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도 갈라놓지 못한 가슴 시린 사랑이야기
[양형석 기자]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은 이안 감독의 대표작이자 <다크 나이트>의 조커로 유명한 고 히스 레저의 출세작이다. <브로크백 마운틴>은 2005년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비롯해 골든글러브 4개 부문, 아카데미 영화제 3개 부문을 독식하며 작품성을 인정 받았다. 동성애라는 소재가 다소 파격적이었지만 관객들은 큰 편견을 갖지 않았다. 장국영, 양조위 주연의 <해피 투게더> 역시 왕가위 감독에게 칸 영화제 감독상을 안긴 대표적인 퀴어 영화로 꼽힌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아직 성소수자들이 주인공인 영화에 대한 인식이 야박한 편이다. 2005년 동성애코드가 들어간 <왕의 남자>가 1200만 관객을 돌파하며 큰 사랑을 받기도 했지만 <왕의 남자>를 본격 '퀴어 영화'로 분류하기는 힘들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반면에 커밍아웃을 하며 퀴어 영화를 전문으로 만드는 김조광수 감독이나 이송희일 감독은 한국 영화 시장에서 주류로 활동하지 못하고 있다.
▲ <번지점프를 하다>는 동성애 코드로 논란이 됐음에도 서울에서만 50만 관객이 극장을 찾았다. |
ⓒ 브에나비스타코리아 |
너무 어린 나이에 떠나버린 매력적인 배우
전북 군산에서 태어나 성장한 이은주는 1996년 교복모델 선발대회에서 입상한 뒤 드라마 <스타트>를 통해 배우로 데뷔했고 <카이스트>로 주목 받기 시작했다. 그렇게 청춘스타로 성장하던 이은주는 2000년, 만19세의 어린 나이로 홍상수 감독의 <오!수정>을 통해 스크린에 데뷔했다. 이은주는 <오!수정>에서 정보석, 문성근 같은 대선배들 사이에서도 위축되지 않는 당찬 연기를 선보이며 대종상 신인상을 수상했다.
<오!수정>으로 충무로의 유망주가 된 이은주는 같은 해 <번지점프를 하다>를 만났다. 사실 <번지점프를 하다>는 1983년과 2000년의 이야기가 절반씩 나눠져 있기 때문에 이은주의 출연 분량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이은주는 사랑스런 연기로 존재감을 뽐냈고 <번지점프를 하다>는 서울에서만 50만 관객을 돌파했다. 이은주는 2002년에도 <연애소설>을 통해 이 작품에서 절친으로 출연한 손예진과 함께 '차세대 멜로퀸'에 이름을 올렸다.
데뷔 후 한 번도 쉬지 않고 다작을 해온 이은주는 <연애소설> 이후 <하얀 방>, <하늘정원>, <안녕! 유에프오>가 연속으로 흥행에 실패하며 슬럼프가 찾아왔다. 물론 2004년에 개봉한 <태극기 휘날리며>가 천만 영화가 됐지만 <태국기 휘날리며>의 스포트라이트는 이은주가 아닌 장동건과 원빈이 독차지했다. 하지만 이은주는 TV 드라마로 눈을 돌린 2004년 대중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크게 각인시킨 작품 <불새>를 만났다.
이은주는 <불새>에서 파란만장한 삶의 굴곡을 겪은 이지은 역을 완벽하게 소화하며 영화로 다져진 연기 내공을 마음껏 뽐냈다. <불새>는 시청률 30%를 넘나들며 많은 사랑을 받았고 이은주 역시 영화만 고집하는 바람에 상대적으로 낮았던 대중적 인지도를 한껏 끌어 올리며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이은주는 한석규와 호흡을 맞춘 영화 <주홍글씨>에서도 뛰어난 노래실력과 함께 파격적인 연기변신을 선보이며 또 한 번 대중들을 놀라게 했다.
하지만 이은주는 2005년 2월 만24세라는 젊다 못해 어린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결국 <주홍글씨>는 그녀의 유작이 되고 말았다. 어느덧 이은주가 세상을 떠난 지 16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차가운 도시미녀의 이미지와 따뜻한 감성을 두루 갖춘 젊은 배우는 여전히 흔치 않다. 어린 나이에도 독보적인 아우라를 발산하던 배우 이은주를 그리워하는 대중들이 여전히 많은 이유다.
▲ 우산과 비는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두 주인공의 사랑을 확인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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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의 유혹>에서 강동원이 이청아의 우산 속으로 들어가는 장면은 여성 관객들의 마음 속을 흔든 최고의 장면 중 하나로 꼽힌다. 하지만 남성관객들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할 필요는 없다.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서인우(이병헌 분)의 우산 속으로 들어가는 인태희(이은주 분)가 있기 때문이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남성관객들을 무장해제시켰던 <번지점프를 하다>의 설레는 오프닝 장면이다.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는 죽음도 갈라놓지 못하는 인우와 태희의 '영원한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태희를 보고 첫 눈에 반한 인우는 조소과 강의에 들어가며 태희에게 접근한다. 그리고 "제가 태희씨한테 마법 걸었거든요. 물건 쥘 때 새끼 손가락 펴라고요"라는 작업 멘트를 던진다. 사실 유치하기 짝이 없어 보이지만 인우를 연기한 이병헌은 '성공적으로 로맨틱한' 남자이기에 인우의 마법은 먹혀 들고 인우와 태희는 그렇게 사랑에 빠진다.
영화의 후반부는 태희가 세상을 떠난 후 교사가 된 인우와 제자 임현빈(여현수 분)이 갈등하고 재회하는 이야기가 그려진다. 현빈의 담임 선생님이 된 인우는 현빈에게서 태희의 흔적을 발견하고 혼란스러워한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그런 인우를 동성애자로 취급하고 현빈 역시 인우를 알아보지 못한다. 결국 인우는 학교에서 쫓겨나게 되고 뒤늦게 인우의 존재를 깨닫게 된 현빈은 17년 만에 두 사람이 만나기로 했던 용산역으로 찾아간다.
<번지점프를 하다> 최고의 장면은 역시 인우와 현빈이 뉴질랜드에서 줄 없이 번지점프를 하는 라스트씬이다. 남자 둘이 마주보며 그윽한 미소를 짓는 모습을 보면 전형적인 동성애 영화 같지만 현빈은 남자가 아닌 '남자로 태어난 태희'였다. 그리고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이병헌의 내레이션과 함께 김연우의 <오,그대는 아름다운 여인>이 흐르며 영화의 여운을 이어준다.
<번지점프를 하다>는 배우들의 인상적인 연기 만큼이나 탄탄한 시나리오가 돋보였던 작품이다. 실제로 각본을 쓴 고은님 작가는 <번지점프를 하다>를 통해 대한민국 3대 영화제(대종상, 청룡 영화제, 백상예술대상)의 시나리오상을 모두 휩쓰는 기염을 토했다. 고은님 작가는 이후 영화 <아유레디>, 드라마 <첫사랑> <환생-NEXT>, <혼>, <장난스런 키스> 등의 각본을 썼지만 <번지점프를 하다>의 충격(?)을 대중들에게 다시 선사하진 못했다.
▲ 중간에 이병헌이 끼어들지 않았다면 홍수현(왼쪽)과 여현수는 예쁜 커플로 남았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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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지점프를 하다>에서 현빈은 '태희가 남자로 환생한 캐릭터'다. 하지만 현빈 역을 맡은 여현수는 185cm의 장신에 기골이 장대한 '상남자'에 가까운 배우다. 실제로 영화 속에서도 자신의 존재를 인지하기 전까지 여현수는 여느 고등학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뒷자리에 앉은 키 크고 장난끼 많은 남학생처럼 현빈을 표현했다. 오히려 인우 역의 이병헌이 현빈 앞에서 흔들리고 눈물을 흘리는 등 여성스런(?) 연기를 펼친다.
2000년의 고교생 임현빈과 1983년의 여대생 인태희를 넘나드는 복잡한 캐릭터를 소화한 여현수는 2001년 백상예술대상에서 신인상을 수상하며 일약 충무로의 기대주로 떠올랐다. 2002년에는 <남자, 태어나다>에서 정준, 홍경인과 함께 주연을 꿰차기도 했다. 하지만 비슷한 또래의 조인성, 김래원 등에 비해 활약이 미미했던 여현수는 2016년을 끝으로 배우 활동을 접고 현재는 재무설계사로 변신했다.
사실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가장 불쌍한 캐릭터는 국어 선생님에게 남자친구를 빼앗긴 어혜주(홍수현 분)다. 화이트데이에 속옷을 선물하며 장난치는 현빈의 애정공세에 애써 싫은 척 내숭을 떨던 혜주는 현빈과 친하게 지낸다는 이유만으로 국어시간에 인우에게 국어책을 읽는다며 연기지적(?)을 당한다. 특히 현빈의 마음이 떠났음을 알게 되고 눈물을 흘리는 연기는 홍수현이라는 신인배우의 잠재력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번지점프를 하다>를 통해 주목을 받은 홍수현 역시 연기에 정체를 보이며 꽤 오랜 기간 배우로서 확실한 입지를 굳히지 못했다. 하지만 10여 년 간 꾸준히 활동을 이어간 끝에 2011년 <공주의 남자>에서 비운의 왕녀 경혜 공주 역으로 주목을 받았고 2012년 <샐러리맨 초한지>에서도 차우희 역으로 매력을 뽐냈다. 현재는 드라마 <경찰수업>에서 경찰대학의 유도교수를 연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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