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주전·실업·신인까지..꿈 하나로 뭉친 '외인구단' AI페퍼스
우여곡절 겪은 선수들..제2의 배구인생 위해 구슬땀
'할아버지 리더십' 김형실 감독도 마지막 지도자 여정 나서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은 각자의 아픔을 지닌 낙오된 선수들이 최하위 야구팀에 모여 지옥훈련을 감내한 뒤 천재타자 마동탁이 이끄는 최강팀을 물리치는 스토리로 큰 인기를 끌었다.
10년 만에 여자프로배구 제 7구단으로 등장한 페퍼저축은행(AI페퍼스)이 맞닥뜨린 상황도 외인구단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가뜩이나 배구선수 풀이 적은 가운데 AI페퍼스가 간신히 구성한 15명의 선수 면면은 기존 6개 구단의 유명 선수들에 비해 실력과 경험, 인지도 면에서 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팀의 기틀을 이룰 주전급 선수들은 기존 구단에서 보호선수 9명을 제외한 1명을 지명하거나, 자유계약선수(FA) 미계약자 영입을 통해 채워졌다. 선수 경력 대부분을 웜업존에서 버텨낸 이한비(25) 등 7명이 그런 경우다. 외국인·신인 선수 지명을 통해서는 남은 빈자리를 채웠다. 엘리자벳 바르가(22·헝가리) 고교생 박사랑(18) 실업배구 출신 문슬기(29) 등 8명이 부푼 꿈을 안고 도전장을 내밀었다.
배구란 목표를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땀 흘려온 선수들이지만 훈련 여건은 부족하기만 했다. 새 시즌 V-리그는 다음달 15일 개막하는데, AI페퍼스 선수단은 지난 8일에야 한 데 모일 수 있었다. 기존 선수들은 인원 수가 맞지 않아 기본기 훈련만 반복해온 상황. 심지어 고교생들은 다음달 8일 전국체육대회에 출전해야 한다. 손발을 맞추려면 남은 기간 바짝 분위기를 끌어올릴 수밖에 없다.
김형실(70) 감독은 지난 13일 “배구 실력은 연습량에 비례하기에 시간이 필요한데, 우리는 새로 팀을 구성해야 해 이제 시작”이라면서도 “식구들이 코트에 꽉 차니 운동 분위기도 살고 흥이 나 재미있게 연습할 수 있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레프트 이한비(25)는 2015-2016시즌 1라운드 3순위로 흥국생명 유니폼을 입었다. 묵직한 파워가 강점이었지만, 국가대표급 선배들의 존재감에 밀려 6시즌 간 확고한 주전으로 자리 잡진 못했다.
그러다 AI페퍼스가 내민 손을 잡게 됐다. 웜업존이, 언니들의 챙김이 익숙했던 선수는 이제 팀 내 두 번째 고참이자 첫 주장으로 코트에서 후배들을 이끄는 중책을 맡아야 한다. 그동안 경험한 김연경 김해란 등 주장들의 리더십은 참고서다. “코트에 들어갈 때 긴장을 많이 했었는데 언니들이 ‘커버해줄 테니 자신 있게 때려라’란 식으로 말해줬어요. 연경 언니는 이야기를 집중해서 들어주고 해결책까지 제시해준 데다 파이팅까지 좋아 존재 자체로 ‘월클’이었죠. 저도 그만큼 해내고 싶어요.”
실력 발전을 위해서도 노력하고 있다. 좀 더 다양한 루트의 공격을 개발하고, 리시브와 수비를 견고히 만들고, 중요한 순간 포인트를 낼 수 있는 정신력을 가다듬는 등 리더로서 더욱 매진한다. “쉽게 지지 않는 팀으로 만들고 싶어요. 모두 웃으면서 자신 있게 즐거운 배구 할 수 있도록 이끌 생각입니다.”
20대 후반의 나이,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려던 찰나에 고향 땅 전남에 AI페퍼스가 창단됐다. 주변의 권유를 받곤 ‘마지막으로 프로에 도전해보겠다’는 마음을 먹은 문슬기는 늦깎이 신인으로 프로배구 선수가 됐다. 그리고 다시금 진지하게, 배구에 대한 마지막 불꽃을 지핀다. “첫 훈련을 해보고 여러 지원을 받으며 ‘프로는 다르구나’란 걸 처음 느껴봤어요. 나이 많은 신인이지만 노력한 만큼 기회가 올 거라 생각해요. 맞언니로서 실업에서 오래 운동해본 경험을 살려 선수들과 재밌게 지낼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고, 리베로로서 경기가 안 풀릴 때마다 옆에서 커버해주고 도와줄 수 있는 선수가 되고 싶네요.”
첫 도전에 설레는 건 신인 1순위 지명자인 세터 박사랑도 마찬가지다. “학교에선 성적·진로를 위해 배구했다면 프로는 모두가 똘똘 뭉쳐 운동하는 느낌이라 좋아요. 항상 독립하고 싶었는데 혼자 있는 게 좋고, 동기들도 많은 데다 밥도 맛있어요. 언니들을 도와 신생팀 같지 않은 모습 보여드리고 싶어요.”
높은 타점과 파워를 앞세워 팀의 주포가 될 외국인 선수 엘리자벳도 순조롭게 첫 한국 도전을 준비하고 있다. 김 감독이 “김치에 생선회까지 잘 먹는다. 괴성을 지르고 먼저 하이파이브 하는 등 훈련에도 적극적으로 임해 선수들에게 순기능을 미친다”고 칭찬할 정도. 엘리자벳은 “모든 선수들과 친구처럼 지내 적응이 전혀 힘들지 않았다”며 “할 수 있는 한 많은 경기를 이기겠다”고 각오를 밝혔다.
김 감독이 가장 신경 쓰는 건 선수들의 자신감 회복이다. 편안하게 배구에 몰입할 수 있도록 소통을 통해 믿음을 주는 데 집중하고 있다. 정서적 안정을 위해 읽을 책을 구매해주고, 훈련 중엔 ‘개그’까지 준비하는 이유다. 박사랑은 “감독님께 ‘아닙니다’라 했더니 ‘여기가 안이지 밖이냐’고 하셨다. 나이 차이가 안 느껴지게 항상 신경써주시는 것 같다”며 웃었다.
동기부여를 끌어올리는 것도 과제다. 김 감독은 “웜업존에 있는 걸 탓하는 게 아니라 열정과 오기를 스스로 품을 수 있어야 한다”며 “선수들에게 ‘작은 그릇이라도 갈고 닦으면 반짝반짝 빛이 난다. 제 2의 인생을 펼칠 수 있다’고 자주 말하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AI페퍼스는 36년 지도자 생활의 마지막 여정이다. 갑자기 맡게 된 감독직이지만, 김 감독에겐 포부가 있다. “좋은 집이 아니라 튼튼한 집을 지어서 다음 감독이 팀을 맡더라도 ‘기초 공사부터 잘 해놨구나’란 얘기는 듣고 싶어요. 여자 대표선수들이 도쿄에서 했듯, 메달을 따지 못하더라도 전력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네요.”
이동환 기자 hua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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