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오지 말라고는 했지만.. 자식·손주는 보고 싶구먼"

최일영,전국종합 2021. 9. 18. 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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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쓸쓸한 명절 부모 마음
"그래도 영상통화로 얼굴은 봐유"
손수 지은 농산물 이젠 택배로
충남 보은시 마로면 원정리에 사는 김병권(81) 유병순(81)씨 부부는 자식들에게 일찌감치 “올해 추석도 각자 집에서 보내자”고 연락했다. 김씨는 지난 12일 ‘고향 풍경’을 취재하러 찾아간 기자에게 “코로나만 아니면 우리 집 마당에 30명쯤 모여 시끌벅적할 것”이라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어두컴컴해진 밤 문틈 사이로 부부가 밝은 미소를 지어보이고 있다. 보은=최현규 기자


“세월 그래 살아도 이런 꼴은 그때 말곤 처음이유.”

홍역 이후 이런 전염병은 처음이라는 유병순(81) 할머니. 지난 9일 충북 보은군 마로면 원정리 자택에서 한숨을 내쉬며 그는 말했다. 과거 명절 때마다 5남매 중 타지에 사는 아들 2명과 시동생들이 찾아와 마당이 북적북적했다. 손자들도 여기저기 들락날락하며 “할매 할매 시골에 오면 참 좋아, 여기저기 돌아다닐 수 있어서”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코로나19가 2년째 이어지면서 그런 모습은 어느새 추억속 장면이 됐다. 중매로 22살 때 시집와 60년 가까이 이곳에서 산 유 할머니는 홍역이 유행했던 옛 시절을 회상했다. “홍역이 돌면 걸릴까봐 남의 집에도 못 가고 그랬어. 옛날엔 예방주사 이런 게 없었잖아. 걸리면 4살, 5살 먹은 애들도 죽고 그랬지.”

충남 보은 마로면 원정리에서 사는 김병권, 유병순씨 부부가 12일 집 대문 앞에서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보은=윤성호 기자


그런 시절의 기억이 있어서 그런지 동네주민들은 버스를 빌려 단체로 보은보건소에서 백신주사를 맞았다. 덕분에 이곳은 코로나 청정지역이다. 이젠 아들 내외와 손자들도 백신을 맞기 시작했지만, 유 할머니는 고향에 찾아오는 걸 한사코 말린다. 섭섭지 않냐는 질문엔 “그래도 어떡해, 시골에 왔다가 병이라도 걸리면…”이라고 말끝을 흐렸다.

유 할머니는 지난 생일날 손자가 전화를 걸어 “할머니, 미역국은 드셨어요? 못 찾아봬서 죄송합니다”고 묻자 “괜찮다. 너희만 건강히 잘 있으면 된다”고 대답한 적도 있다고 했다. 그래도 아들들이 영상통화나 안부전화를 자주 한다고 괜찮단다. 수도권에 사는 아들 둘과는 달리 지근거리에 사는 딸들은 그래도 가끔 찾아와 용돈도 주고 간다. 핸드폰 사진첩을 뒤척이며 서울대에 간 큰 손자 자랑을 하는 할머니에게 그립지 않냐, 보고 싶지 않냐 연신 질문을 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하나였다. “내년에 보면 되잖아! 지들이 살기가 어렵고 그러면 곤란한데 아들 딸 모두 잘 지내서 괜찮아.”

“그래도 요즘엔 영상통화라는 게 있어가 손주들 얼굴은 보고 사니더.”

김병권 유병순씨 부부가 조촐한 저녁식사를 하고 있다. 한쪽 벽에는 추석이 표시된 달력과 도시로 떠난 자식들의 가족사진이 걸려 있다. 보은=윤성호 기자


경북 의성군 이영상(79) 어르신의 말이다. 코로나19 시대 많은 것이 바뀌었다. 시골마을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변화 중 하나는 어르신들의 영상통화 사용이 급증했다는 것이다. 젊은 세대의 전유물로만 여겨지던 기술인데 코로나19 때문에 어르신들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기능이 됐다.

2년 가까이 가족들과 얼굴을 마주하지 못한 어르신들은 영상통화로 아쉬움을 달래고 있다. 경북 의성군 의성읍 철파리 마을 어르신들은 대부분이 영상통화로 자식들과 소통하고 있다. 이영상 어르신은 “객지에 나가 있는 아이들이 이번 추석에도 오지 못한다고 해 벌써 영상통화를 세 번이나 했다”며 “직접 못 봐서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커가는 손주들 얼굴은 확인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고 말했다.

어르신들은 주로 자녀들로부터 걸려오는 영상통화를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손주들이 보고 싶거나 새로 찾은 맛있는 음식 등 알려주고 싶은 것이 있으면 자녀들에게 영상통화를 직접 걸기도 한다. 딸에게 영상통화 하는 법을 배운 경북 청송군 현서면 한분순(90) 어르신은 “평소 자주 오지 못하는 자녀들과 수시로 영상통화를 하는 게 유일한 낙이다”고 웃으며 말했다.

코로나19 시대 가족 간의 정을 이어주는 또 다른 도구는 바로 택배다. 코로나19 유행 전 자녀들이 타고 온 자동차 트렁크에 가득 실어 보내던 농특산품을 이젠 택배로 보낸다. 경북 안동시 길안면 권중기(81)씨는 “지난해 추석 때부터 서울 사는 아이들에게 사과와 쌀 등을 택배로 보내고 있다”며 “만만치 않게 드는 택배비는 아이들이 따로 챙겨주고 있다”고 말했다.

12일 김병권씨 부부가 난방을 위해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있다. 코로나19로 자식들의 귀향을 막은 노부부의 모습이 쓸쓸하다. 보은=최현규 기자


“나이 들면 명절 그 재미 하난데 많이 속상하지. 언제 또 그전처럼 기름 냄새나고 북적이는 명절을 맞아보겠나 싶어 쓸쓸해.”

제주시 이도동 김충복(98)씨는 “자식 일곱이 모두 일가를 이뤄 손주들이 결혼해 낳은 증손주만도 여덟인데 한 자리에 모이지를 못한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예년 같으면 명절을 앞두고 집 정리에 바쁘게 보냈을 시간을 올해는 청소 대신 다음 달 태어날 증손자 털이불을 짜는데 보냈다.

“내가 가지 못 하니 명절 때 아이들에게 줄 것들을 미리미리 챙겨주게 되네.” 100세를 눈앞에 둔 노인의 눈이 붉어졌다.

대구=최일영 기자 전국종합 mc102@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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