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 고구려국의 재건 - 고구려 부흥전쟁 (5)
[고구려사 명장면-132] 한 나라와 왕조가 정복당하고 멸망하였을 때, 대부분 그 나라를 재건하고자 하는 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이런 부흥운동은 여러 이유로 나타나겠지만 대체로 그 나라 지배층이 중심이 되어 '복국'을 내세운다. 새로운 나라를 만들겠다기보다는 멸망한 왕조를 되살리겠다는 뜻이 더 강하다. 그러다 보니 이런 부흥운동은 실패로 돌아가기 십상이다.
한 나라가 정복되고 멸망할 때에 물론 침략이라는 외부적 요인이 결정적이지만, 이와 동시에 내부적인 모순이 심하였기에 외부 충격에 적절한 대응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나라가 온전하게 있을 때에도 멸망을 막지 못했는데, 이미 멸망하고 무너져내린 상황에서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일이 여간해서는 가능하지 않을 게다. 더욱 정복자가 강력한 군사력을 갖고 있다면, 이를 물리치고 복국을 실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런 이유로 그 부흥운동이 성공하리란 기대 자체가 어리석은 생각일 수 있다. 고구려와 백제 부흥운동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700년 사직이 무너졌는데, 설사 그 왕조를 그대로 복국하겠다는 시도일지라도, 이런 부흥운동조차 없다고 한다면 역사를 되짚어볼 때 너무 허전할 듯싶다. 마지막 몸부림조차 없는 나라와 왕조였다면, 그간의 번영이나 영광조차 허무하게 느껴질 게다. 여기서 고구려 부흥운동을 환기해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백제와 고구려 부흥운동의 양상은 여러 점에서 달랐다. 백제는 수도 사비성과 웅진성이 무너지고 의자왕 등이 포로가 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부흥운동이 지방세력을 중심으로 거의 전 영역에서 곳곳에서 전개되었다. 아마도 그동안 백제가 신라와 격전을 이어갔지만 군사력을 총동원한 상황이 아니었고, 또한 나당연합군의 공격에서 비록 수도 사비성이 변변한 저항도 하지 못하고 무너진 상태라서 오히려 지방군사력이 그대로 온존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백제 부흥운동 연합군은 한때는 사비성과 웅진성을 제외한 200여 성에서 호응을 얻는 강렬한 기세를 보였다. 하지만 지도부의 분열에다가 신라군의 강력한 공세에 굴복하고 결국 663년 8월 백강전투의 패배로 소멸하고 말았다. 이러한 백제 부흥운동의 모습은 백제 영역을 차지해가는 신라 측에서 제법 상세한 기록을 남기고 있어 어느 정도 그 상황을 복원할 수 있어 다행스럽다.
그러나 고구려 부흥운동의 양상은 백제의 그것과는 여러 면에서 많이 다르다. 우선 지방세력의 움직임이 그리 두드러져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당과의 전면전이 오래 지속되면서 특히 전장의 주무대였던 요동 지역 지방세력과 지방군이 상당히 지쳐 있고, 힘이 소진되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물론 안시성에서 부흥운동이 있었음을 전하는 기록이 있지만, 과거 수·당과의 전쟁에서 보여주었던 요동 지역 항전의 양상과는 결코 비할 바가 아니다.
또한 고구려 유민 묘지명 등에서 부여나 책성 지역에서 부흥운동이 벌어졌음도 짐작할 수 있지만, 그 외 다른 지역에서 어느 정도였는지는 자료상으로 알기 어려워 아쉽다. 다만 고구려 멸망 직후 당 정부가 취한 태도를 보면 고구려 유민의 저항이나 부흥운동이 그리 전면적이지 않았음은 짐작할 수 있다.
이는 백제와 고구려에 대한 당 정부의 대응 방식이 큰 차이가 있었음에도 연유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당은 고구려의 부흥 움직임을 아예 차단하기 위해서 고구려 지배층에 대한 대규모 사민을 통해 주요 근거지인 평양 일대를 공백 지대로 만들 만큼 강력하고 치밀한 지배 정책을 취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강압적인 사민 정책이 오히려 고구려 유민의 저항과 부흥운동을 촉발시키기도 하였다. 안승과 검모잠의 부흥운동이 바로 대표적인 예이다. 그래서 지난 연재 글에서 중국 측 자료가 안승과 검모잠의 부흥운동에 예민하게 반응한 데에는 몇몇 이유가 있다고 추정하였다. 즉 안승이 보장왕의 외손이라는 혈통상 명분을 갖는 인물이라는 점, 고구려의 복국을 내세웠다는 점, 한반도 내 평양과 가까운 한성에서 봉기하였다는 점 등을 고려할 수 있다. 그 무엇보다 고구려 유민의 배후에 신라가 자리하고 있음을 눈치챘기 때문이라고 판단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하면 검모잠 등은 670년 6월에 신라에 사신을 보내 도움을 청하였고, 신라는 7월 말에 사신을 보내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책봉하였다.
그런데 고구려 부흥운동에 대한 당의 대응은 이보다 빨랐다. '자치통감' '신당서' 등 중국 측 자료의 내용을 종합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670년) 4월 28일, 고려 추장 검모잠(鉗牟岑)이 반란을 일으켜 고장(高藏)의 외손인 안순(安舜)을 왕으로 삼았다. 고간을 동주도행군총관(東州道行軍總管)으로 삼고, 이근행(李謹行)을 연산도(燕山道) 행군총관으로 삼아 군사를 내어 토벌하고, 사평태상백(司平太常伯) 양방(楊昉)을 보내 도망치고 남은 무리를 받아들이도록 했다. 안순이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달아났다. 그 후에 남은 무리가 스스로 지킬 수 없어 신라와 말갈로 흩어졌고, 모두 4년 만에 평정되었다.
중국 측 기사는 대부분 고구려 부흥운동 과정을 670년 4월조에 뭉뚱그려 써놓아서 안승이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투항한 시점이 언제인지 불분명하다. 검모잠 등의 부흥운동이 언제 일어나서 어떤 과정을 거쳐 언제 끝났는지 모호하지만 신라본기 자료 등과 대교하면서 전체 과정을 복원해보도록 하자.
우선 위 기사에서 (670년) 4월 28일에 일어난 일은 검모잠의 봉기로 보기는 어렵다. 월일을 명확하게 기록한 것으로 보아 당 정부가 고간(高偘)을 동주도행군총관에, 이근행(李謹行)을 연산도행군총관에 임명한 날이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 검모잠의 반란이 있었고, 이 소식이 당 중앙 정부에 전해졌다는 뜻이다. 신라본기 기사에 의하면 검모잠이 안승과 함께 한성에서 고구려국을 재건한 뒤 보낸 사신이 신라에 도착한 시점은 6월이었다.
검모잠이 봉기를 일으키고 그 뒤 안승을 왕으로 옹립한 시점이 6월보다는 앞서지만 구체적으로 언제인지는 자료상으로 불분명하다. 그렇지만 4월 28일에 당 정부가 군대 파견을 결정할 정도로 한성에서 고구려 복국이 4월보다 훨씬 이른 시점으로 보기는 어렵다.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검모잠 등이 아직 군사행동이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당이 이를 진압하기 위해 부랴부랴 4만 군대를 파견했다고 이해하기는 어렵다. 만약 당 정부가 한성을 타킷으로 삼았다면 육군보다는 수군을 출정시키는 것이 더 빠르고 효과적인 군사 대응이었을 것이다.
이런 여러 정황을 살펴보면 당 정부가 4월에 군대 파견을 결정할 정도의 사안은 군사행동과 같은 보다 심각한 고구려 유민들의 움직임이었을 것이다. 이때 우선 떠오르는 사건이 전회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670년 3월에 고연무와 설오유가 이끄는 2만 군대가 압록강을 건너 오골성에 이르러 4월 4일에 말갈군을 대파시킨 전투이다. 이 소식은 곧바로 당 정부에 전해졌을 것이다. 이런 고구려 유민들의 저항을 차단하기 위해 669년에 대규모 사민을 단행했던 것인데, 여전히 고구려 유민들의 군사행동이 압록강을 건너올 정도였다는 점은 당 정부로서도 매우 우려할 만한 일이었을 게다. 그래서 4월 28일에 곧바로 원정군을 구성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만 해도 당 정부는 오골성전투를 벌인 주체가 누구인지 몰랐을 것이다. 이때 신라군이 개입되었다고는 더욱 눈치채지 못했으리라. 신라 입장에서는 당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고연무의 고구려군을 앞장세워 신라군의 존재를 감추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당 정부는 오골성전투를 온전히 고구려 유민군에 의한 군사행동으로 간주했을 터이니, 이런 상황을 상당히 심각하게 보고 부랴부랴 군사적 대응에 나섰던 것이다. 그런데 얼마 뒤 안승과 검모잠이 한성 고구려국을 재건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오골성전투가 바로 검모잠 등이 주도한 것으로 잘못 파악했을 가능성이 크다.
4월에 당 정부가 원정군을 구성했다고 해서 곧바로 한반도에 군대가 투입될 수는 없다. 고간이 거느린 당군이 670년 그해에 한반도로 진군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이듬해 7월에 고간이 안시성에서 고구려 유민군을 격파하였다는 기록을 보면, 당군은 그때까지 요동 일대에서 벌어졌던 고구려 유민들의 부흥전쟁을 물리쳐야 했기에 한반도로의 진군은 이듬해까지 지체되었다.
다시 말해서 670년 3~4월의 오골성전투 혹은 한성 고구려국의 재건 소식이 요동 지역 고구려 유민들의 움직임에 적지 않은 자극이 되었던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 669년 당 사민 정책에 의해 요동 지역 주요 세력 역시 요서 영주 일대로 이주되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그 저항력이 약화되어 그동안 당에 대해 본격적인 저항이나 부흥운동을 전개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669년 4월 이후 편성된 고간이 거느린 4만 군대는 예상치 못하게 안시성 등에서 벌어진 저항으로 요동 지역에서 발이 묶였다가 이를 겨우 격파하고 671년 9월에야 평양에 도착하여 군영을 만들고 대방 지역에 대한 공세를 시작하였음을 '신라본기' 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대방 지역이란 한성이 위치한 지역을 뜻한다.
이때의 전투 상황은 기록이 없어 전혀 알 수 없지만, 일단 고구려 부흥군이 당군을 물리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듬해 672년 7월에 다시 고간과 이근행이 이끄는 당군이 평양에 이르러 8곳 군영을 설치하고 8월부터 본격적인 공세를 시작하여 이후 당군과 고구려 부흥군과의 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음을 '신라본기'에서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기록의 양상으로 보아 671년 9월 무렵에는 한성 고구려국의 부흥군이 당군을 물리치고 한성 고구려국의 존재감을 주변에 보여주었으리라 추정한다.
한성 고구려국이 요동 지역이나 다른 지역 부흥운동의 구심점이 되지는 못하였겠지만, 그 존재가 어떤 형태로든지 영향을 주었으리라 보인다. 적어도 한반도 내에서는 부흥운동을 이끌었고, 오골성전투를 벌였던 고연무와 그가 이끄는 1만 정예군도 한성 고구려국에 합류하였다.
한성 고구려국의 위세는 크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고구려 유민들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켜가는 공간이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그런데 새 고구려왕 안승이 그런 자존심마저 제대로 지켜가지 못했음이 또다시 안타까울 뿐이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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