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스타산책] 조수와 - 퇴근길, 와인 한 병 어때요?

박현주 2021. 9. 16.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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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파구 '조수와(조금 수상한 와인숍)'
낮에는 IT기업 마케터, 밤에는 와인숍 대표로
와인에 대한 애정이 매장 오픈까지 이어져
"떡볶이, 간장게장, 은행구이과도 어울려요"
와인과 어울리는 한식 추천도
저녁 6시에 문을 연 보틀 와인숍 '조수와' 전경./사진=박현주 기자 phj0325@

[아시아경제 박현주 기자] 해가 지면 정체 모를 마법의 힘에 의해 자연사 박물관에 전시돼있던 카우보이, 이집트 파라오가 눈을 뜨고(영화 '박물관이 살아있다'), 야수의 성에선 주전자, 시계 등 가재도구가 살아 움직인다(영화 '미녀와 야수'). 알라딘,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으로 유명한 아라비안 나이트도 어두운 밤이 배경이다. 이렇듯 밤은 신비로운 시간일 수 있다.

서울 송파구에도 어둠이 내려앉을 때 쯤에야 문을 여는 수상한 곳이 있다. 낮에는 흰 커튼으로 가려져 있다 밤이 되면 환히 불을 켜며 인스타그래머들의 발길을 붙잡는 곳. 보틀 와인숍 '조수와(조금 수상한 와인숍)'다. 가락시장에서 경찰병원쪽으로 큰길을 따라 2분쯤 걷다가 골목으로 꺾어 올라가면 된다.

지난해 7월 조수와를 창업한 주인공은 '헤더'(실명은 따로 있지만, 그렇게 불리우길 원한다고 한다). 해가 뜨면 회사로, 해가 지면 매장으로 출근하는 'N잡러(직업을 여러 개 가진 사람을 일컫는 말)'다. 돈을 벌기보단 와인을 즐기고 싶어 가게를 차렸다는 그의 와인에 대한 애정은 매장 전체에 스며있다. 이곳에 들어서면 은은하면서도 깊은 나무향이 먼저 반긴다. 나무로 된 가구를 배치한 따뜻한 인테리어도 조수와 특유의 편안한 분위기를 끌어올린다. '외국인에게 동치미 맛을 설명할 때', '향수로 치면 FRESH!' 등 조수와에서만 볼 수 있는 센스있는 한 줄 평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매장에 전시돼있는 와인들./사진=박현주 기자 phj0325@

비싸고 고급스러운 술로만 여겨지던 와인은 어느새 맥주의 아성을 위협하고 있다. 코로나19로 혼자 술을 즐기는 '혼술'이 트렌드가 되면서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와인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고도 한다. MZ세대(밀레니얼+Z세대)의 취향을 저격한 다양한 도수와 예쁜 라벨 등 '인스타 감성'도 와인 인기의 일등 공신이다. 지난 5월 이마트가 올해 1~4월 주류 구매 실적을 분석한 결과 2030세대의 와인 매출은 전년 대비 53% 성장하며 전 연령대 가운데 가장 높은 성장률을 보였다. 조수와를 찾는 손님도 주로 2030세대 여성, 그리고 젊은 커플·부부들이다.

조수와의 수상한 점은 영업시간에만 있는 게 아니다. '떡볶이와 잘 어울려요!', '한식과 두루두루~ 간장게장과도 OK!'와 같은 한식 안주 추천을 보면 눈이 휘둥그레진다. 모두 반주를 사랑하는 헤더 대표나 단골 손님들이 직접 먹어보고 추천하는 조합이다. 왠지 와인에는 고급스러운 치즈, 스테이크를 곁들여야 할 것만 같지만 의외로 한식과도 잘 어울린다고 헤더 대표는 귀띔했다. 엉뚱해보이는 조합에 긴가민가하며 사갔던 손님들도 모두 흡족해했다는 후문이다. 은행구이, 버터간장밥도 헤더 대표가 추천하는 대표적인 와인 페어링 메뉴다.

이 추천에도 여전히 와인과의 페어링이 고민된다면 조수와의 인스타그램이나 블로그를 방문하면 된다. 헤더 대표의 친절한 와인 소개와 함께 프랑스 요리 학교인 르 꼬르동 블루 출신 S(필명)가 연재하는 레시피 북을 만나볼 수 있기 때문이다. 레시피는 와인과 어울리는 △차돌콩나물 솥밥 △당근라페 샌드위치 △낫또소바 △버터와 크림치즈가 들어간 곶감말이 △파래새우전 등을 소개하고 있다. 만드는 방법도 3~4단계 정도로 손이 적게 가는 음식들이다. 술을 마신 뒤 산책한다는 의미의 '선주후보(先酒後步)'를 주창하는 진정한 애주가 B(필명)의 음주 에세이도 함께 읽어볼 수 있다. 셋은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와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사이다.

매장에 진열된 와인들. 독특한 한줄평이 눈에 띈다./사진=박현주 기자 phj0325@

탄닌감, 풍성한 아로마, 바닐라 뉘앙스… 와인에 대한 관심으로 와인 코너에 방문했지만 막상 어려운 외국어와 고급스러운 라벨에 주눅 들어 쭈뼛거렸다면, 그러다 값비싼 추천 와인만 손에 들고 돌아선 경험이 있다면 조수와에서 헤더 대표를 찾으면 된다. 와인 자격 시험인 WSET 3급을 소지한 그도 과거엔 백화점 와인 코너를 기웃거리다 직원의 추천에만 의존했던 시절이 있다. 특히 제대로 된 설명도 듣지 못한 채 처음 내추럴 와인을 접했을 땐 '이게 뭐야. 똥맛인가?' 싶었다고. 그래서 헤더 대표는 자신이 직접 먹어보고 엄선한 와인들만을 추천하고 있다. 그의 설명을 듣다 보면 와인 입문자들도 어느새 고개를 주억거리게 될 것이다.

그래서일까. 헤더 대표가 매장을 열면서 세운 목표도 와인의 대중화, 와인의 문턱을 낮추는 것이다. 맥주가 외국 술임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듯 와인도 우리 식탁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으면 좋겠다는 게 그의 바람이다. "그냥 단순히 라벨 디자인이 예뻐서 와인을 구매하는 것도 좋아요. 저도 처음엔 비주얼에 많이 끌렸던 것 같아요. 비주얼이 독특하니까 와인이 가진 스토리도 궁금해진 거죠." 헤더 대표가 가장 추천하는 코스는 조수와에서 와인을 산 뒤 가락시장에 들르는 것이다. 그는 조수와에서 산 '러시안 잭'과 가락시장에서 막 썰어낸 회를 함께 즐겼다는 손님의 후기를 매장 인스타그램을 통해 공유해두기도 했다.

단골 손님의 입을 빌리자면 조수와는 '퇴근길 가끔 들러 곳간을 채우는 곳'이다. 벽장에 나란히 진열된 와인 몇 병만큼 애주가들에게 배부르고 흐뭇한 광경이 또 있을까. 누구에게나 유난히 발걸음이 무거운 밤이 있다. 사람에 치이고 일상에 질려 도망갈 곳이 없다고 느껴질 때, 퇴근길 와인 한 잔으로 스스로를 위로해보면 어떨까. 직장인의 애환에 적극 공감하는 헤더 대표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와인 전문가에 한 걸음 가까워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박현주 기자 phj0325@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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