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살에 이혼한 여성 작가, 그가 치르게 된 '살림 비용'
[김현진 기자]
새벽 4시 반, 알람 소리에 눈을 뜨면 조용히 몸을 일으켜 침실을 빠져나온다. 원두커피를 내린 잔을 들고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쓴다. 한참 써 내려가다가도 7시 반이 되면 화들짝 놀라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고 아이를 깨워 등원 준비를 시킨다. 아이가 밥을 먹는 틈새를 이용해 지난밤의 설거지를 하고, 옷을 입고 세수를 하는 동안 재빨리 청소기를 돌린다.
사이사이 늑장 부리는 아이를 독려하고 없다는 걸 찾아 챙겨주느라 잰걸음으로 집 안을 오간다. 하지만 괜찮다. 그래야 아이와 남편이 집을 나서는 순간 다시 책상으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 그렇게 살림 비용을 치러 글을 쓰고 책 읽을 나만의 시간을 마련하는 거니까.
"남자와 아이의 안위와 행복을 우선순위로 두어 오던 가정집이라는 동화의 벽지를 뜯어낸다는 건 그 뒤에 고마움도 사랑도 받지 못한 채 무시되거나 방치되어 있던 기진한 여자를 찾는다는 의미다."(20쪽)
그 기진한 여자를 마주하고, 혼자 힘으로 삶을 꾸려나가기 위해 지불해야 할 비용을 감당하면서 다시 자기 정체성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아 보인다. 작가로 꾸준히 활동해왔던 그녀조차 "글을 쓰거나 가르치거나 이삿짐을 풀지 않을 때는 막혀 있는 욕실 세면기 배관을 뚫는 데 온 주의를 집중해야" 했으니까. (32쪽)
▲ 책 '살림 비용'. |
ⓒ 플레이타임 |
그녀는 허름한 아파트로 옮겨 새로 집을 꾸미고 친구의 헛간을 빌려 작업실로 삼는다. 낡은 집은 수도와 전기가 수시로 끊기고 배관이 막히기 일쑤. 집과 작업실 사이 언덕길을 오르기 위해 전기 자전거도 마련한다. 그래서 앞머리에 나뭇잎을 매단 채 중요한 미팅에 나가고, 수명이 다해가는 컴퓨터로 생계를 위한 글을 쓰지만, 모든 비용을 스스로 책임진다.
그 와중에 어머니의 죽음을 겪어내기도 하면서, 자신의 삶을 챙긴다. 그러는 사이 식탁에서 오가던 고성은 사라지고, 자신의 소설을 완전히 재구성하듯 삶도 오롯이 자신의 뜻대로 재구성할 자유를 얻는다.
소설이 완성되기까지, 이혼 후의 삶이 안정 궤도로 들어서기까지 지난한 노력과 수고가 필요할 테지만, 그녀가 온전히 해내길 진심으로 응원하게 되는 것은, '지난날의 복원'이 아닌 '새로운 구성'을 원한다는 그녀의 말처럼 다시 결혼으로 안착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 홀로 충분한 삶을 꾸려가는 결말로 나아가길 바라기 때문이다.
"여성성이, 적어도 내가 가르침을 받은 여성성이 끝을 맞은 것일 수도 있다. 문화적 인성으로서의 여성성은 이제, 적어도 내 경우엔, 아무것도 표현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남자들이 쓰고 여자들이 연기해 온 이 여성성이 21세기 초입을 여전히 기웃거리는 기진한 유령이라는 점만은 명백했다. 내 배역에서 벗어나 이야기를 중단시키는 데는 어떤 비용이 따르려나?" (77쪽)
'인내하는 어머니, 너그러운 어머니'는 내가 마지막까지 버리지 못한 여성성이다. 아이가 태어나면서 아내의 역할은 많은 부분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 그것까지 해내기엔 넉넉한 아량은 고사하고 시간과 체력조차 부족했으니까. 내게 남은 시간과 체력은 온전히 아이를 돌보는 데 투입되었고, 그런 몇 해를 지나면서 엄마 역할에 의문이 드는 지점에 다다랐다.
어디까지 참고 희생할 수 있을까.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서 아이와 나 사이 여백이 생기기 시작했지만, 아이가 완전히 독립하기 전까지는 '보살핌'의 노동은 지속될 수밖에 없다. 이혼한 리비 또한 글을 쓰다가도 저녁 시간이 되면 고등학생인 딸아이의 저녁을 차려주러 부리나케 가방을 꾸리니까.
깊숙이 뿌리 박힌 모성 신화는 아이를 잘 키워내야 한다는 압박이 되었고, 아이의 요구에는 늘 너그러워야 하며 그런 삶을 인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요한다. 누구도 내게 드러내 놓고 그러라고 요구하지 않는데도, 스스로 자신에게 그런 잣대를 들이밀고 있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인내하는 어머니, 너그러운 어머니'란 완벽하게 해낼 수 없는 역할임이 분명하다. 또한 그런 어머니만이 최선일까 하는 의구심도 지울 수 없다. 한 사람의 삶을 위해, 또 한 사람의 삶을 희생하는 불균형 속에 만들어지는 관계란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
그래서 누군가는 일정 부분의 회한을, 또 한 사람은 부채감을 갖게 되는 관계, 한 사람이 행복한 동안 한 사람은 불행을 감내하는 게 당연시되는 관계를 괜찮다고 여길 수 있을까. 조금 부족하고 불만족스럽더라도,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각자의 삶을 일궈나가는 것이 더 합리적인 게 아닐까. 그래서 불완전할 테지만 누구를 탓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 그런 삶이.
그러니 '내 배역에서 벗어나 (가부장제와 모성 신화의) 이야기를 중단시키'고 싶다. 이야기를 중단시키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다른 배역을 맡고 싶다. 아이 대신 모든 걸 챙겨주며 인내하고 희생하는 어머니가 아닌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꾸려 나가는 한 여성으로 아이 곁에 있고 싶다. 그러려면 "어떤 대가가 따르려나?"(77쪽) 어떤 비용을, 어떻게 지불해야 할까? 고민은 여기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가부장제가 지어낸 신화에서 벗어나기
"파탄한 건 가정이 아니라 가부장제가 지어낸 이야기다." (23쪽) 나와 아이, 남편이라는 세 개의 삶이 누군가의 희생 없이 조화롭게 엮여 공명하는 이야기는 여전히 지켜보고 싶다. 내가 원하는 건 "가부장제가 지어낸 이야기"에서 벗어나 삶을 재구성하는 것.
"우리가 거짓을 멈출 때 더 많은 진실이 창조되고 또 가능해진다."
- <가능성의 예술들> 아드리엔 리치
거짓을 멈추는 데엔 용기와 연습이 필요하다. 거짓이었음을 인정하는 용기, 진심을 찾아내려는 노력, 그리고 익숙한 거짓의 몸짓에서 벗어나려는 의식적인 연습. 그 과정 속에 있다고 느끼는 요즘, 나를 만족시키는 글을 넘어 원고료를 벌 수 있는 글을 쓰고자 애쓰고 있다.
살기 위해 쓰기 시작했는데, 쓰기 위해 살고 있는 것 같다. 나로 존재하기 위해 썼지만 나로 존재하기 위해 살기도 한다. 앞선 두 문장을 매끄럽게 연결해 줄 접속사를 찾고 있는 중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덧붙이는 글 | 이 글의 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됩니다 .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국민지원금 "지금이라도 전국민 확대" 48.2%... "88% 현행대로" 43.7% - 오마이뉴스
- "강남 건물주보다 내가 부자? 자부심 아닌 자괴감 느낀다"
- 성폭력으로 군인 죽어나가도... 그날 회의에서 무슨 일이
- 유기견 '은이'와 함께한 6년, 내가 알게 된 놀라운 사실
- 극우보수와는 다른 토론 전투력 '무야홍' 홍준표
- 국민대, 2012년 이전 논문 17건 조사 확인... 김건희 논문은?
- "손발노동은 아프리카나"... 윤석열, 노동 얘기만 하면 뭇매
- 신규확진 1943명, 수도권 이틀째 80% 안팎…추석 방역 '비상'
- 2024년 한국 독자기술 기반한 고체 우주발사체 쏜다
- 문 대통령과 BTS, 유엔에서 연대와 협력 외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