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영환의 지방시대] 포철 성공신화 DNA로 기술 벤처 메카에 도전

오영환 2021. 9. 17.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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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 보육 ‘체인지업 그라운드’를 가다


포스코의 창업 보육 센터인 ‘체인지업 그라운드 포항’건물은 가운데가 뻥 뚫렸고, 벤처 맞춤형으로 설계 돼 호평을 받고 있다. 송봉근 기자
지난 3일 오전 10시 경북 포항시 남구 포항공대(포스텍) 한가운데의 ‘체인지업 그라운드(CHANGeUP GROUND·CG)’ 건물. 외관은 다른 연구동과 비슷했지만, 로비에 들어서니 딴판이었다. 7층 건물 가운데가 천정까지 뻥 뚫렸고, 케이블카 같은 회의실에서 입주사 직원끼리 미팅하는 모습이 들어왔다. 축구장 네 개 크기 규모(연면적 2만8000㎡)에 약 100개 업체가 입주할 수 있는 이곳은 지방에 하나의 신기원이다. 판교 이남의 최대 창업 보육(Start-up incubation) 센터다. 포스코가 830억원을 들여 지난 7월 개관했다. 체인지업 영문 표기에서 소문자 e를 쓴 것은 창업(CHANGUP)과 혁신을 함께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건물 지번 ‘청암로 87’도 상징적이다. 청암(靑巖)은 포항제철 신화를 일군 고 박태준 회장의 호(號)이고, 87은 포스텍이 첫 입학생을 받은 해다.

「 축구장 네 개 크기, 지방 최대 규모
68개 벤처 입주…기업가치 4672억
포스코 판매망, 포스텍 인프라 활용
‘또 하나의 퍼시픽 밸리’ 야망 키워
과학 주도 지방회생 모델로 주목

830억원 들여 두 달 전 개관

건물 전경. 송봉근 기자

건물 내부는 벤처 맞춤형이다. 발랄하고 섬세하다. 1인 공간인 워크 큐브, LP판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뮤직 라운지와 플레이 존, 작은 오두막식 휴식 공간 등등. 여기에 공용 부엌과 첨단 캡슐형 수면실, 샤워실도 갖췄다.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공간다웠다. 시제품을 만드는 메이커 스페이스와 빅데이터 관련 연구소 등도 빼놓을 수 없다. 입주 기업 사무실은 3·6·12인실로 돼 있다.

옥상에 올라가 보니 건물은 극미세 물체를 분석·가공하는 가속기연구소, 포항산업과학연구원(RIST)과 포스텍 연구동에 둘러싸여 있었다. 입주 벤처와 함께 호흡하는 세계적 수준의 연구 인프라들이다. 포스코가 내건 ‘또 하나의 퍼시픽 밸리(Pacific valley)’ 비전의 버팀목들이다. 태평양 서쪽에 실리콘 밸리에 버금가는 벤처 플랫폼 생태계를 구축하겠다는 포스코의 구상은 야심 차다. 반세기 전 영일만 모래밭에서 제철보국(製鐵報國)의 길을 연 도전의 DNA가 꿈틀거린다. 2017년 기준 전국 4차 산업혁명 관련 사업체(6만3536개)의 61.3%, 종사자(115만2463명)의 58.9%가 서울·경기·인천의 수도권에 몰린 상황에서 CG는 혁신보국의 메카가 될 수 있을까. 포항에서 다시 거대 실험이 시작됐다.

박성진

“1인당 국민소득 5만 달러, 6만 달러로 가려면 대기업 경제 엔진만으론 한계가 있다. 대기업의 새로운 미래 사업을 위해서도 기술 벤처 생태계라는 또 다른 성장 엔진이 필요하다. 미국은 테슬라·애플·구글·아마존·페이스북 등 벤처 투자를 받은 기업들이 이미 주류가 됐다. 시가총액의 57%, 총고용의 38%를 차지한다. 지금의 시대정신은 벤처 창업정신(Founding Spirit)이다.”

포스코 벤처 플랫폼 구축의 실무 책임자인 박성진(53) 산학연 협력실장은 “2030 미래 세대에게 전 세계로 나갈 수 있는 가장 큰 운동장을 만들어주는 것이 신사업의 방향이고, CG는 그 일환”이라고 말했다. 산학연 협력실은 영리기업인 포스코와 비영리 교육·연구기관인 포스텍·RIST·가속기연구소의 접점 조직이다. 박 실장은 포스텍 1기 출신으로 모교 기계공학과 교수를 거쳐 2019년 부임했다.

Q : 기존 벤처 생태계 구상과의 차이점은.
A : “포스코가 가진 80개국 160개 해외 사무소를 기반으로 하는 글로벌 마케팅 네트워크를 벤처 기업에 제공한다. 입주 기업은 방사광가속기 2기, 반도체 공정을 연구하는 나노융합센터, 바이오연구소 등 2조원 규모의 연구 시설도 활용할 수 있다. 단일 캠퍼스로는 미국 스탠퍼드대에 이어 세계 2위다. 포스코 연구소까지 합치면 연구 인력 5000명이 매년 연구비 1조원을 쓰는 시스템도 갖추고 있다. 여기에 포항과 광양 등 지자체와 함께 지역 벤처 생태계 구축을 위해 적극적으로 연계·협력하고 있다. CG는 이런 것 모두를 융합해 새 미래를 만들어내는 운동장이다. 벤처 밸리의 좋은 모델을 만들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1조원 펀드 조성, 1000개 벤처에 투자

1인 공간인 워크 큐브. 송봉근 기자

Q : 벤처에 대한 재정 지원도 하나.
A : “포스코는 벤처 생태계를 위해 1조원을 조성했다. 이 중 8000억원은 벤처 기업 투자에, 2000억원은 포항·광양의 창업 생태계 구축에 활용하고 있다. 재무적 연결 고리도 완비했다는 얘기다. 이를 통해 산학연 협력의 신사업을 창출한다. 그 자연스러운 결과로 지방 경제가 활성화하고, 청년 일자리도 새로 생겨날 것이다.”

Q : 향후 목표는.
A : “1조원 펀드를 통해 1000개 이상의 벤처에 투자하고, 이 가운데 20개 정도가 매년 코스닥에 상장하고, 1~2개가 나스닥에 상장하는 포스코 벤처 생태계를 만들 계획이다. 이렇게 되면 포스코는 언제든지 신사업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게 된다. 연구중심 대학인 포스텍 입장에선 미국처럼 새로 배출하는 박사 인력의 30%가 창업할 수 있는 운동장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Q : 벤처 생태계 구축이 지역의 활력소가 될 것이라는 기대가 높다.
A : “지방 소멸은 정책으로만 해결되지 않는다. 기술과 함께 풀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가전제품을 비롯한 기술 혁명이 여성 해방에 일조를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지방에서 사람이 빠져나가는 것은 고급 일자리가 없고, 교육과 의료 환경이 수도권보다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벤처 기업들의 언택트 기술로 지방소멸 문제에 대응할 좋은 기회다. 현재 경북도와 교육·의료·교통·환경·에너지·농업·금융의 7개 분야에서 창의적 벤처 기술을 발굴해 혁신 사업에 나서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Q : 구체적 사례를 든다면.
A : “교육의 경우 경북도와 초중고 온라인 AI·과학 교육 프로그램 도입을 논의 중이다. 포스텍 교수 등이 프로그램을 만들고, 전체 초중고생이 매주 하루 비대면 특별수업을 받는 방안이다. 동시에 스탠퍼드대처럼 온라인 중고 국제학교를 개교해 경북 전체 학생들이 국내외 최고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시스템도 강구하고 있다. 의료는 혁신적 건강관리 시스템을 구축하는 방안을 협의 중이다. 벤처 기업이 260만 도민 전체의 DNA 검사를 하고, 이를 건강검진 데이터와 통합하는 내용이다. 물론 이들 정책을 위해선 규제 완화가 필요하다.”
기술·홍보·투자 등 시너지 효과

개관 두 달을 맞은 CG 포항엔 혁신 인재들의 꿈이 영글고 있다. 자율주행 솔루션 개발·공급 업체인 폴라리스쓰리디(Polaris3D)의 곽인범(32) 대표는 포스텍 박사과정 휴학생이다. 그는 “여러 기업이 CG에 함께 입주해 있어 기술·홍보·투자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시너지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며 “원천기술과 사업성에 좋은 작업 환경까지 갖췄으니 반드시 성공해 해외로 진출할 것”이라고 했다. 포스코 기술연구원 박영준(55) 연구원은 친환경 분야 입주사인 (주)이옴텍 대표를 맡고 있다. 폐플라스틱과 제철소 부산물인 슬래그로 복합 재료를 개발해 건축과 토목에 적용하는 사업을 개도국까지 확장할 계획이라고 했다.

CG 포항과 바로 옆 바이오 센터에 입주한 스타트업은 7월 기준 68개사로, 기업 가치가 4672억원이라고 포스코 측은 설명한다. 지난해 서울 강남구 역삼로에 문을 연 CG 서울의 11개 입주사(885억원)를 압도한다. 포항·서울을 합쳐 기업 가치가 50억원 이상인 스타트업은 22곳으로, 이 중 14곳이 바이오 업종이다. 광음향 현미경과 초음파 영상장비 관련 기술을 보유한 업체 옵티코와 광통신 핵심 부품 개발·연구 업체인 레신저스의 가치는 100억원을 넘는다. CG를 다녀온 이홍원 한국생명공학연구원 바이오경제혁신사업부장은 “우리나라에서 주로 창업 보육 사업을 하는 대학이나 공공기관은 저렴하게 혜택을 주지만 신축적인 운영을 못 한다”며 “CG 포항은 해외의 상업 목적 창업 보육 시설과 수준이 비슷하다”고 말했다.

CG 포항은 국가와 기업의 새 성장 엔진을 넘어 과학 기술이 주도하는 지방 회생의 모델로도 주목거리다. 지역 인재의 수도권 유출 흐름을 완화하고 수도권 인재의 역류를 끌어낼 하나의 4차 산업혁명 교두보다. 판교 라인 이남엔 포스텍 외에도 연구중심 대학이 건재하다. 대전엔 KAIST를 비롯한 대덕연구개발특구가, 다른 광역시엔 GIST(광주과학기술원)·DGIST(대구경북과학기술원)·UNIST(울산과학기술원)가 있다. 학위 과정 중 기술 창업을 하는 사례가 한둘이 아니다. 지역다움을 살리되 경계를 넘어 서로 손을 맞잡는 과학 주도 성장 회랑이 생겨나기를 기대해본다.

오영환 지역전문기자 겸 대구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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