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남 "스케이트 못탄다더니 뒤로 씽씽..날 한방 먹인 김동건"
[조영남 남기고 싶은 이야기] 예스터데이〈29〉무서운 방송계 선배
나는 엊그제 극도의 불안과 공포에 빠졌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중앙SUNDAY의 내 연재 담당자가 휴대폰 문자를 통해 금년 말까지 필자의 연재가 나가니까 앞으로의 날짜와 횟수를 적시해 보냈다. 일종의 내용증명이었다. 5년간 미술에 관한 법정투쟁을 벌여본 당사자로서는 거기에 적시된 날짜들이 무슨 선고일 출두 날짜처럼 읽혀졌다. 극도의 불안과 공포가 엄습했다. 사실대로 고백하자면 지금까지 나는 거의 30회에 걸쳐 연재를 중앙SUNDAY에 썼다. 내 평생 겪은 얘기들을 몽땅 썼다. 그러나 더이상 쓸 소재가 없다. 거덜 났다. 그래도 난 써야 한다. 또 쥐어짜 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지난 28회에 쓰다 만 에피소드 한 가지가 생각났다.
지난번에 나는 내 젊은 날의 은인이셨던 한양대 김연준 총장님과 수원중앙침례교회 김장환 목사님께 겁없이 객기로 덤벼들었다가 무참하게 깨진 얘기들을 썼었다. 김 총장님 에피소드에선 돈 얘기 함부로 하지 말라는 교훈과 김 목사님 편에선 남 얘기 함부로 해선 안 된다는 평생의 교훈이 있었다. 그런데 사실 나한텐 한 번 더 깨진 에피소드가 남아 있긴 했다. 그것까지 마쳐야 내 70평생 연전연패의 역사가 완성되는 것이다. 이제 하나 남은 그 얘기를 해보자.
그럼 마지막 싸움의 상대는 누구인가. 주말 아침에 여러분들은 또 깜놀자(깜짝 놀라 자빠지다)할 것이다. 나의 상대는 대한민국 전 국민이 익히 아는 사람이다. KBS 최장수 인기 프로그램 ‘가요무대’의 진행자 김동건 형님이시다.
김동건 형님, 잘하는 게 너무 많아
나는 첨부터 나의 여섯 살 위이시라 일방적으로 형님으로 불렀다. 그러다가 몇 년 전 ‘낭만논객’이란 TV 프로그램을 함께 하면서 자연스럽게 김동길 선배님과 김동건 형님과 각별해졌다. 이건 딴 얘기지만 김동건 형은 김동길 선배님과 연세대학 스승과 제자 사이여서 여러분께서 김동건 형님의 방송 외 자리에서 김동길 선배님을 어떻게 대하는지 알면 입을 쩍 벌리게 될 것이다. 나는 아무리 사제지간이라 해도 어쩜 저 정도로 극진히 대할까, 그걸 옆에서 지켜본 나는 한마디로 “졌다” 하고 말았을 정도다. “졌다”라는 말밖엔 표현할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김동건 조영남의 얘기로 돌리자.
일명 김동건 스케이트 사건은, 김동건 게이트가 아니고 스케이트다, 그 얘긴 나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야 한다. 나 어렸을 때의 겨울은 진짜 겨울이었다. 요즘 겨울은 겨울도 아니다. 너무 추워서 매년 내 손가락과 발가락은 꼭 동상에 걸리는 지경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동상 부위가 가려워서 피가 나도록 긁어야 했다. 나는 지금 소위 출세를 해서 지난 30여 년 이상 한강을 내려다보며 살아왔다. 지금은 영동대교 남단 끝자락에 산다. 처음 살 때는 제법 한강이 꽁꽁 얼어붙었지만 지난 몇 년간 나는 한강이 완전히 얼어서 얼음 위로 한강을 건너가 본 적도 없고 요즘은 그런 걸 생각조차 못 하게 됐다. 그만큼 지구가 더워지고 있는 것이다. 빌어먹을!
따라서 나 어렸을 때는 정말 추워서 얼음지치기, 썰매 타기가 당근 우리 아이들의 제일 큰 오락거리였다. 여름엔 놀이가 제법 많았다. 개구리잡이, 메뚜기잡이, 삽다리 밑 개울가 송사리잡이, 잠자리잡이, 자치기, 구슬치기, 돌까기 등등. 그러나 겨울에는 딱히 놀이가 많지 않았다. 썰매 타기가 겨울 놀이의 꽃이었다. 우리는 각자가 썰매 한 대쯤은 보유하고 있었던 것 같다. 요즘의 자가용 같은 거다. 배나다리쪽 얘들이나 꽃산 넘어 용머리 동네 얘들 썰매는 그냥 보기에도 후졌다. 스케이트 날 역할을 하는 철사나 몸체 역할을 하는 판때기는 조악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그에 비해 나의 썰매는 요즘의 제네시스 격이었다. 교실 유리창 철사를 목수 출신의 내 아버지가 유선형으로 멋지게 자른 통판자 밑에 약간의 홈까지 파서 철사가 움직이지 않게 고정까지 시켜놓은 A급 썰매였다. 썰매에서 지팡이 두 개가 관건이었는데 지팡이는 그 길이에 따라 스피드가 좌우되기 때문이다. 길면 빠르고 짧으면 느린 매우 수학적인 구조다. 내 아버지는 지팡이까지 내 몸에 딱 맞게 맞춤 주문제작으로 만들어줬던 거다. 그러니까 내 깐에는 1941년 세계 초일류 영화 오손 웰스 감독·주연 ‘시민 케인’에서 어린 시절 케인이 갖고 있던 ‘로즈버드(rosebud)’ 같은 썰매를 가지고 있던 거다.
문제는 치남이였다. 우리 삽교초등학교 교감 선생님의 아들 유치남의 썰매였다. 녀석의 썰매는 그야말로 당시에는 썰매 중의 썰매였다. 왜냐하면 보통 우리들의 썰매는 유리창 철사가 날 역할을 맡았는데 치남이의 썰매는 자기 아버지가 왕년에 타던 실제 녹슨 스케이트가 밑에 달려 있었다. 믿어달라. 그때 스피드는 별문제가 아니었다.
나의 기술로 비록 철사 썰매였지만 치남이의 썰매를 충분히 따라잡을 수가 있었다. 문제는 스톱할 때였다. 스톱할 때는 총체적으로 달랐다. 치남이가 스톱할 때는 쭉 내달리다가 옆으로 몸만 쓱 틀면 즉시 스톱이 되었다. 스케이트 날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내가 스톱할 땐 옆으로 몸을 쓱 틀어도 금방 스톱이 안 되고 옆으로 쭉 10여 m쯤 밀려 내려가기 때문이다. 아! 스톱을 했는데 쫙 옆으로 밀려 내려갈 때의 비굴한 느낌이라니!
이따금 내가 치남이한테 스케이트를 좀 바꿔 타자고 해도 녀석은 자기 스케이트가 닳는다고 한사코 거절만 해댔다. 나도 자존심 때문에 나중에는 빌려 타보자는 생각을 아예 버렸다.
그리고 세월은 흘러 내가 ‘딜라일라’로 유명 가수가 되고 그때 나는 동대문 뒤 수구문 근처에 살았는데 얼씨구! 동대문 실내 아이스 스케이트장이 문을 연 것이다(1964년). 나는 득달같이 스케이트를 사 신고 연습에 돌입했다. 얼마 만에 코너를 자유롭게 돌 수 있었다. 나는 즉시 머리를 굴려 TV 프로그램을 스케이트장에서 녹화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내가 아는 모든 PD, 이백천 조용호 황정태 PD가 찬성을 했는데 김동건 형한테서 걸렸다. 중지된 거다. 그때 TBC 동양방송의 프로그램 ‘명랑백화점’ 사회자 김동건 아나운서님이 조용히 거절한 것이었다.
나는 “형님! 왜 안 됩니까” 하고 물었다. 겁없이 싸움(?)을 건 것이다.
형님이 대답했다. “난 스케이트를 못 타 인마!” “형님! 형님은 사회자인데 그냥 서서 진행만 하면 되는 건데 왜 그러십니까.”
“야! 니네들은 전부 스케이트를 타고 빙빙 도는데 나만 신발 신고 얼음 위에 서 있으면 그게 무슨 창피냐.”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형님! 녹화 한 시간 전에만 나오십시오! 내가 한 시간가량 스케이트를 신고 서 있는 방법만 알려드리겠습니다.”
녹화 당일 나는 일찌감치 인파로 꽉 들어찬 스케이트장에 먼저 나가 연습에 들어갔다. 드디어 김동건 아나운서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성큼 쫓아 스케이트장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사회자 김동건 형이 너무나 낡아 빠진 폐기 직전의 스케이트를 신고 계셨다. 나는 급하게 말했다.
“형님, 내가 새 스케이트 한 벌 사드리겠습니다.”
“영남아! 괜찮아! 이걸로 신고 배워도 돼.”
나는 김동건 사회자를 스케이트장 안으로 리드를 했다. 그런데 형님이 느닷없이 내 양손을 부여잡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어! 이러면 안 되는데! 했는데 이게 웬일인가. 어느덧 내가 형 쪽으로 끌려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형이 뒤로 스케이트를 타면서 나를 끌고 달리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발만 겹치며 코너를 돌 줄 알았지 뒤로는 한 발짝도 못 가는 실력이었다. 그런데 형님은 내 양손을 잡고 뒤로 스케이트를 타면서 빠른 속도로 나를 한 바퀴 삥 돌고 내 손을 놓는 것이었다. 끌려가면서 나는 알았다. 아, 속았구나!
‘스케이트 사건’ 뒤 자랑 않고 살아
나중에 알고 보니 김동건 형은 피난 내려오기 전 황해도에서부터 형을 따라 스케이트를 배웠고 어려서부터 스케이트 선수로 활약했었다는 것이었다. 그때 신었던 낡은 스케이트는 돌아가신 형님의 위 형님이 쓰던 세계적으로 유명한 오스카 마테진 스케이트였다는 것이다.
나는 한국방송계에서 김동건 형님을 제일 무서워한다. 왜냐. 정치계에서 유혹이 올 것 같은데 끄떡없다. 나보다 잘하는 게 너무 많다. 골프, 당구(500이었다), 볼링, 특히 휘파람. 나는 세상에 그렇게 휘파람 잘 부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딱 한 차례 봤다. 그리고 끝!
그 후로 나는 내가 뭘 잘한다는 얘기를 입 밖에도 꺼내지 않고 살아왔다. 행여 중앙SUNDAY 독자님 중에 언제 어디서 내 입으로 내가 노래를 잘 부릅니다, 내가 그림을 잘 그립니다, 그런 소리를 하는 걸 들어본 사람 있으면 나와 보시라. 내가 스스로를 자랑했다는 사람에게 나의 재산 반을 주겠다. 그 후로 나는 잘난척하는 버릇을 고치려고 평생 노력해왔다. 내가 미술 사건이 막 터졌을 때 김동건 형님이 나한테 그림을 팔아서 번 돈을 전부 사회에 환원하고 다시는 그림을 그리지 않겠습니다라고 공표하라고 명령을(?) 내린 적이 있다. 나는 그런 준엄한 명령을 무시(?)하고 5년간 법정싸움을 벌여 이기고야 말았다.
그렇다. 김연준 총장한테선 돈 얘기 함부로 해선 안 된다는 교훈과 김장환 목사님한테는 남 얘기 함부로 해선 안 된다는 교훈과 김동건 형님으로부터는 잘난척하며 까불어대면 도그(dog)망신 당한다는 교훈을 받고 그걸 배운 대로 실천하려고 전전긍긍하며 살아왔는데 알다가도 모르겠다. 그런 나한테 안티가 왜 그렇게 많은지 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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