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수프와 이데올로기

입력 2021. 9. 17. 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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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숙 마음산책 대표


가족은 가치관이 같다고 생각하는가. 국가의 이념적 사건에 연루된 개인의 상처는 어떻게 공유되고 치유할 수 있는가. 관객의 자리에서 뜨거운 마음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어느 나라 어디에서든 상영돼도 내 영화의 제목이 바뀌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제목을 ‘수프와 이데올로기’로 정했죠.” 어머니가 마늘을 넣고 고아주는 닭 요리를 백숙이나 삼계탕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럼에도 굳이 ‘수프’라고 제목 붙인 이유에 대해 양영희 감독은 말했다. 국경을 넘어도 제목이 일관되게 통용되고 이해받고 싶은 건 창작자의 평범한 소망인 듯하다. 그러나 양 감독의 삶을 떠올리면 이 말은 간단하지 않다. 겹겹이 함의가 깊다.

재일 조선인 부모 밑에서 태어나 북송 사업으로 평양에 세 오빠를 보내는 걸 목격한 양 감독. 남겨진 외동딸이었지만 이데올로기 차이로 아버지와 밥도 먹지 않았던 20대의 양 감독은 미국 뉴욕을 다녀온 뒤 가족을 이해하기 위해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 정체성에 대한 복잡한 질문의 답을 다큐멘터리를 찍으며 찾아내려고 했다. 다큐멘터리의 미학을 가족 이야기에서 구축한 그의 작품들은 보는 사람을 압도한다. 뛰어난 작품 연출에 대한 찬사에 앞서 영화 속 가차 없는 현실 직시의 아픔은 말로 표현되기 어려운 감상을 남긴다.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개막작으로 초청된 ‘수프와 이데올로기’에서 양 감독은 국가와 개인의 관계, 이데올로기에 얽힌 진실을 탐구한다. ‘디어 평양’ ‘굿바이, 평양’ 등 전작은 신작으로 귀결됐다. 이번엔 어머니의 숨겨진 이야기다. 감독의 어머니 강정희씨는 일본에서 태어나 열다섯 살 때까지 그곳에서 자랐다. 1945년 2차 세계대전 때 미국의 일본 공습을 피해 고향 제주도로 피난 왔다. 열여덟 살 때 4·3사건이 발생하고 약혼자가 무장대를 돕기 위해 한라산에 입산한 뒤 죽음을 맞자 위협을 느껴 다시 오사카로 밀항한다. 조총련 간부였던 아버지는 생전에 미국인 사위나 일본인 사위는 안 된다고 했지만 홀로 남은 어머니는 일본인 예비 사위가 처음 인사 온 날 닭 요리를 한다. 국적이 달라도 생각이 달라도 밥은 함께 먹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양 감독은 그간 어머니의 역사를 알지 못했다. 왜 고향과 한국에 대해 잊었노라 부정하고 말을 아꼈는지를. 4·3사건이 뉴스에 나오자 나도 생존자였노라고 불안한 눈빛으로 딸에게 말을 건네기 전까지는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묻어뒀으나 또렷하게 비극을 기억하는 어머니의 이야기는 영화의 동력이었다. 개인은 정치와 분리되지 않는다. 나라를 선택할 수 있다고, 이데올로기는 가치의 문제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영화는 선택의 실체를 묻는다.

딸에게 역사를 증언하던 어머니는 알츠하이머를 앓게 된다. 병중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난 남편과 큰아들, 그리고 북에 살고 있는 두 아들과 함께 사는 환상 속으로 들어선다. 태어나서 자란 일본, 4·3사건으로 도망치듯 떠난 고향 제주, 세 아들을 보내야만 했던 북한 어디에도 마음 둘 수 없었던 어머니는 환상 속에서 가족과 함께한다. 아버지는 어디 가셨냐고 묻고, 방에 아들이 없다고 중얼거린다. 조선 국적을 가진 일본 동포의 한국 방문을 허가한 정책 덕분에 일회용 여권으로 제주도에 도착한 어머니의 눈빛은 명료하지 않다. 회한도 읽기 어렵다. 그 눈빛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양 감독의 내레이션은 한껏 낮은 톤이다. 어머니의 역사를 이해하려는 딸의 목소리였다.

‘디어 평양’의 내용을 문제 삼은 북한은 양 감독의 입국을 허가하지 않았다. 오빠들을 더 이상 만날 수도 없다. 만약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다면 평양으로 모셔야 할 것이다. 아버지 옆에 묻어 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양 감독은 어머니를 잘 배웅할 수 있을까. 이데올로기가 가족의 밥상과 고유한 의식을 결정짓는 현실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곧 귀향의 시절이다. 자신의 의지대로 가족을 찾아갈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고향 이야기를 아픔 없이 꺼낼 수 있는 시간은 자유롭다. 이런 행복과 자유를 누릴 수 없는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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