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아이] '공기'를 읽지 않는 일본 공주
이달 말 자민당 총재선거와 이어지는 중의원 선거 등 일본은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이지만 정작 요즘 가장 궁금한 일본인은 이 사람이다. 무려 4년에 걸친 국민의 반대를 무릅쓰고 올해 안에 결혼을 하겠다고 발표한 일본 왕실의 마코(眞子·29) 공주다. 마코 공주는 현 나루히토(德仁) 일왕의 조카, 즉 일왕의 동생인 후미히토(文仁) 왕세제의 큰딸이다.
지난 2017년 가을, 마코 공주가 대학에서 만난 동갑 남자친구 고무로 게이(小室圭)와 약혼을 발표할 때만 해도 상황은 괜찮았다. 하지만 고무로의 ‘복잡한 가정사’가 드러나면서 분위기는 급변했다. 일찍 남편과 사별한 고무로의 어머니가 동거하던 남성에게 4000만원을 빌려 갚지 않았다는 논란이 불거졌다. 이후 고무로 가족의 ‘깔끔하지 않은’ 온갖 사생활과 돈 문제가 터져나왔다.
일본인의 고무로 모자(母子)에 대한 반감은 상상 이상이다. 결국 결혼은 연기되고 고무로는 미국 유학을 떠났지만 지난 수년간 거의 매주 관련 뉴스가 주간지를 장식했다. 최근엔 고무로가 뉴욕의 로스쿨을 졸업하고 로펌에 취직하기 위해 허위 이력서를 썼다는 폭로까지 나왔다. 한 조사에선 응답자의 97.6%가 마코 공주의 결혼에 반대했다고 하니, 온 국민이 공주의 부모 입장이 돼 “이런 집안과 결혼시킬 수 없다”고 나선 셈이다.
물론 ‘기분 문제’만은 아니다. 왕실 유지에는 막대한 세금이 들어간다. 현재 법으로 여성 왕족은 결혼과 함께 왕적을 박탈당하지만, 품위 유지를 위해 최대 1억5250만엔(약 16억원)의 지원금을 받는다. 이 역시 세금이다. 국민 덕에 존재하는 왕족이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이기적’이라는 비판도 쏟아진다.
놀라운 것은 마코 공주다. 나라 전체에 “이 결혼 반댈세”라는 ‘공기(空気·분위기)’가 꽉 찼는데도 포기하지 않는다. 돈이 문제라면 지원금은 받지 않거나 기부하겠다고 나섰다. 세금으로 치러지는 성대한 결혼식도 하지 않고 혼인신고만 한 후, 남자친구가 있는 미국 뉴욕에서 신혼 살림을 차리겠다고 선언했다. 전통과 의례가 모든 것인 일본 왕실에서 “다 필요 없고 행복해지고 싶다”고 외치는 공주가 등장한 것이다.
‘공기를 읽는 것’은 일본인의 미덕이자 한계다. 야마모토 시치헤이(山本七平)라는 학자는 『공기의 연구』라는 책에서 공기를 ‘개인의 선택을 제약하는 보이지 않는 강력한 힘’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이런 공기를 읽지 않기로 결정한 공주의 선택을 응원하고 싶다. 정체된 공기에 둘러싸인 듯한 일본 사회에도, 왕실에도 변화가 필요한 때가 왔음을 보여주는 신호 같아서다.
이영희 도쿄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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