든요. 저 역시 그런 마음으로 훈련 때부터 신경을 최고조로 곤두세워요. 물론 이런 저 자신이 가끔 싫을 때도 있죠. 오래 못 살 것 같기도 하고.(웃음) 대신 상욱이는 정말 오래 살 거예요. 혈압을 높일 일이 없어요.
오=형, 제가 나중에 잘 보살펴 드릴게요. (웃음)
김=간병하러 올래? (폭소)
Q : 오상욱 선수도 그 영향을 받았겠어요.
오=2016년 세네갈 대회 단체전에서 저 때문에 졌어요. 제가 따라 들어가는 동작을 잘 못 해서 당시 그런 일이 잦았어요. 그때 형이 외국 선수들도 다 있는 데서 ‘너 지금 (잘 안되는) 그 동작 100번 해’ 하더라고요. 경기에 져서 화가 난 게 아니라, 저에게 자극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거예요.
김=경기장에서 피스트에 서 있던 상욱이한테 ‘너 이리 내려와 봐’ 했죠.
오=다른 선수들은 신경 안 썼을지 몰라도, 저는 남들이 다 보는 데서 그 동작을 계속하는 게 솔직히 창피했어요. 그 후로 조금씩 잘 되기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 ‘됐다’ 싶었어요.
김=어느 순간 그 동작을 저보다 잘하고 있더라고요. 결국 그게 오상욱을 세계랭킹 1위로 만든 주 무기가 됐어요. 저도 과거에 가장 못 했던 동작이 지금의 주된 기술이거든요. 자신 없는 기술을 회피하면 도태될 수밖에 없어요. ‘내 팔다리가 멀쩡한데 남들 다 하는 게 안 될 리 없다’고 생각해야죠.
Q : 꼭 한번 말하고 싶었던 얘기가 있나요.
김=계속 친근한 이미지로 다가가고 싶어요. 펜싱 대중화의 첫걸음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세 번의 올림픽을 겪어본 선수로서, 지금의 관심은 ‘역대급’이거든요. 주변 선후배들도 펜싱 클럽이나 동호회가 활성화된다고 연락을 많이 주시고요. ‘반짝인기’에 그치지 않고, 많은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걸 후배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요.
오=올림픽을 마치고 귀국할 때, 럭비 대표팀 선수들과 같은 비행기를 탔어요. 공항에서 저희는 거의 두 시간 동안 인터뷰하고, 축하를 받았어요. 그런데 럭비 선수들은 사진 두 장만 찍고 집에 가더라고요. 그 선수들이 흘린 땀이 저희보다 훨씬 많을 수 있거든요. 금메달은 못 땄어도 성과를 낸 다른 종목에도 관심을 가져 주시면 좋겠어요.
김=맞아요. 저희도 과거에는 럭비 대표팀과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지금 상황이 어려운 여러 종목도 대중의 관심이 있다면 성장 기간이 단축될 수 있어요. 그늘에 가려진 비인기 종목에도 많은 격려를 보내주셨으면 해요.
배영은 기자 bae.younge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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