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으로 간 천재 언어학자 김수경, 왜 이곳을 택했나 [세상과 도서관이 잊은 사람들]

백창민 2021. 9. 19.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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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도서관이 잊은 사람들] 김일성대학 초대 도서관장 김수경 ②

[백창민, 이혜숙 기자]

- 김일성대학으로 간 아버지, 남한에 남은 가족의 선택에서 이어집니다.

1950년대 후반까지 북한 언어 분야에서 맹활약한 김수경에게 시련이 닥쳤다. 1956년 '8월 종파 사건'과 1958년 '반종파 투쟁'을 거치면서, '연안파'의 거두 김두봉이 실각했다.

김수경 역시 김두봉 세력의 일원으로 비판의 중심에 섰다. 김두봉처럼 정치적 숙청을 당하지 않은 건 다행이지만, 이전처럼 학계 최일선에서 활약할 수 없었다. 김수경이 숙청을 면한 건, 많은 제자의 탄원 덕분이었다고 한다. 천재였던 그는 까탈스럽기보다 소탈했다고 한다. 제자들은 겸손하고 친절한 그를 "수경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따르곤 했다.

1960년대 중반 학계에서 밀려나면서, 김수경이 새롭게 자리 잡은 곳이 바로 '도서관'이다. 이전부터 그는 도서관과 범상치 않은 인연을 이어왔다. 앞서 김수경이 경성제국대학 시절, 도서관에서 러시아 신문을 끼고 살았다는 기록을 언급했다. 김수경은 신문뿐 아니라 도서관 장서도 많이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경성제대 부속도서관은, 식민지 조선에서 장서가 가장 많은 도서관이었다.

학구적인 그는 도쿄제국대학 유학 시절에도 도서관을 많이 이용했을 것이다. 김수경과 국어학자 이희승(李熙昇)이 도쿄제국대학 도서관 앞에서 함께 찍은 사진이 남아 있다. 조선으로 돌아온 그는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에서 촉탁으로 일했다. 도서관은 김수경이라는 천재 언어학자가 탄생한 '요람'이었다.

김일성대학 초대 도서관장
 
▲ 김수경 자필 이력서 1946년 12월 28일 김수경이 김일성대학에 제출한 자필 이력서다. 두 페이지로 작성한 김수경의 이력서 중 뒷면이다. 김수경은 '김일성대학 문학부 교원(교수)과 부속도서관장을 겸임'한다는 내용을 최근 경력으로 써넣었다.
ⓒ NARA 국립중앙도서관
 
김대 조선어학과 교원 시절 그는, 김일성대학 '초대 도서관장'을 겸했다. 김수경이 김일성대에 제출한 자필 이력서에는, 그가 1946년 10월 1일부터 "북조선 김일성대학 부속도서관장"을 겸임했다고 적혀 있다. 1946년 10월 1일 김일성대학이 개교할 때, 김수경이 초대 도서관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스물여덟 나이에 북한 최고 대학의 도서관장을 맡을 정도로, 그는 학식과 능력을 겸비했다. 김수경이 28세에 대학 도서관장이 된 것은, 남북을 통틀어 '최연소' 기록일 가능성이 높다. 남북한 최고 대학으로 한정하면, 전무후무한 기록일 것이다.

1947년 3월 시점 <김일성대학 직원 봉급표>를 보면, '도서관장'과 '부관장'이 있다. '도서관장'을 '도서부장'으로 칭하기도 했다. '부관장', '부부장'이라는 직급이 도서관과 편집부(출판부)에 있다. 북한 당국이 그만큼 도서관을 중시했을 수 있고, 부부장을 통해 당이 도서관과 출판부 통제를 강화했을 수도 있다.

도서관장 급여(2,500원)가 교무부장, 교양부장, 학부장, 강좌장과 같다. 김일성대학에서 도서관장보다 높은 급여를 받은 사람은 총장과 부총장, 교육주임, 경리주임, 서기장 5명뿐이었다. 급여로 짐작건대, 도서관장의 위상이 낮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김일성종합대학 10년사>는 개교 초기 도서관의 장서 상황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대학 도서관은 대학의 무기고이다. (중략) 한 권의 책도 없는 상태로부터 출발하면서 도서관 사업은 무엇보다도 먼저 도서들을 광범히 수집하는 사업으로부터 시작하여야 하였다."

김수경은 '책 한 권 없는 도서관'을 맡아 단기간에 장서를 확보했다. 김일성대학 도서관은 대학 경비 중 도서 구입비 비중을 크게 늘려, 대량으로 책을 구입했다. 초대 총장 김두봉을 비롯한 개인과 소련군 사령부, 소련 레닌그라드 아카데미야 도서관과 중국으로부터 책을 기증받았다.

김일성종합대학 vs 서울대학교 도서관
 
▲ 김일성대학 직원 봉급표 한국전쟁 때 미군이 노획한 김일성대학 서류다. 1947년 3월 26일 작성한 문서다. 당시 김일성대학 총장은 김두봉, 부총장은 박일, 교육국장은 한설야였다. 도서관장(2,500원)과 부관장(1,800원)의 직급과 급여가 눈에 띈다.
ⓒ NARA 국립중앙도서관
 
김일성종합대학 도서관은 1948년 9만 8천여 권, 1950년에는 13만 5천여 권을 확보해 장서를 크게 늘렸다. 대학 본관 지하층에 있던 도서관은 600만 원의 공사비를 확보해, 1950년 3월부터 건물 신축 공사를 시작했다. 도서관 건물은 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2층 규모 콘크리트 건물로 계획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김일성종합대학은 도서관 공사를 중단하고, 10만여 권에 달하는 도서관 장서를 평양시 북동쪽에 있는 강동군 원탄면 원흥리로 옮겼다. 전쟁이 끝나자 김일성종합대학은 도서관 공사를 재개해서, 1954년 9월 도서관 건물을 준공했다.

1956년 9월 시점에 김일성종합대학 도서관은 29만 권의 장서를 갖췄다. 비슷한 시기인 1957년 서울대 중앙도서관의 장서는 59만 481권이었다. 이중 상당수는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 시절 장서였다.

1948년 시점에 서울대 중앙도서관 장서는, 규장각 귀중본과 고서를 제외하고 45만 8천378권이었다. 서울대 도서관이 1948년부터 1957년까지 장서를 13만 권 정도 늘릴 때, 김일성종합대학은 장서를 29만 권 늘렸다. 이 시기만 비교하면, 김일성종합대학 도서관이 서울대보다 장서량을 2배 이상 늘렸음을 알 수 있다.

앞서 한국전쟁 중인 1952년 북한이 최고의 두뇌를 모아 '과학원'을 설립하고, 김수경이 연구실장으로 일했음을 언급한 바 있다. 1952년 12월 1일 모란봉 지하극장에서 출범한 북한의 '과학원'은, 소련 과학원(The Academy of Sciences of the 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을 모델로 설립했다.

북한은 과학원에도 부속도서관을 설치했다. 학술 연구를 위한 과학 전문 도서관으로 출범한 과학원 도서관은, 짧은 기간에 장서량을 빠르게 늘렸다. 1953년 장서량이 1만 9천 권에 불과했던 과학원 도서관은, 1957년 25만 권이 넘는 장서를 확보했다. 4년 만에 장서량이 13배 이상 늘었다.

당시 과학원 도서관은 평양 국립중앙도서관(지금의 인민대학습당)과 김일성종합대학 도서관과 함께 '북한의 3대 도서관'으로 꼽힌 곳이다. 설립 초기에 '과학원 도서관'은 모란봉 중앙역사박물관 청사에 있었다.

김일성종합대학 초대 도서관장이자 여러 언어에 뛰어난 김수경은, 과학원 도서관 장서와 자료 수집에도 관여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랬다면 김수경은 훗날 그가 몸담은 중앙도서관을 포함해, 북한의 3대 도서관에 모두 관여한 셈이다.

북한의 국가도서관 사서
 
▲ 1986년 무렵 김수경 1968년 김수경은 북한의 국가도서관인 중앙도서관(지금의 인민대학습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사진을 촬영할 무렵 김수경은, 인민대학습당 운영방법 연구실장으로 일했다. 그가 일한 인민대학습당 안에서 촬영한 사진으로 추정된다.
ⓒ 김혜영
 
1968년 10월 김수경은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중앙도서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중앙도서관에서 그는 '사서'(司書)로 일했다. 남한은 사서 자격을 1급 정사서, 2급 정사서, 준사서로 구분하지만, 북한은 1급부터 6급까지 여섯 등급으로 사서 자격을 구분한다. 북한에서는 3개국 이상 언어를 습득해서, 박사와 교수급 전문가에게 참고 봉사할 실력을 갖춰야 '1급 사서'로 일할 수 있다.

중앙도서관은 북한의 국가도서관으로, 남한으로 치면 국립중앙도서관이다. 중앙도서관은 1982년 4월 1일 '인민대학습당'으로 이름을 바꿨다. 한반도에서 가장 큰 도서관인 인민대학습당에서 김수경은, 1998년까지 운영방법 연구실장으로 일했다.

북한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언어학자 김수경은, 남북을 통틀어 도서관에 가장 오래 몸담은 '석학'일 것이다. 중앙도서관으로 옮긴 1968년부터 헤아려도 30년이나 북한의 국가도서관에서 일했다. 그가 김일성종합대학을 떠나 도서관에 머문 시간은 그에게 '유배'된 기간이었을까? 또 다른 '성장'의 시간이었을까? 탁월한 언어학자였던 그가 도서관에 남긴 발자취는 그래서 더 궁금증을 자아낸다.

남과 북이 갈라진 후 우리는 북녘의 도서관이 어떻게 운영됐는지 소상히 알지 못한다. 한국전쟁 과정에서 납북된 이재욱, 박봉석, 김진섭, 손진태 같은 도서관 전문가의 소식도 끊겼다. 전쟁과 분단이 우리 도서관에 남긴 상처는 깊고 컸다. 건물은 파괴되고, 장서는 사라지고, 조직(조선도서관협회)은 와해되고, 무엇보다 수많은 인재를 잃었다.

분단과 전쟁은 땅과 체제, 사람을 나누고, 도서관도 둘로 갈랐다. 북녘땅에도 도서관을 일군 수많은 '도서관인'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도서관에서 인민에게 어떻게 봉사하고 도서관을 꾸려왔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김수경뿐 아니라 북녘 도서관에서 일한 수많은 '김수경들'의 이야기가 궁금한 이유다.

김기석 교수의 표현처럼, 남과 북은 하나에서 갈라져 나온 '일란성 쌍생아'다. 다르게 살아온 시간이 있지만, 함께 한 시간이 더 길었다. 서로 '다르게' 살아왔지만, 각자 '틀리게' 살아오진 않았을 것이다.

도서관의 분단
 
▲ 이타가키 류타 교수의 <북으로 간 언어학자 김수경 1918~2000> 이타가키 류타 교수가 2021년 7월 일본 인문서원 출판사를 통해 발간한 책이다. 이타가키 교수는 방대한 자료 수집과 연구를 통해, 남한에서 잊힌 언어학자 김수경을 복원했다. 이 책은 출판사 푸른역사를 통해 국내 출간이 준비 중이다.
ⓒ 인문서원
 
이 글의 상당 부분은, 일본 도시샤(同志社)대학 이타가키 류타(板垣竜太) 교수가 쓴 논문 <김수경의 조선어 연구와 일본 – 식민지, 해방, 월북>(金壽卿の朝鮮語研究と日本 - 植民地, 解放, 越北)에 기대어 썼다. 갈라진 '또 다른 우리'의 이야기를 제3국 학자 연구를 통해 알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김수경을 '재평가'하는 행사도 남한과 북한이 아닌, 일본에서 열렸다. 2013년 11월 9일 '북으로 간 언어학자 김수경의 재조명'이라는 국제 심포지엄이 일본 도시샤대학에서 열렸다.

'비정상의 정상화'(abnormal normalization)라고 해야 할까. '비정상'이 '정상'이 되다 보니, 이젠 무엇이 '정상'이고 '비정상'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젠 하나에서 갈라져 둘로 나뉜 남과 북이 다름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비정상을 정상으로 되돌릴 시간이 아닐까.

김수경은 중앙도서관으로 자리를 옮긴 후 논문을 발표하지 않았지만, 1980년대 후반부터 연구를 재개했다. 1990년대에는 교수 직위를 다시 얻고, 국기훈장 제1급을 받았다. 북한에서 김수경의 존재감은 적지 않다.

1996년 그를 주인공으로 하는 장편 실화소설 <삶의 메부리>가 출간됐다. 2004년에는 잡지 <문화어학습>에 <이름난 언어학자 김수경>이라는 글이 실렸다. <긍지>라는 제목의 TV 프로그램이 방영됐고, 김정일은 그를 '반일애국렬사'로 칭송했다. 김수경은 2000년 평양에서 세상을 떠났다. 김수경과 동갑인 한글학회 허웅 이사장은 그에 대해 이런 평을 남겼다.

"아마 월북하지 않고 남한에 남아 연구에만 매진했더라면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위대한 언어학자가 됐을 것이다."

가족마저 갈라놓은 이념과 체제란
 
▲ 김수경과 인민대학습당 김수경 뒤편, 대동강 건너 보이는 건물이 인민대학습당이다. 주체사상탑 근처에서 촬영한 사진으로 보인다. 김수경은 북한의 국가도서관에서 30년이나 일했다. 천재이자 석학이었던 그는 북한 도서관에 어떤 발자취를 남겼을까.
ⓒ 김혜영
 
한편, 김수경이 북한에 살아 있다는 소식을 접한 그의 가족은 1970년대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다. 1985년 그의 가족은 옌벤대학 고영일 교수를 통해 김수경에게 편지를 띄웠다. 가족과 편지를 주고받던 김수경은, 1988년 8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학술대회에서 둘째 딸 김혜영과 상봉했다. 1950년 한국전쟁 때 헤어진 후 38년 만의 만남이었다.

그사이 서른두 살의 아버지는 일흔의 노인으로 변했고, 둘째 딸은 훌쩍 자라 아버지처럼 언어학도가 되었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991년 김수경의 첫째 딸 김혜자는, 아버지를 만나지 못한 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1994년 7월 둘째 딸 김혜영의 두 아이가 평양으로 가서, 외할아버지 김수경을 만났다. 한국 국적이 아닌 캐나다 국적자였기에 가능한 만남이었다.

1996년 7월 장남 김태정이 평양을 방문해서 그를 만났고, 1998년 7월에는 평양을 찾은 아내 이남재와 48년 만에 만났다. 아내를 만나고 일 년여 후인 2000년 3월 1일, 김수경은 세상을 떠났다. 김수경과 그의 가족은 소식을 전하고 만나기도 했지만, 끝내 '함께' 살지는 못했다.

김수경의 가족은 조국을 떠난 후에야 서로 만날 수 있었다. 조국을 등지고 나서야 아버지와 남편을 만날 수 있는 '비극'은 이제 끝나야 한다. 김수경 가족뿐 아니라 여러 도서관인이 '이산가족'으로 생사도 모른 채 살아야 했다. 분단과 전쟁, 다른 이념과 체제 때문이었다. 가족마저 갈라놓는, 가족보다 앞서는 이념과 체제란 대체 무엇일까?

"우리 조선 사람은 매양 이해(利害) 이외에서 진리를 찾으려 하므로 석가(釋迦)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孔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主義)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 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한 조선은 있어도, 조선을 위한 도덕과 주의는 없다. 아!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냐, 특색이라면 특색이나 노예의 특색이다. 나는 조선의 도덕과 조선의 주의를 위하여 곡(哭)하려 한다."

1925년 단재 신채호가 남긴 통렬한 꾸짖음이다. 이념과 체제도 결국 '사람'을 위한 것 아닐까? 어떤 이념과 체제도 사람보다 우선할 수는 없다. 우리는 '이념'과 '주의'의 시대를 언제쯤이나 끝낼 수 있을까.

* 김수경 선생에 관해 선구적 연구와 저작을 출간하고, 유족과 연결해주신 도시샤대학 이타가키 류타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김수경 선생 정보를 알려주시고, 사진 사용을 허락해주신 유족 김혜영(金惠英)·김태성(金泰成) 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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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①편과 ②편 2개의 기사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글은 ②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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