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보는 조용기 목사의 생애(초창기)

백상현 2021. 9. 16.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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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복음신학교를 졸업한 조용기 목사는 1958년 5월 18일 서울 서대문구(현 은평구) 대조동 공동묘지 옆 깨밭에 천막을 치고 예배를 드린다.

62년 2월 서울 서대문구 순복음중앙부흥회관 헌당 예배를 드렸다.

조 목사는 68년 3부로 나눠 예배를 드려도 좌석이 없자 교회 이전을 준비한다.

당시 김현옥 서울시장을 만난 조 목사는 융자로 여의도에 5000평을 확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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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기 목사가 1958년 서울 불광동 공동묘지 옆 깨밭에 설치한 천막교회 전경.

순복음신학교를 졸업한 조용기 목사는 1958년 5월 18일 서울 서대문구(현 은평구) 대조동 공동묘지 옆 깨밭에 천막을 치고 예배를 드린다. 5명으로 시작한 이곳이 훗날 세계 최대 여의도순복음교회가 된다.

그는 맨바닥에 무릎 꿇고 5시간 이상 병자를 고쳐달라고 간구했다. 그러다 7년간 중풍 병자로 삶을 포기했던 무성이 엄마가 성령의 능력으로 고침 받는 사건이 벌어진다.

조용기 목사와 최자실 목사가 개척한 서울 대조동 천막교회는 질병이 고쳐진다는 소문에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들에게 가장 절실하고 필요한 것은 우선 따뜻한 밥 한 공기, 약 한 봉지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들에겐 복음이었습니다. 실제로 현실적인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전혀 줄 수 없는 복음이라면 그것은 하나의 액세서리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메시지야말로 삼박자 구원의 메시지였습니다.”

병자가 낫는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대조동 천막 교회에 귀신 들린 여인, 중풍에 걸린 의사 부인, 관절염 폐병 중풍 위장병 환자 등이 몰려들었다.

조용기 목사(왼쪽 두번째)가 1960년 전도사 임명식에 참석했다.

“나는 매일 10시간 가까이 목이 터져라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새벽 4시 30분이면 일어나 아침 7시까지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고 아침밥을 먹은 후 12시까지 기도를 계속했습니다. 그리고 잠시 쉬었다가 또 저녁까지 기도만 했습니다.”

1962년 2월 18일 헌당한 서대문 순복음부흥회관 전경.
조용기 목사(앞줄 가운데)가 1966년 목사 위임을 기념하며 장로, 전도사들과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62년 2월 서울 서대문구 순복음중앙부흥회관 헌당 예배를 드렸다. 이후 성도가 1200명으로 늘어났다. 예배를 드릴 수 없어 주차장 마당에 비닐을 깔고 스피커를 설치할 정도였다.

성도가 계속 불어나자 64년 3층, 4층을 증축했다. 67년 다시 5층을 증축했다. 그는 강단에 올라설 때마다 이렇게 기도했다. “성령님, 지금부터는 성령님께서 설교하실 시간입니다. 성령님께서 앞장서 주시면 저는 그저 성령님을 뒤따라가겠습니다.”

서울 서대문 순복음중앙교회 시절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 성도와 들어가려는 성도가 뒤엉켜있다.
1964년 첫 해외선교를 떠나는 조용기 목사를 성도들이 환송하고 있다.

조 목사는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하던 64년 미국 하나님의성회 교단창립 50주년 기념식에 한국대표로 참석해 유창한 영어로 한국교회 상황을 알렸다. 28세 때의 일이다.

조용기 목사가 1969년 제3회 기독교하나님의성회 동북아시아 대회에 참석한 동남아 13개국 대표와 함께 한식집에서 불고기 식사를 하고 있다.

그는 66년 30세의 나이에 기하성 총회장에 선출됐다. 67년 세계오순절 총회 아시아 대표로 영국에서 말씀을 전하고 그해 6월부턴 유럽 부흥성회를 인도했다.

1969년 국제하나님의성회 총회장으로부터 감사패를 받는 조용기 목사(오른쪽).
1969년 순복음중앙교회에서 열린 기독교하나님의성회 동북아시아 대회에서 말씀을 전하는 조용기 목사.

조 목사는 68년 3부로 나눠 예배를 드려도 좌석이 없자 교회 이전을 준비한다. 당시 김현옥 서울시장을 만난 조 목사는 융자로 여의도에 5000평을 확보한다. 그리고 교회재정이 100만원밖에 없었지만 20억원이나 되는 공사를 믿음으로 시작한다.

제2차 석유파동으로 건축자재 가격이 폭등했다. 헌금이 줄고 대출이 막히자 조 목사는 녹슨 철골을 붙들고 “주님, 차라리 이 교회가 내 머리 위에 무너지게 해주시옵소서”라고 부르짖었다.

1971년 여의도순복음교회 예배당의 상량식에 조용기 목사(왼쪽 두번째)와 최자실 목사(오른쪽)가 참석했다.


1971년 민족제단 상량식 때 상공에서 내려다 본 교회 전경.

그는 시멘트 바닥에 쌀가마니를 깔고 무릎 꿇고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훗날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 “처음에는 아파트를 지어서 분양하면 별 어려움 없이 건축비 문제가 해결될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신앙적인 방법이 아니라 인위적인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선 저를 쳐서 눈물로 회개하게 했습니다.”

1973년 5월 완공 3개월을 앞둔 여의도순복음교회 성전.


조용기 목사가 1970년대 초 아내 김성혜 총장과 야유회에서 소감을 밝히고 있다.

눈물겨운 성도들의 헌신으로 73년 9월 1만명이 예배를 드리는 동양 최대의 교회당을 헌당한다. 개척 15년만의 일이었다.

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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