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소문 포럼] 코사구팽

최현철 입력 2021. 9. 17. 00:24 수정 2021. 9. 17. 0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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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철 정책디렉터

1284년 6월 독일 하멜른이란 마을에서 130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공문서에도 기록됐다는 이야기에 살이 붙어 다양한 버전으로 전해지다가 그림 형제가 스토리 라인을 완성한 동화가 ‘피리 부는 사나이’다. 쥐가 들끓던 마을에서 거액의 상금을 내걸고 퇴치 공모전을 벌인다. 혜성처럼 등장한 사나이가 피리를 불어 쥐를 강물로 유인, 숙원사업을 해결해준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대금 지급을 거부했고, 화가 난 사나이는 이번엔 피리로 아이들을 데리고 사라져 버렸다.

비슷한 일이 1645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도 벌어졌다. 발단은 역시 쥐. 쥐가 옮기는 흑사병에 사람들이 죽어 나가자 시 당국이 거액의 월급을 내걸고 전담 의사를 모집한다. 여기에 지원한 조지 래라는 의사는 요즘으로 치면 ‘D 레벨 방호복’쯤 되는 보호장구를 착용하고 성공리에 임무를 완수한다. 시 당국은 뻔뻔했다. “살아 돌아올줄 몰라 급여 책정을 안 했다”며 약속한 급여를 주지 않은 것이다. 피리를 불 줄도 모르는 닥터 래는 10년간 소송을 벌이다 생을 마쳤다고 한다.

「 정부, 코로나 병상 제공 행정명령
전담병원엔 보상 단가 일방 삭감
급할 땐 읍소, 나중엔 의료진 배신

감염병과의 투쟁사에서 눈에 띄는 두 에피소드는 토사구팽(兎死狗烹)의 전형이다. 등장 동물을 고려해 ‘서(鼠)사구팽’이 더 어울릴까? (균과 바이러스를 포함한) 동물의 기승과 영웅의 등장, 당국의 배신이라는 서사 구조는 한국에도 차고 넘친다.

코로나19 거점전담병원인 경기도 평택시 박애병원에서 의료진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연합뉴스]

최근 경기 평택의 더나은 요양병원과 서울 구로구 미소들 요양병원이 잇따라 코로나 전담병원 지정을 해제해 달라고 공식 요구했다. 두 병원은 연초에 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기존 환자를 모두 내보내고 전담병원으로 전환했다. 당시는 3차 대유행이 번지며 요양병원들이 집단감염의 불쏘시개가 되고 있던 때다. 이미 지친 의료 인력들이 손을 들고 탈출해 힘든 때였지만, 두 병원은 충분한 보상과 인력지원을 하겠다는 정부 말을 믿었다.

다행히 백신이 들어와 요양병원 입소자들부터 접종하게 되면서 3차 대유행은 점차 잦아들었다. 그러자 정부의 말이 바뀌기 시작했다. 6월 들어 병원 종류별로 책정하던 손실보상 단가를 개별 병원의 과거 실적을 토대로 바꿨다. 더나은 병원은 보상금이 병상당 16만원에서 5만6000원으로, 미소들은 11만원으로 깎였다. 최근엔 파견된 지 두 달이 넘은 의료진에 대해 10월부터 급여를 지원하지 않겠다고 했다. 기존 의료진 수가 적어 파견 인력이 많이 필요한 병원으로선 감당할 수 없는 요구다. 미소들 요양병원 윤영복 원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애초에 정부를 믿은 게 잘못”이라고 푸념했다.

정부의 갑질은 2015년 5월 메르스 사태와 판박이다. 당시 환자가 다녀간 병원들은 자진해 일시 폐쇄하거나 자체격리를 하는 등 방역에 적극 동참했다. 재정적 손해가 엄청났다. 박근혜 당시 대통령을 필두로 고위공무원들이 줄줄이 나서 충분한 보상을 약속했다. 현재 보건복지부 장관이 된 권덕철 당시 보건의료실장도 그중 한 명이다. 하지만 보상이 차일피일 미뤄지더니 의료계가 처음 추산한 손실액의 절반만 예산에 반영됐다. 그나마 당시 환자의 절반가량을 소화한 삼성서울병원은 사태 초기 잘못 대응한 책임이 있다며 600억원 넘는 손실보상금 대신 과징금 처분을 받았다. 삼성병원은 지루한 소송 끝에 최근에야 승소했다. 삼성과 같은 뒷배가 없는 중소 병원들은 골병이 들었다. 자진 폐쇄에 동참했지만 보상 대상에서 제외된 창원 SK병원은 2년 뒤 폐업을 하고 말았다.

5년이 흘러 코시국(코로나19 유행 상황)에서도 같은 일이 되풀이된다. 지난해 2월 대구 경북을 중심으로 코로나 1차 유행이 번져 의료 붕괴 상황에 처했을 때 무려 2000명에 이르는 의료진이 생업을 내팽개치고 달려갔다. 정부와 국민 모두 ‘영웅적 희생’을 추켜세웠지만 정작 이들 중 수백명의 임금이 체불돼 국민적 분노를 샀다. 당시 대구시의 행정 착오라는 변명으로 유야무야 넘어갔지만, 중앙 정부도 다를 바 없었다. 국민의 힘 조명희 의원실에 따르면, 올 초까지 전국의 코로나 대응병원에 파견된 의료진 임금 185억원이 체불된 것으로 드러났다. 정부는 2월이 돼서야 예비비를 편성해 밀린 월급을 줬다.

얼마 전, 정부는 수도권과 지방의 병원들에 의무적으로 병상을 제공하라는 행정명령을 발동했다. 델타 변이 확산으로 위·중증 환자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이런 와중에 기존 전담병원들에 대한 보상을 줄이겠다고 한다. 코로나19 사냥이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코(CO)사구팽’(코로나+토사구팽)을 미리 선언하는 셈이다. 코사구팽의 결말이 사냥개 제거로 마무리되지 않고, 마을 아이들이 깡그리 사라지는 비극으로 끝나지나 않을지 걱정을 지울 수 없다.

최현철 정책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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