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축구 도약, 어린이집에서부터 시작해야"

조효석 2021. 9. 15. 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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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대 최연소 FIFA 국제심판 출신 홍은아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인터뷰
홍은아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이 지난 9일 서울 종로구 협회 1층 전시관에서 협회 엠블럼에 기대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지훈 기자


홍은아(41)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을 설명하는 수식은 많다. 한국의 대표적인 국제심판이었던 그는 흔치 않은 축구계 여성 행정가이고 현직 대학교수다. 국내 유일의 국제축구연맹(FIFA) 심판 강사이자 한국프로축구연맹 상벌위원이다. 그 많은 직함을 한 번에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여성 축구인’이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그만한 지위에 오른 축구계 여성 인사는 흔하지 않다. 그가 올해 초부터 부회장으로서 맡은 분야는 여자축구와 심판이다. 이 중 여자축구 진흥은 3선을 맞은 정몽규 회장이 취임사에서 첫 번째로 강조한 약속이다. 정 회장이 그를 협회 첫 여성 부회장으로 지목한 건 그래서 의미가 크다. 정치권에 비유하자면 새 정권의 핵심 공약을 실천할 가장 상징적 인사인 셈이다. 국민일보는 지난 9일 서울 종로구 축구회관에서 홍 부회장을 만났다. 부회장으로서 2년 임기 중 3분의 1인 8개월이 지난 시점이다.

빽빽한 이력서

홍 부회장은 젊은 시절부터 또래 누구보다 바빴다. 이화여대 체육학과 재학 때 2급 심판 자격증을 따 경기장을 누빈 그는 졸업을 앞둔 2003년 1월 한국인으로서 최연소인 만 23세에 FIFA 국제심판 자격을 얻었다. 그는 “대학 시절엔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나 중국어와 일본어를 배우러 신촌의 어학원 새벽반을 다녔다”면서 “수업이 끝나면 심판 복장을 챙겨 효창운동장으로 향했고 방학이면 지방을 돌아다니며 심판을 봤다”고 했다.

대학원 졸업 뒤 공부를 위해 영국으로 건너갔을 때도 현지에서 심판 일을 병행했다. 신문사 통신원을 하며 박지성 이영표 설기현 등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1세대 해외파 선수들도 취재했다. 협회의 주선으로 당시 EPL에 막 입성한 지동원의 영어과외까지 맡았다. 그는 “어릴 때 열심히 산 건 맞다. 5년, 10년 뒤를 항상 생각하면서 살았으니 느긋한 삶은 아니었다”고 돌이켰다.

심판으로서도 화려했다. 2008 베이징올림픽에선 브라질과 독일이 맞붙은 준결승 주심을 맡았다. 2009년 아시아축구연맹(AFC) 여자심판상을 받은 뒤 2010년에는 잉글랜드 FA컵 결승 주심을 맡았다. 같은 해 20세 이하 여자월드컵 개막전 주심을 맡으며 한국인 최초 FIFA 주관 대회 개막전 심판진에 오르는 기록도 세웠다. 2012년 런던올림픽에는 한국인으로서 유일하게 주심으로 이름을 올렸다.

2012년 은퇴 뒤에도 분주했다. 30대 초반에 협회 이사에 올랐고 모교 이화여대 체육과학부 교수로 강단에 섰다. 20세 이하 FIFA 여자월드컵 조직위원에 AFC 심판분과위원도 맡았고 2019년에는 FIFA 심판 강사가 됐다. 읊는 것만 해도 숨이 찰 정도의 이력이다. 부회장으로서 부담은 차치하고 스케줄로만 따지면 오히려 요즘이 이전의 삶보다 여유가 있다. 그는 “마침 올해가 교수로서 연구년이라 강의일정이 없다. 인생에 이렇게 여유있던 적이 없었다”고 했다.

여성, 비선출, 비주류

얼핏 보면 꽃길만 걸은듯한 이력이지만 사실 그는 축구계에서 주류가 아니었다. 축구계 자체가 세계 어디든 남성 중심인 데다 심판으로서도 그는 ‘선출’(선수 출신)이 아니다. 협회 부회장직 제안은 그래서 의외였다. 홍 부회장은 그는 “전화를 받고 많이 놀랐다”면서 “발표 3~4일 전에 협회 관계자가 전화를 줬는데 학생상담 등 다른 일정 때문에 40분인가 한 시간 뒤에 콜백을 했던 걸로 기억한다”고 했다.

홍 부회장은 어릴 때부터 운동을 좋아했지만 선수가 되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 테니스부를 잠시 했는데 남자만 출전시키고 여자인 저랑 친구는 못 나간 적이 있다. 그때 화가 나 운동을 그만뒀다”고 했다. 이후 축구를 좋아하게 됐지만 주변에서 축구부를 볼 수 없었기에 선수가 되는 건 상상조차 못했다. 그는 “어릴 적 외국에 가서 여자애들이 잔디밭에서 축구하는 걸 보면 너무 부러웠다”면서 “비슷한 환경이었다면, 어느 수준까지일지는 몰라도 무조건 했을 것”이라고 했다.

“엘리트코스를 밟았다고 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한 그는 “사실 처음에는 선출(선수 출신)과 비선출 사이 벽이 너무 높게 느껴졌다. 과연 ‘축구인’으로 불릴 날이 올까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항상 꼬리표가 있었다. 똑같이 실수해도 선수 출신이 아니라서 경기를 못 읽었다는 말이 뒤따랐다. (베이징) 올림픽 준결승 주심을 보고 나서야 그런 말이 안 들렸다”면서 “어느 순간 축구계에서도 저를 축구인으로 인정하는 게 자연스레 느껴졌다. 뭉클한 감정을 느꼈던 게 기억난다”고 했다.

‘여자축구 부흥’이라는 오래된 구호

국내 축구계가 여자축구 도약을 이야기한 건 오래된 일이지만 극적인 변화는 드물었다. 다른 구기 종목에 비해 필요인원이 많은 여자축구는 학령인구가 줄어든 최근 더 심각한 위기를 맞았다. 홍 부회장이 가장 원론적 해결책인 ‘저변 확대’를 내세우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그는 “저변부터 확대하고 그걸 엘리트 스포츠의 성장까지 이어가도록 하는 건 사실 학계에서 20~30년 전부터 나온 이야기”라며 “이제는 정말 그렇게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까지 왔다”고 설명했다.

홍 부회장은 지난 7월 서울시교육청과 축구교실 업무협약(MOU)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를 계기로 진행한 ‘렛츠플레이 축구교실’ 프로그램은 초등학교 체육수업에 협회 강사가 직접 가서 축구를 가르친다. 그는 “초등학교는 여자아이들이 축구를 접하기에 정말 중요한 시기다. 애초에 목표는 30개 학교 정도였지만 이를 훨씬 넘은 86개 학교가 신청했다”고 설명했다. 중학생을 대상으로도 협회와 서울시교육청은 ‘공차소서’(공을 차자 소녀들아 서울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홍 부회장의 임기는 TV 축구 예능 ‘골 때리는 여자들’과 우연히 겹쳤다. 많은 이들이 여성 유명인이 직접 축구를 즐기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홍 부회장이 세운 목표와 부합한다. 그는 “국내에선 보통 초등학교 고학년쯤 되면 축구는 남성 스포츠로 분류된다. 선생님들 인식도 그렇다”면서 “초등학교 이전부터, 어린이집에서부터 뭔가 해야한다. 학부모들에게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여성 주심, K리그서 볼 수 있을까

홍 부회장이 국내서 활동할 때만 해도 여성 심판들은 남자 고등부 경기에 부심을 서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최근엔 달라졌다. 협회는 세계 축구 흐름에 따라 여성 심판들을 고등부와 대학부 등의 경기에 적극 투입하고 있다. 심판계에서 평생 경력을 쌓은 홍 부회장의 이력상 욕심을 낼만한 주제다. 독일 분데스리가에서는 과거 홍 부회장과 함께 활동했던 동료 심판 비비아나 슈타인하우스가 이미 주심을 맡은 적이 있다.

다만 홍 부회장은 “준비가 부족한 변화는 모두에게 독이다. 차근차근 해나가야 할 일”이라고 선을 그었다. 그는 “여자 심판을 상위 리그에 투입하면 순간적으로 언론이 주목할 수는 있다. 하지만 역할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을 때는 회복이 어렵다. 너무 많은 사례를 봤다”고 했다. 이어 “어디서도 최고의 퍼포먼스를, 남자 못지않은 정도가 아니라 더 나은 퍼포먼스를 보여야 협회가 지원할 수 있고 본인도 감당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저도 여자 후배 주심을 K리그1, K리그2에서 보고 싶지만, 반짝스타는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최상위 리그 주심이라면 모든 심판의 롤모델”이라며 “지금 같은 시기에 후배들이 좋은 퍼포먼스를 필드 안팎에서 더 많이 보여주고 좋은 평판을 쌓아야 한다”고 했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3~4년 안에 K리그1이나 K리그2에서 여성 주심을 봤으면 좋겠다”며 “어린 학생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해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홍 부회장은 심판뿐 아니라 축구계 전반에 여성들을 향한 기회가 늘 거라 예상했다. 평소 만나던 학생들보다 선수들에게 조언하고 싶다며 입을 연 그는 “행정가든 뭐든 은퇴한 뒤부터 다른 분야를 시작하면 늦다. 어학이나 컴퓨터 활용 등 기본적인 기술은 운동하는 시간 외에 틈틈이 준비해놓아야 한다”면서 “해외에서 뛰는 선수들은 어학 등 이점이 있다. 대표팀에 있는 선수들이 준비를 잘해서 5년 이내에 AFC 등 국제기구에서 행정가가 더 많이 나왔으면 한다”고 말했다.

조효석 기자 promen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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