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바 치우고 시마이 해!" 도로 위 외계어 이젠 사라질까

김병기 2021. 9. 21.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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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천태만상⑥] 한국도로공사의 전문용어 표준화사업, 다듬은 말 54건 고시 예정

기획 '우리말 천태만상'은 세종국어문화원과 오마이뉴스가 함께합니다. <편집자말>

[김병기 기자]

 한국도로공사는 16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한 스튜디어에서 도로 관련 전문용어 표준화 고시를 앞두고 홍보 영상을 제작했다.
ⓒ 김병기
 
"함바는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현장 식당'으로 표현하면 되겠네요. 시마이는 '끝', 오사마리는 '마무리'로 바꾸면 되고요, 단도리는 '채비'나 '단속', 이렇게 말씀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아... 다시 할게요."

지난 16일 오전 서울 강남구 신사동 한 스튜디오에서는 도로 관련 어려운 전문용어를 순화하는 영상 녹화 작업이 한창이었다. 진행자는 팻말에 적힌 용어 옆에 가려진 종이를 한 장씩 떼어가면서 우리말로 다듬은 용어를 설명했다. 도로 분야 전문용어 표준화 고시를 앞두고 대국민 홍보물을 만드는 중이었다.

'포트홀'? 도로 용어는 안전과 직결 

한국도로공사는 작년 초에 전문용어 표준화 계획을 수립했다. 그 뒤 도로협회, 대한토목학회, (사)한글문화연대와 함께 전문가와 학계, 일반 시민들의 의견을 수렴해 어려운 용어를 다듬어 왔다. 지난 7월 도로 분야 전문용어 표준화협의회 심의 결과 100건의 다듬은 말 중 60건이 의결됐다. 이중 54건이 문화체육관광부의 최종 심의를 거쳐 한글날을 앞둔 10월 초에 고시될 예정이다.  

"도로 관련 전문용어는 시민들의 안전과 직결됩니다. 가령 블랙아이스, 포트홀을 주의하라고 말하면 모르는 분도 많습니다. 주의할 수가 없기에 낭패를 당할 수 있겠죠. 재산상의 피해도 감수해야 합니다. 그런데 '도로 살얼음' '도로 파임'이라고 말하면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을 겁니다."

이날 녹화 현장에 있던 김명진 한글문화연대 국어문화원 부원장의 말이다. 그는 도로공사의 전문용어 표준화 사업에 참여해왔다. 녹화 현장을 지켜보면서 책상 위에 놓여있는 '우리길 우리말'(한국도로공사 편찬) 소책자의 첫 장에 있는 삽화를 보며 표준화 사업의 필요성을 새삼 실감했다. 아래 그림이다. 
 
 한국도로공사가 작년에 펴낸 '우리길 우리말' 소책자에 실린 삽화 갈무리
ⓒ 한국도로공사
"여기에 아시바(작업 발판)를 치우고 시마이(마무리) 하면 되겠네~"

나이든 건설 현장 관리자의 지시를 이해 못하는 젊은이의 머리 위에 물음표가 떠있다. 우리나라 건설 현장에서부터 언론에 이르기까지 일본어 잔재의 건설 용어가 무분별하게 남아있는 상황을 그린 것이다. 이를 그대로 방치할 경우, 안전 문제를 일으킬 뿐만 아니라 소통조차 할 수 없다.  

'공구리'는 콘크리트를 일컫는데 일본에서 '콘쿠리'로 줄여 말하다가 한국으로 오면서 변형된 말이다. '빠루'는 쇠지렛대, '뼁끼'는 페인트, '기렛빠시'는 자투리, '가쿠목'은 각목, '빠가나다'는 뭉개지다의 일본어투 용어이다. 따라서 도로공사는 건설 현장에 남아있는 다음과 같은 일본식 용어를 우리말로 다듬어 달라고 문체부에 심의 요청했다.

'나라시'(고르기) '사시낑'(삽입 철근) '데나우시'(재시공) '마끼자'(줄자) '바라시'(해체 작업), '반생'(묶음 철사), '노가다'(현장 근로자), '시다'(보조원), 루베(세제곱미터), 헤베(제곱미터)

일본어 표기뿐만 아니다. 가령 '벌개제근'이 뭘까? 수목 제거의 한자식 표현이다. '야장'은 현장 기록지이다. '방현망'은 눈부심 방지망, '나대지'는 빈터, '제형'은 사다리꼴, '심도'는 깊이, '도포'는 바름, '연장'은 길이라는 다듬은 말로 표현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무분별하게 들어오는 '영어'... "PA가 뭔지 아세요?"
 
 김명진 한글문화연대 국어문화원 부원장이 도로 관련 전문용어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 김병기
 
김명진 부원장은 "이번에 글 다듬는 작업을 하면서 현장의 이야기를 들어본 결과, 특히 일본말의 경우는 어쩔 수 없이 관행적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사용하지 말자는 데에는 충분히 공감하는 것 같아 희망적이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최근에는 영어식 표현이 무분별하게 들어오고 있다"고 우려하면서 한탄하듯이 기자에게 질문을 했다. 

"기자님, 'PA'가 뭔지 아세요? 파킹 에어리어(parking area, 주차구역)랍니다. 'SA'도 있어요. 서비스 에어리어(Service area, 서비스 구역)입니다. 고속도로 주차구역이나 휴게소, 쉼터 등에 이런 영어식 표지판이 들어오고 있죠. '그루빙'은 미끄럼 방지 기법, 럼블스트립은 졸음 운전 방지를 위한 경로이탈을 방지하는 홈입니다. 그 뜻을 모르면 안전에도 문제가 생기겠지요."

도로공사가 심의 요청한 영어식 표현은 '씽크홀'(땅 꺼짐), '블로업'(도로 솟음), '램프'(연결로), '사인보드'(안전 유도판), '쁘레카'(착암기), '다이크'(배수턱), '에코 코리더'(생태 통로) 등 25개이다.

개념이 분명치 않아서 현장에서 혼선이 생기는 용어도 있다. '노견'이라는 한자어 표현이 대표적이다. 김 부원장은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진 '갓길'이라는 표현으로 바꾸면 될 것 같았는데, 전문가들은 자칫 '길'로 오해될 수 있고 '길어깨'가 좀더 폭넓은 개념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면서 "차량 통행이 가능한 고속도로의 경우에는 '갓길', 지방도로처럼 차량 통행이 불가능한 곳은 '길어깨'로 분리하여 바꾸기로 했다"라고 말했다. 

김 부원장에게 이번 사업을 하면서 느낀 소회를 물었다. 그는 도로공사 측에 고마움부터 전했다. 

"도로공사 내부 직원들의 자발적 의지로 시작된 사업입니다. 한글문화연대에 찾아와 도로 분야 전문 용어를 다듬고 싶다면서 자문부터 구해왔죠. 사실 저희는 각종 기관의 용어 문제를 지적해 왔는데요, 제3자가 간섭하듯이 하는 방식은 한계가 있습니다. 당사자들의 자각은 이 일을 완성하는 데 큰 힘이 되겠지요."

김 부원장은 아쉬움도 표했다. 계약할 때 가격을 협상하는 뜻을 담은 '시담'이라는 용어를 예로 들었다. 그는 "시담을 '협의'라는 말로 바꾸고 싶었고 도로공사 측도 동의했는데, 심의 과정에서 도로 분야의 용어가 아니라는 이유로 제외됐다"라면서 "이런 기준이라면 3~4개 분야에 걸쳐 있는 전문 용어는 누구도 손댈 수 없을 것"이라며 말했다.

"용어 학회가 있었으면… 각 분야 지식 대중화 나서야"

이날 출연자로 참석해 홍보 영상 제작 작업을 마친 한글문화연대 이건범 대표도 거들었다. 

"사실 용어를 다듬으면서 토박이말을 활용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너무 낯설고 촌스럽다면서 눈치를 본 전문가도 있었죠. 우리말에 대한 자긍심이 없어서겠지요. 새로 들어오는 외국어도 처음엔 낯이 설지요. 열 번 반복해서 들으면 익숙해집니다. 토박이말도 낯설지만 금방 익숙해집니다."

이 대표는 "도자기 학회와 함께 학술 용어를 다듬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각 분야의 학자들이 함께하는 '용어 학회' 같은 것이 있으면 좋겠다"라면서 "용어를 학술적 대상으로 보고, 그 탄생 배경과 쓰임새, 미래의 변화 가능성 등을 분석하고 외국에서 들어오는 말을 쉬운 우리말로 다듬으면서 각 분야 지식의 대중화에 나서야 한다"라고 제안했다.

국어기본법 제17조는 '전문용어의 표준화'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국가는 국민이 각 분야 전문용어를 쉽고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표준화하고 체계화하여 보급해야 한다." 
"전문용어의 표준화 및 체계화를 위하여 중앙행정기관에 전문용어 표준화협의회를 두어야 한다."

도로 분야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는 다양한 전문 영역이 존재한다. 특히 정보통신, 금융, 의학 등 신기술이 많이 들어오는 분야에는 영어 등의 외국어가 무분별하게 사용되고 있다. 법률 용어는 일반인들이 모르는 낯선 한자어가 많다. 이번에 도로공사가 적극 나선 용어 표준화 사업이 주목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날 또 다른 출연자로 참석했던 한국도로공사 구재욱 건설계획팀 차장은 "지난해 우리 분야에서 다듬어야 할 말로 선별했던 용어는 총 240건이었고, 최소한 100건 정도의 용어를 표준화 고시에 적용하고 싶었다"라면서 "이제 시작이고, 2년에 한 번씩 개정을 건의할 계획을 갖고 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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